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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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시대까지는 외과 의사와 이발사의 경계가 불분명했다. 중세 유럽의 사람들은 치통으로 이를 뽑아야할 때 이발소나 대장간으로 갔다. 이는 그곳에는 칼을 잘 다루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종기의 고름을 뺄 때, 신체를 수술해야 할 때에도 이발소를 찾았다. 과거의 이발소는 단순히 머리손질만 하는 곳이 아니라, 면도기술을 필수적으로 가진 이발사가 있었다. 칼을 능숙하게 다루는 직업이다 보니 이들은 외과의사를 겸했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의 길드 안에 속해 있으면서 사혈이나 관장 등 당시 유행했던 치료를 해왔다. 당시에도 외과의사뿐만 아니라 내과의사가 있었지만, 이들은 정식 대학교육을 받은 고위급 집안 자식들이었다.

16세기 독일의 외과의사가 환자의 다리를 수술(또는 처치)하는 모습을 묘사한 채색 목판화, 출처 : Hans Holbein
내과의사들은 치료법과 약의 효능을 위주로 공부하였고, 손에 피를 묻혀야 하는 외과의사는 사회적으로 천대받았다고 한다.결국 이런 천대에 불만이 쌓여가며 외과의사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높이려고 노력을 하였다. 그러던 것이 18세기부터 유럽 전역의 외과 의사들은 하류계층이던 이발사들과 차별점을 두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하였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영국에서는 1745년에 이발 의사들의 길드들이 분리되어 나갔다. 그렇다면 이발의사 길드의 상징물이었던 적색과 흰색 줄무늬의 막대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사실 이것은 이발의사들이 환자의 피를 뽑는 동안 피를 모아두는 놋쇠 양동이 위에 걸어둔 피투성이의 헝겊을 뜻하는 것이었다. 즉, 이발소의 삼색등은 이발사와 외과의사의 역사에 연결된 유산으로 동맥, 정맥, 붕대를 상징하는 것이다.
당시에는 마치 우리가 아스피린을 복용하는 것처럼 사혈과 관장이 유행하였는데, 그것은 외과 의사들과 마찬가지로 이발의사들도 처방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이발사들과 차별점을 두고자 한 외과 의사들에 의해 길드가 분리되면서 이들의 역할이 구분되어지기 시작했다. 샤를 파나티의 <기상천회했던 일상생활의 기원> 이라는 책에서 '외과의사와 이발의사들이 분리되었을 때, 그 막대기는 이발의사들의 차지가 되었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가 이발소 앞에서 보는 삼색등의 의미는 바로 이러한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표현한 이유는 급한 응급환자가 발생하였을 때 응급시(이발소)의 위치가 눈에 잘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세가지 색의 간판을 걸었다고 한다. 현재와 같은 원통형의 삼색등이 만들어진 것은 1540년 파리의 이발사 겸 외과의사였던 메야나킬이라는 사람이 처음 고안해낸 것이라고 한다.
수혈은 인체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던 과거의 치료법 가운데 가장 안타까운 결과를 낳은 경우다. ABO식, RH식 혈액형의 발견이 있기 전까지 수혈은 목숨을 건 치료법이었다. 17세기 한 판화를 보면 환자의 팔에 관이 꽂혀 있고, 그 관은 개와도 이어져 있다. 인간과 동물 간에 수혈됐다는 뜻이다. 건강한 혈액을 이용해 늙거나 병든 사람에게 생기를 부여한다는 인식만 있던 시절, 양, 개, 오리, 송아지의 피를 환자에게 수혈했고, 일부 성공 사례를 제외하고는 환자 대부분이 사망했다. 인간의 몸에 다른 혈액형의 피가 들어오면 피가 응고돼 급성 신부전과 심장 이상의 합병증을 일으키고 환자는 죽는다. 동물 피는 사람 피와 질적으로 다르고, 인간 사이에서도 수혈자와 공혈자의 혈액형이 다르면 항원-항체 반응이 생긴다는 건 상식처럼 알려졌지만, 당시에는 이런 사실을 몰라 희생을 치러야 했다. 불과 15, 16세기만 해도 유럽에 외과학이라는 분야가 없었다는 것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고대'중세 시대에는 이발사가 외과의사 역할을 함께 했다.
그래서인지 수술을 해야 하는 외과의사의 역할은 천한 일로 치부됐고, 이발과 외과적 수술이 이발소에서 벌어지는 등 위생 관념이 없었다. 이발사'외과의사 조합이 분리되어 외과의사들이 독립적인 지위를 얻은 건 1745년이었다. 내과학 그늘에 가려졌던 탓에 소독과 수술법의 발달도 늦어졌다. 19세기만 해도 수술방은 개방돼 있었고, 자유 견학이 가능했다. 마취는 물론 수술 기구 소독도 없어 감염 예방 조치도 없었다. 수술 후 감염으로 죽은 환자가 부지기수였다. 위생 관념이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뤄진 무모한 수술이었지만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외과 수술의 수준은 점차 높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