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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반환의 이후의 사회와 영화, 예술 문화의 침체
  • 알렉세이정 칼럼리스트
  • 등록 2026-05-18 23:15:31

1997년 6월 30일, 홍콩 총독부에서 영국의 국기인 유니언 잭이 내려오고, 마지막 총독인 크리스토퍼 패튼(Christopher Patten)은 눈시울을 붉히며 홍콩을 떠났다. 당시 패튼은 유니언 잭이 끌어내려지는 순간 고개를 숙이며 매우 착잡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 장면은 전 세계를 통해 생중계 되었다. 크리스토퍼 패튼(Christopher Patten), 이 인물은 영국 현대 보수주의의 상징 중에 하나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그는 대처 정권과 존 메이저 정권에서  외무연방부 해외개발 담당 부장관, 환경부 장관, 랭카스터 영지 담당 장관 겸 보수당 의장 등을 지냈던 전형적인 보수인사였다. 1992년 영국 총선에서 보수당의 승리와 재집권을 이끌어냈지만 정작 자신은 자신의 담당 지역구인 랭카스터 구역에서 패배해 낙선했다. 존 메이저는 패튼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가 당선되면 재무장관에 임명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의 지역구에서 탈락했으니 그를 내각에 기용하기에는 여러 정치적 무리수가 있었고 고민과 장고를 거듭했다. 

1971년 홍콩 센트럴의 퀸즈 로드(Queen's Road Central) 풍경, 출처 : Trip.com


당시 홍콩에는 데이비드 클레이브 윌슨(David Clive Wilson)이 총독이었지만 영중공동선언(Sino-British Joint Declaration)으로 인해 홍콩을 중국으로 반환하기로 한 상태였다. 영국은 1979년 홍콩 신계 지역의 조차가 1997년으로 끝남에 따라 해당 조차 기간을 연장하려 했다. 그러나 등소평이 이를 거부했다. 결국 홍콩 지역을 중국에 돌려주는 것으로 가닥이 잡혔다. 이에 영국 입장에서는 홍콩을 계속 점유하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다. 홍콩 행정구역으로 볼 때 이미 기존의 홍콩 섬 및 구룡반도는 도심 지역으로서 개발이 끝난 상태였고, 이를 배후지로 상정되는 지역이 바로 신계 지역이다. 이 때 신계 지역의 조차 기간이 끝나고 중국에 반환되면 홍콩은 기존의 도심 지역만 남게 된다. 이렇게 되면 홍콩의 자립은 불가능해지고 영국 입장에서 거리가 너무 멀어 직접 통치도 불가능하게 된다. 이 상황에서 신계를 조차하는 문제가 절실해질 수밖에 없는데 조차 기간 연장이 무위로 끝나게 되면서 영국은 홍콩의 영구적인 점유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결국 1982년 마가렛 대처 총리가 베이징을 방문하면서 협상이 시작되었고 일국양제(一國兩制)의 원칙을 세우면서 영국은 홍콩 전역을 중국에 돌려주는 것으로 합의했다. 기본합의서 조인은 1984년 10월, 리처드 에반스 주중 영국대사와 저우난 중국 외교부 부장 사이에서 이루어졌으며 12월 19일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와 자오쯔양 중국 국무원 총리가 공동 발표를 히고 데이비드 클레이브 윌슨(David Clive Wilson)이 총독으로 부임해 오면서 최종 날인을 하면서 결국 홍콩의 1997년 양도는 확정되었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일국양제(一國兩制)는 1국가 2체제를 말함인데 중국 안에서 두 체제인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공존시킴으로써 홍콩의 체제를 지키겠다는 제도다. 이 이 일국양제는 1997년부터 2047년까지 50년 동안 보장해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일국양제 기본이 념에 의거해 2047년 6월 30일 당시까지 영국령 홍콩의 자본주의적 경제와 정치 체제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 따라서 중국식 사회주의 체제는 2047년까지 홍콩에 적용이 되지 않고, 중국 헌법 및 공법도 적용되지 않으며 홍콩 내에서는 헌법의 역할을 하는 홍콩 기본법과 홍콩의 형법, 민법 등이 적용된다.


또한 중국의 일반적 지방 행정편제를 적용받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당장 홍콩의 행정 수장은 당 서기 및 성장, 시장이 아닌 행정 장관이다. 영국은 반환 직전까지 일부 의회 의석을 홍콩 주민들에 의해 직선제로 선출하고, 영국과 중국 양국이 합의해서 만든 홍콩 기본법에 따라 행정 장관 간선제를 실시하는 등 어느 정도 민주적 체제를 이식해놓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려면 당시 영국 총독인 데이비드 윌슨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윌슨 총독은 좌파적 성향의 정치인이자 노동당 소속이었고 런던 대학에서 중국 현대사를 전공했으며 홍콩 대학에서도 중국어를 전공하는 등, 노골적인 친중 인사였다. 그러던 사이 1989년 천안문 사태가 발생하자 중국 정부를 지지하는 발언을 하여 홍콩 시민을 불안에 떨게 만들었다. 윌슨의 상태로 보아 존 메이저 총리는 일국양제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을 것을 우려해 크리스토퍼 페튼에게 홍콩 총독 지위를 제안했다. 물론 보수당 선거 당시 그가 지역구에서 참패했기에 챙겨준 측면도 강했지만 존 메이저는 페튼의 정치적 능력을 신뢰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페튼은 이를 수락하여 1992년 7월, 홍콩 제28대 총독이자 마지막 총독으로 부임하게 된다.


홍콩 시민들은 페튼이 단순히 현상 유지만 하다 영국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는 그 동안 홍콩 총독들이 대부분 중국 정세에 밝은 외교관 또는 학자 출신이었기에 광둥어와 중국어를 최소한 의사소통은 무리없이 가능할 정도의 사실상 중국 전문가들이었다. 그러나 페튼은 광둥어는 물론, 중국어도 한 마디 할 줄 몰랐다. 그래서 특별한 돌발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 이상 1997년 7월 1일, 홍콩의 주권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넘어가는 순간까지 재직하는 '마지막 총독'이 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페튼은 개혁을 시도했고 1994년 선거 개혁을 실시한다. 당시 홍콩인들의 참정권은 제한되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총독을 현지인들이 선출하거나 영국 정부에서 임명하더라도 실권은 현지인 총리가 갖도록 했던 다른 식민지들과는 다르게, 홍콩은 반환되는 날까지 영국인 총독이 여전히 전권을 갖고 있었다. 선거제도도 전임 머레이 맥클레호스(Murray Mac Lehose) 총독으로 인해 1982년에서야 도입되었고, 홍콩 입법국 의원들은 간선제로 선출했으며, 직선제인 구의회 의원도 1/3 가량을 총독이 임명했다. 


페튼은 선거개혁을 실시하면서 ① 소선거구제 도입, ② 투표연령을 만 18세로 하향, ③ 임명직 구의원 폐지, ④ 직능대표의원 선거권자 범위를 확대시켰다. 이는 1997년에 홍콩 반환 이전, 민주주의를 확실히 뿌리내리게 만들려는 페튼의 정책이었다. 전임 윌슨 총독을 통해 홍콩 반환 후 선거권 확대로 민심을 얻으려 계획하다가 페튼에게 완전히 선수를 빼앗긴 중국 측은 분노했다. 중국은 홍콩이 반환되면 이 헌법 조치들을 무효화할 것이라며 엄포를 놓았고 결국 반환되자마자 입법국은 중국 공산당에 의해 해산되었다. 이후 페튼이 한 일은 홍콩 내 인문 예술, 문화업계에 대해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한 일이었다. 그 유명한 영화 <패왕별희>도 1992~93년, 페튼 총독 시기에 만들어져 상영되었고, <중경삼림>도 비슷한 시기에 나왔다. 그러나 반환일인 1997년 7월 1일이 다가올수록 침체기에 빠지게 되었고, 1990년대 중반부터 연간 관객수조차도 2000만 명 대 아래로 추락했다. 홍콩 영화의 점유율도 1992년 홍콩 영화의 매출은 15억 달러에 이르렀으나, 이듬해에는 11억 달러로 폭락했다.


게다가 1990년대 중반에는 문화대혁명을 소재로 하거나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들은 제작 중단되거나 상영이 금지되었고, 개봉되었어도 홍콩에서 흥행에 크게 실패하거나 대륙에서는 상영이 아예 금지되면서 홍콩 내 예술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점차 침해를 받게 된다. 더불어 1997년 7월 1일 홍콩에 주둔하던 영국군은 철수했고 중국군이 홍콩에 주둔했으며 7월 1일 홍콩에는 오성홍기가 걸리면서 중국 영토가 되었다. 그 여파로 많은 일반 홍콩 시민들은 물론 영화인들도 중국의 억압 통치를 피해 캐나다나 호주 등으로 이민을 떠났다. 특히 장국영은 캐나다로 국적을 바꾸기도 했다. 더불어 밴쿠버에 있는 비싼 저택은 거의 홍콩인들이 대거 구입했다. 그러나 서구권으로 진출한 홍콩인들이 홍콩에서의 영화 커리어를 이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했으며 할리우드의 주류로 자리잡지 못했다. 결국 이들은 2000년대 초반까지 대부분 홍콩이나 중국 본토로 다시 돌아와 영화를 찍게 된다.


그러나 홍콩 시장은 좁은데다 중화권으로 반경을 넓혀도 최소한 8, 90년대 전성기를 이끈 홍콩 배우들이 설자리는 이미 잃어가고 있었다. 게다가 배우들의 세대 교체도 실패했다. 특히 홍콩 영화 액션 스타는 견자단을 마지막으로 사실상 그 계보가 끊겼다. 물론 신진 홍콩 액션 배우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주윤발, 장국영, 성룡, 이연걸, 견자단과 같은 압도적 위상과 인기를 지닌 액션 스타는 찾아볼 수 없다. 더불어 홍콩의 연예인 지망생들도 대부분 중국 본토에서도 데뷔하려는 실정이다. 좋은 각본이 있으면 대부분 중국 영화쪽으로 넘어가서 제작되며, 중국의 검열 기준에 어긋나는 영화는 제작될 수 없기에 홍콩만의 특색을 가졌던 영화들은 더 이상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게다가 천안문 발언 등 중국 공산당에 비판적이었던 장국영을 비롯한 배우들은 매우 검열이 심했다고 한다. 따라서 장국영이 자살했을 때, 한 동안 중국 정부가 살해했다는 설이 돌기도 했다. 홍콩의 영화, 가요, 예술은 2003년 4월 1일 장국영의 죽음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할 정도로 그 차이의 명확성을 보여 주며 일각에서는 쇠퇴하고 있었던 홍콩 영화가 중국의 간섭으로 인해 완전히 나락으로 갔기 때문에 "홍콩 영화가 완전히 끝났음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 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장국영의 죽음과 함께 홍콩 영화는 완전히 끝났다. 어찌보면 그는 '홍콩 영화의 흥망.'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던 셈이다. 홍콩 영화는 중국화가 되기 전, 자유 홍콩을 상징하는 주체였다. 많은 이들이 홍콩 영화를 보고 80년대 홍콩을 동경하기도 했으며 나 또한 어린 시절에 그러했다. 그러나 현재 대륙 시장을 의식해야 하는 신세가 된 홍콩 영화계에서 중국의 입김을 배제한 대작이 나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어 버렸다. 이제 홍콩 영화는 어린 시절 아련하게 추억으로 남았다. 이제는 유튜브로 간간히 검색해 보면서 어린 시절 추억에 잠기는 수준으로 남았다. 꿈속에나 그리는 나의 가슴 속 연인 <천녀유혼>의 섭소천(聶小倩)을 연기한 왕조현은 이제 할머니 나이가 되었고, 미소년 남자 영채신을 연기한 장국영은 이제 이 세상에 없는 하늘 나라로 가버린 사람이다. 이렇게 홍콩 영화는 나 뿐만이 아니라 모든 이의 추억으로 서서히 사라져갔다. 그러면서 홍콩의 자유와 전성기도 끝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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