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3238185&PAGE_CD=N0006&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utm_campaign=naver_news&CMPT_CD=E0033M빨치산의 태평소 소리 좋아했던 미군, 국악의 전도사가 되다[이희용의 월드코리안 12] 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민족·국제 이희용(hoprave)▲가야금 타는 해의만만년의 해...
1360년대 말에는 라스 알 카이마(Ras Al-Qaima)의 각 종족들이 정비된 후 항구에까지 진출해 해상 교역에 도전했다. 그저 작은 유목 부락에 불과했던 라스 알 카이마(Ras Al-Qaima)의 상인들이 페르시아 만에 진출했던 당시 중동 세계에서는 몽골과 투르크의 후손들이 일한국을 건국하고 페르시아를 통치하고 있었다. 이들이 가장 주 고객이었으며 항구를 통해 몽골인들은 카펫과 이슬람 도구들을 구매했고 몽골 인들에게서 페르시아와 중국 문물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샤르자 토후족들이 라스 알 카이마(Ras Al-Qaima)의 상인들에게 관세를 물리려고 하자 이에 대해 반발하여 샤르자와 약 10년여 동안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라스 알 카이마(Ras Al-Qaima)는 샤르자와 상관없이 페르시아와 소아시아를 잇는 물류의 요충지가 페르시아 만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이 지역에서의 직접적인 교류를 거행했다. 1372년 교류의 중심이 카타르 지역으로 이동함에 따라 도하 항구가 개방되면서 라스 알 카이마(Ras Al-Qaima)는 아라비아 반도 물류의 중심으로 격상했다.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의 야경, 출처 : Thrillist
푸자이라(Fujaira)는 오아시스 일대에서 관개 수로를 만들고 일부 지역에서 관개 농업을 행했다. 푸자이라 토후족의 아라비아 역사에서 업적 중 하나가 이 관개 농업을 최초로 시행했다는 것이었다. 아랍의 토후 족들은 대개 식료품의 경우 수입에 의존하였는데 이는 사막 지형이 많고 대부분 석회암과 사암으로 구성된 해안 지대가 많아 대규모 농사를 짓는 다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463년 오스만투르크와 인도 지역의 관개 농업의 기술자들이 푸자이라에 들어오면서 공사가 시작되었고 이는 다른 아랍 토후족들의 인부들도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공역 이후, 아라비아 반도 내의 아랍 토후족들이 페르시아와 인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식료품을 의존했던 불편이 해소되었다. 그리고 1466년 푸자이라에서 다수의 철광석 산지가 발견되자 푸자이라 토후 족들은 철광석 산지를 개발하고 철제 용기를 만들어 각 중동 지역에 공급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오스만투르크는 철제 무기를 푸자이라와 거래했기 때문에 오스만투르크의 동유럽 원정이 가능했다.
그러나 푸자이라 토후족은 언젠가 철광석이 고갈될 것으로 판단하고 영내에 대체 광물 자원이 있는지에 대해 조사를 벌이게 된다. 그러다가 1474년에 사막과 해안가에 진주들이 발견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이에 대한 개발에 서두르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푸자이라 토후족은 먼저 진주 사업에 참여하고 있던 두바이에게 공동 개발을 요청해야 했다. 푸자이라는 두바이와 진주를 공동으로 개발하기 시작헸고 여기에서 벌어들인 수입 중 일부를 오만 왕실에 세금으로 내고 나머지는 각 토후족의 사병들을 키우는 군사력 강화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움 알 쿠와인(Um Al-Quwain)은 아즈만(Azhman)과 더불어 가장 늦게 발현하기 시작한 토후족들이다. 이들은 거의 두바이와 아부다비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지만 1852년 근대 시대에 오만 왕국이 갑자기 강력해져 동아프리카 일대를 원정하여 영토를 확장 할 때 오만군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이어 전쟁 참여로 벌어들인 금액으로 움 알 쿠와인(Um Al-Quwain) 지역에 가장 큰 도시인 알 아인(Al-Ain)을 건설하여 완공하게 된다. 이어 움 알 쿠와인(Um Al-Quwain)은 다른 토후족들과는 달리 매우 호전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18세기부터 두바이 남쪽 지역에 거점을 두고 인도 뭄바이와 파키스탄 발루치스탄 인근 지역을 왕래하는 선박들을 공격하여 약탈하고 그 약탈품들을 다시 오스만투르크로 가지고 가서 되팔았다. 움 알 쿠와인(Um Al-Quwain) 토후족들은 해양 지역의 국제 선박들을 습격하여 약탈을 감행하는 해적들로 성장했고 무려 67척의 규모를 갖추었던 대선단을 보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아즈만의 토후족도 마찬가지였는데 1785년에는 네덜란드와 영국의 최대 상선인 동인도 무역선단을 공격하여 대규모 물품들을 약탈했다. 이로 인하여 네덜란드와 영국은 인도와 동남아시아에서 들어오는 물품들에 대해 차질을 빚게 되자 결국 인도양 인근의 다국적 해군들과 연합하여 이들 움 알 쿠와인(Um Al-Quwain)과 아즈만(Azhman)의 해적들을 공격했다. 이들의 거점 지역인 오만 북동부 지역과 예멘 남서부 지역, 탄자니아의 잔지바르 지역을 공격했고 이들은 대부분 토벌되었다. 그러나 일부 이들 토후족들이 소말리아와 케냐의 해안 지역을 거점으로 두고 아프리카와 홍해를 왕래하는 무역선들에 대한 소규모적인 약탈을 지속했다.
이러한 움 알 쿠와인(Um Al-Quwain) 토후족들 일부가 아라비아 반도를 벗어나 아프리카로 진출한 것은 1840년대부터로 대개 소말리아와 케냐의 해안 지대 뿐 아니라 탄자니아와 모잠비크, 마다가스카르까지 분포하여 아프리카로 진출한 아랍 토후족 중 가장 대규모의 면모를 갖추었던 것이다. 움 알 쿠와인(Um Al-Quwain) 토후 족은 비록 아랍에미리트 연합에서 작은 토후족과 영토로 거주했지만 후일 아랍에미리트 연합의 탄생과 결속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아프리카에 정착했던 움 알 쿠와인(Um Al-Quwain)이나 아즈만의 토후족들은 1878년에 영국의 지속적인 토벌에도 불구하고 아라비아 해안 일대와 동아프리카 해안 일대에 완전히 정착했다. 이들은 부족연맹체 형태로 살고 있었지만 동아프리카 토후 종족들에게 문화적으로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1891년까지 아랍 토후족들은 소말리아와 케냐, 탄자니아 일대에서 이슬람을 전파했고 이들은 현재 대부분 무슬림이 되었다. 동아프리카의 무슬림들은 19세기에 아랍 토후족들의 전파와 더불어 오만 왕국을 대리한 통치, 그리고 상당수 많은 토후족들의 이주와 이로 인한 문화적 전달로 인하여 문화적 저변이 취약한 동아프리카에 빠르게 흡수되었다.
물론 동아프리카 지역의 토속 문화들도 존재했지만 메소포타미아와 인도,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을 받은 아랍 토후족들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결국 동아프리카의 이슬람 문화는 아랍 토후족들의 이주민들에 의해 형성되었고 발달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이 지역의 해적 활동은 영국이나 네덜란드의 토벌 이후에도 부분적으로 나타났는데 영국은 동아프리카 해안에 접한 아랍 토후족들과 협상을 맺어 비교적 안전한 해상로를 확보하게 된다. 이러한 협상에 따라 영국이 인도양 일대의 해안을 관리하는 형태가 되었으며 각 토후 족들은 이러한 영국에게 금전도 지원하면서 관리를 유지시키고 있는 형태였다. 그러한 상황으로 인하여 동아프리카 지역에서 영국이 제국주의적 권리를 행사했고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가 개항하자 동아프리카와 인도 서부 해안 지역은 영국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요충지가 되었다. 영국은 동아프리카 해안 뿐 아니라 아라비아 해, 페르시아만까지 영향력을 확대하자 토후족들 중 가장 큰 두바이와 아부다비 지도자들과 마침내 1928년 7월 영국과 동맹을 위한 조약에 서명함으로써 무려 1,000년 이상 지속되었던 오만 왕국의 지배도 종결되었다.
이어 나머지 토후족들도 참여해 1931년 12월, 바이 지역의 주권은 모두 영국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이에 영국에 대한 반감을 가진 아부다비의 일부 토후 씨족 중 가장 강하게 반발한 가문은 알 사이드(Al-Saidh)로 이들은 기존의 오만에게서 독립하고 단독 독립적인 국가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었다. 결국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영국이 불리해지자 영국 정부는 이들 토후족들에게 독립을 조건으로 참전을 요구했다. 따라서 이들은 영국의 요구를 받아들여 오만, 인도 의용군에 소속되어 제2차 세계대전에 영국군으로 참전하게 된다. 그러나 종전 후, 1946년 영국 정부가 약속을 철회하자, 대규모 반영집회 등 반발이 발생했다. 그들 중 지도자인 셰이크 라시드(Sheikh Rassid)는 그의 네 아들들과 함께 토후국들의 단합과 독립을 추진했고 당시에도 횡행하고 있던 해적 토벌에 대해 영국을 군사적으로 도움으로써 영국 정부에게서 조금씩 그 권리들을 인양받아 국가 건설의 기초를 놓기 시작한다. 결국 영국 정부는 1960년 7개 토후족들은 왕국으로 승인했고 이 때부터 7개의 토후국으로 불리게 된다.
이후 1970년 영국이 아라비아해와 인도양에서 완전히 철수함에 따라 1971년 7개 토후국들을 중심으로 회의를 거듭한 끝에 연합을 결성하고 아랍에미리트 연합국이 성립되었다. 셰이크 라시드는 즉위 시대부터 정치적으로 경제적 성장을 위해 두바이 지역에 대한 개발을 서둘렀다. 그리고 아들인 셰이크 막툼은 두바이에서 석유가 발견되자 이를 개발하여 국가 경제를 급속도로 성장시켰고 이슬람 전제주의에서 다수의 외국인과 현지인들을 융합한 국제적인 국가로 성장하기 위하여 여러 정책들을 펼쳐 상당한 실효를 거둔다. 그는 1990년 뇌졸중으로 사망했지만 아랍 토후국들은 셰이크 라시드를 국부(國父)로 추앙했다. 뒤를 이어 즉위한 셰이크 막툼은 공공 도서관, 현대식 공원, 각종 스포츠 시설 등 사회 간접시설을 더욱 확충함으로써 아랍에미리트를 국제 경제의 중심으로 일구었다. 셰이크 막툼은 서민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여 수많은 서민주택을 건설하고 그들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것에 일조함으로써 오늘날의 부유한 아랍에미리트로 만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