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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캄보디아 크메르루주와의 전쟁과 베트남이 도이머이 개방 직전의 경제 침체 원인
  • 알렉세이정 칼럼리스트
  • 등록 2026-05-18 15:04:00

캄보디아는 역사적으로 베트남에 대해 거대한 증오심을 품고 있다. 특히 크메르루주의 수장이었던 폴 포트는 역사적 속성을 통해 베트남에 대한 증오 사상을 갖고, 베트남에서 교육을 받은 이들과 친(親) 베트남 성향의 캄푸치아 인민혁명당 당원들을 대거 숙청했다. 민주 캄푸치아 정권의 광기가 극에 달하던 1978년 후반, 폴 포트는 자국 영토의 수복을 명목으로 자주 베트남을 자극한 것도 모자라 무력으로 베트남을 선제 공격하여 베트남인들을 학살했다. 1975년 이전까지 북베트남 및 크메르루주는 모두 우호적이었는데 같은 공산주의 성향으로서 둘 다 친미 정권인 베트남 공화국 및 크메르 공화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북베트남은 캄보디아 내전 당시 크메르루주를 원조하고 캄보디아 동부에 호치민 루트를 설치하여 남베트남의 베트콩을 지원했지만 겉으로는 우호적일지 몰라도 속으로는 서로를 불신하고 있었다. 중국은 소련과는 다르게 독자노선을 설정하여 모택동의 지도 하에서 인근 약소국들의 영토를 노리고 있었다.

1978년 12월부터 1979년 1월 사이 발생한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 과정과 그 이후의 세력 판도,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한편 북베트남은 중국의 지원은 받았지만 지도자인 호치민과 북베트남 상층부는 중국을 경계하면서 북베트남의 관계가 시간이 갈수록 경색되었다. 그렇게 친중적인 크메르루주와 북베트남의 관계도 자연히 악화되었고 크메르루주도 베트남을 증오하게 되었다. 게다가 과거에 베트남이 캄보디아 동남부의 코친차이나를 병합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캄보디아 대부분을 통치하여 캄보디아의 민족성을 말살하려 시도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크메르루주는 코친차이나를 캄보디아의 고토로 여기고 반드시 수복해야 한다고 보았다. 게다가 크메르루주는 베트남이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통합하여 거대한 인도차이나 연방 건설을 시도하려 한다고 경계했다. 1975년 베트남 전쟁과 캄보디아 내전이 모두 끝났다.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을 점령하여 흡수 통일했고 크메르루주는 론 놀의 크메르 공화국을 붕괴시키고 캄보디아 전역을 장악했다. 


크메르루주는 정권을 장악한 순간부터 베트남과 국경 분쟁을 벌였고 그 격렬함은 전면전에 준하는 지경이었다. 베트남 연구자인 베트남군 대령 응우옌 반 홍(Nguyễn Văn Hồng)의 2004년 연구인 의 기록에 의하면, 1977년부터 1978년 12월 전면 침공 직전까지 베트남군은 총 3,000명이 전사하고 5,500명의 부상자를 냈으며 1977년 6월부터 1978년 12월까지 캄보디아 군도 38,563명의 사상자와 5,800명의 포로를 냈다. 이는 베트남 측의 자료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피해는 축소하고 상대의 피해는 과장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만 베트남 또한 최소 8,500명의 사상자를 내는 등의 큰 피해를 입은 것은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캄보디아 크메르루주 군사들은 수시로 베트남 영토를 침공하여 바 축(Ba Chuk) 학살 등의 만행을 벌였다. 그 이전까지 베트남은 미국과의 전쟁에 대한 내부 수습과 내부 숙청으로 인한 안정화에 노력하고 있었으며 크메르루주의 배경이 중국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중국이 참전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기 떄문에 수비적인 태도로 나서 최대한 무시했다. 


그러나 크메르루주가 베트남에서 양민 30,000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벌이자 결국 분노가 폭발하게 된다. 이에 중국과의 적대 관계가 되어도 상관없기 때문에 캄보디아를 공격해 크메르루주를 붕괴시키고 캄보디아에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자는 결정을 베트남 공산당의 상부에서 내리게 된다. 결국 크메르루주의 축출 및 친베트남 정권 수립을 목표로 베트남군이 캄보디아를 침공했다. 1978년 12월 25일, 중 포병과 공군의 지원 하에 13개 사단으로 구성된 베트남군 150,000명과 반(反) 크메르루주 세력들로 구성된 친베트남 공산주의 반군 조직인 캄푸치아 국가 민족 연합 전선(FUNSK)이 캄보디아를 전면 침공했다. 베트남 전쟁으로 전쟁에 대한 이해도와 숙련도가 높을 뿐만 아니라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버리고 갔거나 아니면 남베트남이 패망하며 넘긴 무기 등으로 무장한 베트남군에게, 크메르루주는 2주 만에 병력의 절반을 잃는 참패를 당했다. 이에 베트남군은 크메르루주 정권의 거점지인 프놈펜으로 진격하였다.


한편 이에 놀란 크메르루주의 지도부들은 급하게 수도인 프놈펜을 탈출하여 캄보디아 서부 지역으로 도주했고 이듬해 1월 7일 베트남군은 비어 있는 프놈펜을 점령했다. 그리고 다음날 베트남의 괴뢰정권인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베트남군은 계속 진격하여 17일에는 태국 국경과 마주한 캄보디아 남서쪽 코콩(ក្រុងខេមរភូមិន្ទ Koh Kong)을 함락하여 캄보디아 전역을 장악했다. 그러나 이것은 베트남으로 인한 태국 및 중국과의 전쟁으로 가는 첫 단계에 지나지 않았다. 베트남은 캄보디아에서 신속한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지만 얼마 가지 않아 캄보디아와 국제사회의 반발에 직면해야 했다. 정글로 추방된 크메르루주는 물론이고 전 국왕 시아누크가 조직한 중립적인 성향을 가진 반(反) 베트남 조직 '민족 통일 전선(FUNCINPEC)', 전 수상 손 산(Son San)이 조직한 반공 성향 반(反) 베트남 조직 '크메르 인민 민족 해방 전선(KPNLF)'이 괴뢰정부와 베트남에 맞섰다. 


그들 중 숫적으로 가장 거대한 조직은 역시 크메르루주로 1984년 당시 30,000~5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있었으며 그 뒤를 KPNLF(12,000~15,000)와 FUNCINPEC(5,000)이 차례로 이들과 연합했다. 베트남은 1981년 말부터 태국-캄보디아 국경지대에서 반(反) 베트남 파르티잔들의 게릴라전에 시달리게 되었다. 캄보디아의 날씨는 크게 5월~10월 사이의 우기, 그리고 11월~4월 사이의 건기로 나뉘는데 일반적으로 베트남군은 건기에 공세를 수행했고 크메르루주는 우기에 주도권을 잡았다. 1982년 베트남군은 캄보디아 북서쪽의 프놈 말라이(Phnom Malai)와 남서쪽의 카르다몸 산맥(ជួរភ្នំក្រវាញ Cardamom Mountains)의 크메르루주 기지에 대한 대규모 공세를 벌였으나 실패했다. 이렇게 서쪽 국경지대가 전쟁에 돌입하게 되자 자연히 이 지역에서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의 통치력이 약화 되었다. 이에 베트남은 1984년부터 대대적인 반(反) 베트남 조직에 대한 토벌에 착수했다. 7월 19일 베트남은 국경 지대 게릴라들의 활동을 제약하기 위해 K5 계획(K5 Plan)을 실행하게 된다. 


이 계획으로 인해 게릴라를 은폐하는 열대림을 대거 벌채한 다음 그 자리에 철조망과 참호를 설치하고 대전차 지뢰와 대인 지뢰를 살포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역적 특성상 나무를 베어내도 어차피 1년만 지나면 다시 사람 키만큼 나무가 자라기 때문에 별 효과는 없었다고 하였으며 이때 대량으로 살포한 지뢰는 현재까지도 캄보디아인들을 살해하거나 불구로 만들고 있다. 11월에는 60,000명의 병력이 동원된 대규모 작전을 벌여 크메르루주와 KPNLF의 박멸을 시도했다. 이듬해 3월 베트남군은 양대 조직의 주요 기지를 모두 점령하고 병력의 1/3을 격멸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게릴라전은 지속적으로 이어졌고 심지어 1987년에는 베트남과 가까운 중부 지역에서도 게릴라들이 활동했다. 그리고 베트남군이 국경지대의 크메르루주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인근의 태국군과 끊임없이 교전이 벌어졌다. 교전 자체는 1979년부터 간헐적으로 벌어졌지만 1985년에 특히 빈번하게 벌어졌다. 


베트남은 캄보디아에 괴뢰정권을 수립하고 캄보디아에 대한 정치적인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 외에도 군사적 우위를 누리려고 했지만 그 대가로 막대한 군비 지출과 국제적 고립으로 인해 극심한 경제난을 겪어야 했다. 캄보디아 주둔군을 철수했다가는 자칫 자신들이 세운 괴뢰 정권이 붕괴되고 크메르루주의 재집권으로 이어질 염려도 있었기 때문에 쉽게 철군할 수도 없었다. 전면전은 1979년 1월에 사실상 종결되었지만 주둔군들은 오히려 200,000명까지 늘어났고 1982년 일방적인 철수를 발표한 이후에도 1984년 180,000명, 1988년 100,000명이 주둔했다. 게다가 중국 국경지대와 라오스에도 각각 250,000명, 45,000명을 배치했다. 당연히 감군은 쉽지 않았고 1987년에도 총 126만(육군 110만, 해군 40,000, 공군 120,000명)에 달하는 대군을 유지했다. 그로 인해 베트남 경제는 캄보디아 전역 및 중국과의 국경 분쟁과 그에 따른 막대한 군비 지출,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실패와 국제적 고립으로 1980년대 내내 정체되는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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