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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문화예술] 천년의 장단 장고(杖鼓), 치고 어르는 소리[3부 기획시리즈
  • 이형구 칼럼니스트
  • 등록 2026-05-22 09:01:50
  • ① 잃어버린 소리의 뼈를 찾아서, 장고 복원가 김동경 선생님

계룡의 기슭, 소리가 머무는 자리

 충청남도 계룡시 엄사면 사랑재길. 계룡산의 서쪽 기슭이 완만하게 낮아지며 들판과 만나는 그 자락에, 세상의 소란과는 한 박자 느리게 호흡하는 골목이 있다. 도시의 속도를 벗어나 이 길로 접어들면 무언가 다른 시간의 결이 발바닥을 통해 올라오는 것 같은 감각을 받게 된다. 계절의 냄새가 더 진하고, 바람의 방향이 더 선명하며, 침묵이 더 두터운 곳이다.

그 길 위에 김동경 선생의 작업장이 있다. 간판 하나 내걸지 않은 낮고 단단한 집. 모퉁이 안쪽으로는 나무가 겹겹으로 쌓여 있고, 굳게 닫힌 문을 열어 들여다보니 이름 모를 연장들이 가지런히 선반위에 놓여있다. 처음 찾아온 사람이라면 자칫 그냥 지나치기 쉬운 곳이지만, 문을 열고 공방 안쪽으로 들어서는 순간 공기가 달라진다. 나무와 옻의 향, 오랜 손길이 스며든 도구들의 냄새, 그리고 시간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장인의 공간 특유의 냄새. 그것은 단순히 후각적인 자극이 아니라, 이곳에서 얼마나 오래되고 깊은 무언가가 이루어져왔는지를 온몸으로 알아채게 만드는 신호다.

 김동경 선생은 이 자리에서 25년째 장구(장고, 杖鼓 '지팡이 장', '북 고' 로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1994년 국악기통일안 명칭으로 장구라는 명칭을 인정하고 있다)를 만들고 있다. 정확히는 장구의 원형을 복원하고 있다고 해야 옳다. 지금 흔하게 볼 수 있는 장구가 아니라, 한때 존재해 왔으나 어느 순간 사라져버린 원래의 장구 그 소리와 형태와 제작 방식을 되살리기 위해 선생은 계룡산 기슭에서 밤낮으로 연구, 제작에 몰두하고 있다. 그 사이 계절은 수십 번 바뀌었고, 계룡산의 색깔은 해마다 달라졌다. 그러나 작업장 안에서 선생의 손이 향하는 방향은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잃어버린 소리를 향해, 늘 같은 쪽으로.

방문객이 자리를 잡고 앉으면 선생님은 먼저 무언가를 들어 보여준다. 그것은 완성된 장구일 수도 있고, 아직 옻칠을 올리는 중인 반제품일 수도 있으며, 어느 날은 오래된 사진 한 장이기도 하다. 말보다 먼저 몸이 움직이는 사람이다. 그 손이 가리키는 것들 속에 선생님의 25년이 담겨 있다. 묻고 듣고, 또 묻고 또 듣는 시간이 흐르면서 계룡의 오후 햇살이 작업장 마루 위를 천천히 가로지른다. 그리고 그 긴 대화의 끝에서, 목적없이 이 곳에 찾아온 연유를 깨닫는다. 이곳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은 악기 한 대가 아니라, 우리가 잃어버렸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던 어떤 소리의 원형(原形)이라는 것을.

※ 고구려 28수 별자리 장구_김동경선생 작(2020년)

 

천 년을 울려온 악기, 장고(杖鼓)라는 이름의 무게

 허리가 잘록하게 조인 모래시계 모양의 통 양면에 가죽을 씌운 악기. 그것이 장고(杖鼓)다. 가느다란 채로 한쪽 편을 치고, 맨손 혹은 손가락으로 반대편을 어르며, 두 손이 만들어내는 서로 다른 음색이 하나의 장단으로 합쳐진다. 이 단순하고도 정교한 구조 위에서 우리 음악의 뼈대가 천 년 넘게 세워져왔다.

 장고(杖鼓)의 기원은 정확히 밝혀진바가 없다. 고구려 고분 벽화나 신라 범증 등에서 4~6세기경 그림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이 시대는 지금보다 크기가 훨씬 작은 형태의 기록이다. 그 원형의 유래를 확인할 길은 없으나 어느순간 한반도에 자리를 잡으면서 서서히 이 땅의 소리로 자리잡아갔고, 고려와 조선을 거치는 긴 세월 속에서 우리 고유의 악기로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 가죽을 진동시켜 소리를 내는 막명악기(膜鳴樂器)로서, 장고(杖鼓)는 궁중의 의례 음악으로부터 마을의 두레와 굿판에 이르기까지 우리 음악 문화의 거의 모든 층위를 아우르며 쓰였다. 정간보(井間譜)에 기록된 아정한 궁중 음악의 장단도, 논두렁을 달리던 풍물패의 신명도, 그 모든 음악의 흐름을 조율하고 받쳐온 것이 장고(杖鼓)였다.

악학궤범(樂學軌範)에 기록된 이름은 장고(杖鼓), 즉 지팡이로 치는 북이다. 그 이름이 시사하듯 채로 치는 편면(鞭面)과 손으로 어르는 고면(鼓面), 두 면의 서로 다른 성질이 이 악기의 본질이다. 편면은 맑고 날카로운 타격음을 내고, 고면은 묵직하고 깊은 울림을 낸다. 이 두 소리가 한 악기 안에서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며 장단의 억양(抑揚)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한국 전통 무용인 장고춤에서 연주자는 악기를 몸에 안고 직접 춤을 추면서 장단을 치는데, 이는 이 악기가 단순한 반주 도구를 넘어 그 자체로 표현의 매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민요의 반주에서, 무속 의례의 신명에서, 풍류방의 합주에서, 그리고 오늘날 국악의 거의 모든 장르에서 장고(杖鼓)는 여전히 없어서는 안 될 악기로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이토록 오래되고 깊은 뿌리를 가진 악기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원형이 어떠했는지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지금 거의 없다. 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면서도, 정작 그 천 년 전의 소리가 어떠했는지를 우리는 잃어버렸다. 김동경 선생이 계룡의 공방에서 25년째 매달려 있는 물음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 악기가, 과연 원래의 장고(杖鼓)인가.

※ 풍물 장구_김동경선생 작(2013년)


수적(竪笛)의 세계로, 무예의 몸이 소리를 만나다

 사람이 어떤 길로 들어서는 데에는 으레 그럴듯한 계기보다 우연에 가까운 충격이 앞서는 법이어서, 돌이켜보면 그 첫 번째 떨림의 순간이야말로 이후 수십 년의 방향을 이미 다 결정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김동경 선생의 경우가 그러했다. 초등학교 4학년의 어린 나이에 태권도로 첫발을 디딘 그는 쿵푸, 검도를 거쳐 도가(道家)의 수련으로 이어지는 전통무예의 길을 오랫동안 걸어왔다. 몸을 단련하는 일은 곧 정신을 세우는 일이었고, 자세를 바로잡는 일은 동시에 내면의 축을 고르는 수행이었다. 무예가 그에게 가르쳐준 것은 외향적인 힘이 아니라 고요와 집중, 그리고 오랜 인내의 기술이었다.

 그러나 열일곱 살의 어느 날, 그 고요함이 단 한 번의 소리에 의해 완전히 허물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반복되는 수련이 이어지던 어느날, 어디선가 흘러들어온 대금 한 자락이었다. 

'무예의 몸으로 쌓아온 절제와 집중의 세계가 설명조차 되지 않는 어떤 진동 앞에서 순식간에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라고 선생은 회고한다. 대금 소리가 가슴에 박혔다. 무예로 다져진 몸이 소리 앞에서 무방비로 열리는, 그 낯설고 당혹스러운 감동. 그것이 음악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젖힌 첫 번째 충격이었다.

 대금(大笒)은 단순한 악기가 아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신라 신문왕 때의 이야기를 전한다. 동해 바다 위에 홀연히 나타난 대나무 섬, 그 대나무를 베어 피리를 만들었더니 적병이 물러나고 병이 낫고 가뭄에 비가 내리며 풍랑이 잠잠해졌다 하여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이름 붙였다는 것이다. 온갖 파란을 잠재우는 피리. 그 이름 속에 우리 민족이 대금이라는 악기에 얼마나 큰 염원과 경외를 담았는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대금은 그렇게 신라 이래 천 수백 년을 우리 곁에 있어왔다. 궁중의 제례악에서 선비의 풍류방까지, 무악(巫樂)의 신명에서 산조(散調)의 깊은 한까지, 그 긴 대롱 하나가 이 땅의 숨결을 고스란히 담아왔다. 가로로 쥐고 부는 횡적(橫笛)의 형태로, 대금은 우리 전통 관악기 중 가장 깊고 넓은 음역을 품으며 국악의 정수(精髓)로 자리해왔다. 열일곱 살 소년의 가슴을 단번에 사로잡은 것은 그러므로 단순한 악기 소리가 아니라, 천 수백 년의 시간이 그 대롱 안에 켜켜이 쌓여 만들어낸 어떤 깊이였을 것이다.

 마음을 정하고 악기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으려 했으나, 처음부터 대금을 잡을 수는 없었다. 대금을 하겠다 나서는 그에게 주변에서 쏟아진 것은 핀잔과 나무람이었다. '단소도 못하는 놈이 대금을 한다'는 말이 당시의 분위기를 요약한다. 수적(竪笛), 즉 세워서 부는 악기의 세계에는 퉁소와 퉁애를 비롯한 여러 갈래가 있었고, 그중에서도 단소는 대금으로 가는 길목에 놓인 악기로 여겨졌다. 그렇게 단소부터 시작하게 된 첫 1년이 예상치 못하게 그의 음악적 뿌리가 되었다. 대금의 멋과 호방함에 이끌리면서도, 단소가 품고 있는 고결하고 내밀한 소리의 결에 마음이 더 깊이 머물게 된 것이다.

 대금의 매력에 빠진 이후 희귀 음반을 구해 듣기 시작했다. 빅터 유성기 음반 시대로 대변되는 1920년대와 1930년대, 그리고 1960년대의 녹음된 소리들을 찾아 들으며 시간이 지워놓은 소리의 층위를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작업을 거듭했다. 그 과정에서 향제풍류의 대가이자, 단소산조를 창시한 추산 전용선 선생을 만나게 되었다. '범접할 수 없는 경지의 사람'이라는 표현이 단순한 경외가 아니었음은, 그 이후 이어진 수십 년의 음악 여정이 증명한다. 전추산 단소산조를 연구하는 것도 단순히 가락을 연구하는 일이 아니라 음악을 대하는 태도 전체를 다시 쓰는 과정이었고 그 수련 속에서 선생은 하나의 중심을 잡아갔다. 가락이 많고 화려한 음악보다 깊이가 있는 음악, 기교보다 농도(濃度), 넓이보다 밀도. 그것이 이후 그의 음악 철학이 되었고, 장구 복원이라는 평생의 과업을 이끌어가는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

※ 동해안 별신굿 장구, 김동경 선생 작(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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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1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 프로필이미지
    admin2026-05-22 14:50:42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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