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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의 연해주 점령의 역사
  • 알렉세이정 칼럼리스트
  • 등록 2026-05-20 02:35:59
  • 수정 2026-05-20 10:54:15

고고학적인 자료에 의하면 연해주에 최초로 살았던 사람들은 고아시아인들과 퉁구스계 민족들이었다. 이들은 5~6만 년 전의 구석기 시대에 이주해 온 것으로 추정되며 나나이, 우데게이, 에벤키 같이 퉁구스어를 사용하는 부족들이 아직도 연해주와 아무르 주에 거주하고 있는 실정이다. 698년부터 926년까지, 연해주 지역에는 발해가 이 지역을 최초로 직접 통치하였다. 발해는 연해주 이 외에도 동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통치했으며, 동만주와 한반도, 연해주 지역의 일부를 통치하였던 고구려의 후예와 퉁구스 계통의 말갈족으로 주요 주민들이 구성되어 있었다. 

1870년대 러시아 제국에서 제작한 남우수리 지방 지도(Карта Южно-Уссурийскаго Края), 출처 : Facebook : History Buffs


1115년부터 1234년까지 극동 러시아의 남쪽 부분은 보다 강력한 제국인 여진족의 금나라가 지배하였다. 여진족은 퉁구스계의 민족으로써 이들의 산업 경제인 유목과 농업이 그들의 기반이 되었다. 금나라는 야금, 조선(造船) 등의 산업이 존재했으며 금나라는 발해와 마찬가지로 송나라, 고려,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북부 중국을 점령한 금나라는 매우 강한 국력을 과시하였다. 금나라는 몽골 제국 칭기즈칸의 침입으로 멸망하였고, 이후 300년 이상, 연해주 지역은 비옥한 토지와 독특한 동식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문명이 발달하지 못했다. 그러나 연해주 지역과 만주를 주 무대로 활동한 만주족이 17세기 초 기반으로 중원을 통일하고 청나라를 건설하면서 청나라의 영토가 되었다. 


17세기 중엽 러시아 제국이 아무르 강 방면으로 남하하면서 청나라와 러시아 사이에 국경 분쟁이 발생했다. 1689년에는 양국은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해 스타노보이 산맥을 국경으로 정했다. 이후 제2차 아편전쟁(1856~1860년)으로 청나라가 혼란에 빠지게 되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남진했으며 니콜라이 무라비요프-아무르스키(Николай Муравьёв-Амурский, 1809~1881) 백작에게 있어 러시아가 동해안 지방을 획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로 자리 잡았다. 그래서 러시아는 1858년에 체결한 아이훈 조약으로 아무르 강의 이북 지역을 점령했고, 1860년에 체결한 베이징 조약으로 인해 우수리 강 동쪽인 연해주를 차지하면서 동해안 진출에 성공하게 된다.


이처럼 러시아인들이 시베리아 지역을 장악한 이후인 17~18세기에는 초원 스텝 지역과 그 이남 지역에는 준가르 제국과 청나라 제국이라는 두 개의 거대한 국가들이 수립되어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러시아 제국은 청나라가 약화되는 19세기 후반에 가서야 극동 남부 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문제는 쇠퇴해졌다 해도 청나라는 여전히 극동 지역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러시아 제국 정부는 새로 합병한 극동 지역을 가능한 빠른 시간 내에 러시아화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한 결과로 인해 유럽 러시아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비 아시아계 농민들을 연해주 지역으로 이주시키는 작업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초기 연해주 이주는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육로 이주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육로는 러시아인들이 시베리아 지역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사용한 전통적인 이주 경로로, 합병한 지역을 식민화하는 가장 일반적인 정책이었다. 그러나 육로 이주는 오랜 이동 시간과 더불어 이동 비용이 많이 들어 부담스러웠고, 장기 이동에 따른 높은 사망률 등 여러 가지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로 인해 러시아 제국 정부에서는 해로를 통해 이주하는 새로운 방식을 강구하게 되었다. 오데사를 출발해서 지중해와 인도양을 지나는 해로 이주는 육로 이주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을 모두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 정부 당국은 물론이고 이주를 희망하는 농민들에게도 크게 호응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결과로 인해  19세기 말로 갈수록 극동 지역에서 러시아계 이주민 수효는 빠른 속도로 증가하게 되었다. 반면 산업 경제적인 측면으로 볼 때 농업 이주와 달리 어업 이주는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19세기 말까지 러시아 제국에서는 우수리 연안 어업 경제를 통제하기 위해 몇 차례에 걸쳐 러시아계 어민 이주를 추진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우수리 지역에서 어업에 비해 농업이 가지는 보다 큰 경제적 이득과 보다 작은 육체적 위험 등과 같은 요소들로 인해 실패했다. 이에 유즈노 우수리(Южно Уссурий) 지역으로 이주해 온 어민들은 농업이 가지는 여러 가지 이점들로 인해 어업 대신 농업에 종사하는 측면을 선택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19세기 말로 가면서 이주가 활발해 지자 우수리 지역으로의 이주 초기에 나타났던 남녀 성비 불균형 문제도 해결되어 갔다. 먼저, 이주 초기를 제외하면 성비 불균형 문제는 당대 현지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매우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다. 더불어, 해로 이주로 인해 이주민 수가 빠르게 증가하면서 성비 문제는 점차 완화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어 가고 있었다. 


따라서 1859년부터 1882년 사이에 95개의 정착지가 건설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도 이 시기에 건설되었으며 당시 인구의 3분의 2 이상은 농업, 수렵, 생선 교역에 종사하고 있었다. 19세기 말엽에는 석탄 채굴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케일, 녹용, 목재, 게, 건어물, 해삼 등도 수출되기 시작하였다. 1905년에는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랄 산맥 아래의 첼랴빈스크까지 개통되면서 극동으로의 연결은 급격한 진전이 이루어져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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