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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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4학년 때 저녁의 하교버스에서 5년 연상의 누나가 내게 말을 걸어와 알게 된 일이 있다.
그녀는 梨大영문과 출신의 28세의 영어교사였다. 당시의 내게는 28세라면 상당히 노처녀로 인식되었다. 그녀는 아현시장에 살기 때문에 당시 아현동에 살았던 나와 버스를 같이 탄 것이었다.
나는 물론 그녀의 전화번호를 받았지만 그녀는 내게 왜 전화번호 안 알려 주느냐고 섭섭해 했다. 하지만 당시의 우리 집에는 전화가 없었다.
나는 약속대로 그녀의 집에 전화를 했다. 처음부터 아무개씨 하지 않고 아무개 누나 바꿔달라고 하는 것을 두고 그녀의 집에서는 너무 순진한 애라며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녀와 가끔 만남을 가졌다. 여름방학이었기 때문에 시내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광화문 부근에서 한 동급생이 애인과 손잡고 가는 것과 마주쳤다. 서로 인사하고 가는 중에 그 누나는 "우리도 손잡고 갈까?"하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에이 창피하게요."하고 거절했다.
당시 나는 교회를 출석하지 않았으나 그녀가 권하는 시내의 유명교회에 그녀를 만나러 가기도 했다.
나의 만남을 그때 아는 친구들에게도 얘기했다. 그 여자와 맺어지면 어떻겠냐는 그들의 말에 나는 두려움을 느꼈다.
사실 그녀는 "내가 아는 교수님은 남편이 5살 아래더라."고 하기도 했다. 한번은 저녁에 아무도 없는 그녀의 집에 따라갔지만 저녁을 먹고 다른 식구가 올까하는 두려움 때문에 허겁지겁 나온 적도 있었다.
2학기가 되어 나는 이제는 만날 시간이 없을 것이라고 했지만 그녀는 시간은 얼마든지 낼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절정을 넘어선 대학생활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2학기가 되어 굳이 시간을 내어 밖에서 그녀를 만날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그녀를 완전히 피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졸업 후 대전의 직장으로 가기 전에 그녀에게 연락을 하여 만났으며 한번 놀러오라고도 했다.
학생 때는 비록 어린 나이의 두려움 때문에 그녀를 충분히 적극적으로 수용하지는 못했으나 직장생활을 하게 된 후 달라진 환경에서 기회가 더 있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얼마 후 다시 전화했을 때는 그녀는 출가했다고 한다. 지금도 이름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그 누나… 그 때 가자고 했던 그 교회로 찾아가면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도 그럴 때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아예 만화를 그려주는 챗지피티
2009년 同名 전자책 수필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