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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시대와 철학의 쓸모> 서평
  • 타라고
  • 등록 2026-04-10 11:56:52
오래전 하이데거가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책을 쓰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년에 태어나서 활동하다가 모년에 죽었다"라고 간단히 적은 적이 있었다. 철학자에게는 철학만 중요할 뿐 굳이 행적과 생사에 관한 이야기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이다. 그런 점에서 필자도 이기상 선생을 개인적으로 안 지는 오래되었지만 사적인 이야기들은 생략하고 책에 관해서만 이야기하겠다.



필자가 이 책을 선생으로부터 받은 지는 거진 2주 가까이 되었지만, 새로 벌린 사업이 정신없이 바빠서 읽지를 못했다. 보통은 늦어도 며칠 안으로 읽고 가벼운 느낌이나 본격적인 리뷰를 쓰곤 했다. 그러다가 오늘 시간이 나서 빠르게 통독을 했다. 384 쪽이나 되는 책을 하루 만에 다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이 책이 전문 학자들을 위한 연구서가 아닌 데다가 가독성이 뛰어난 이유도 있다. 이 책은 가뜩이나 '인문학의 위기' 같은 입에 발린 소리가 난무하는데 인공지능(AI)까지 등장하면 철학 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라는 불안에 대해, 평소 대중을 상대로 쉬운 철학 이야기도 많이 하는 선생이 답한 것으로 보였다. 선생은 단도직입적으로 '인공지능의 시대와 철학의 쓸모'라는 제목으로 이 책의 문제의식을 표현했다. 하지만 이 책을 들추어 보면서 드는 생각은 전체 9장으로 이루어진 제목 가운데 관련된 장은 1장에 국한되어 있다. 이 책에 대해 큰 기대를 건 독자들 중에는 시쳇말로 '낚였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제목이 갖는 문제의식과 책 전체를 채운 내용들 간에 간극이 컸던 이유는 아마도 편집자의 권유가 컸을 것이라는 짐작을 해볼 수도 있다. 워낙 책이 안 팔리는 세상이라 AI 시대에 어울리는 강렬한 제목을 붙이고 첫 장에 그와 관련된 내용을 담으면 독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현재의 출판계의 사정을 감안한다면 이해못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1장의 내용도 독자들의 기대와는 거리가 있다. 사실 선생은 '나가는 말'에서도 적었듯, '기계치'에 가깝기 때문에 급속한 IT 산업 발전의 총아라 할 수 있는 AI의 등장을 평가하기에는 역부족일 수도 있다. 선생이 생각하는 AI 문제는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면 하나의 '존재사건'이어서, 존재론적 접근이 요구되고, 때문에 서양적 존재론과 동양적 존재론의 차이를 고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이데거를 오랫동안 연구하고 글이나 책을 많이 쓴 선생은 특히 하이데거의 관점에서, '사물'이나 '사물하다' 등의 측면에서 AI 문제를 생각한 것 같다. 이 문제는 뒤에 가서 본격적으로 언급하겠지만, 사실 독자들의 기대와는 편차가 클 수밖에 없다. 만약 AI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철학자라면 절대 이렇게 쓰지 않았을 것이다. 먼저 AI의 등장과 빠른 성장, AI의 구조와 학습방법, 이를테면 10년 전 알파고(Alphago)가 이세돌 기사를 이겼을 때 떠들썩 했던 딥 러닝(Deep Learning)이나 강화학습(Reinforcement Learning)부터 거슬러 갔을 것이다. 그 이후 일취월장한 AI가 스스로 판단해가면서 학습하는 자기주도 학습 (Self-Supervised Learning)이나 단순 텍스트를 넘어 이미지, 소리, 영상 등 다양한 형태의 정보(Modality) 등도 배경적 지식으로 언급을 할 것이다. 그 다음에 이런 AI 들이 인간 사유의 종말이나 철학의 위기를 가중할 수 있는지에 관한 우려를 보다 실감나게 씼어 주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철학의 차원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보다 구체적으로 20세기의 하이데거 존재론의 '사물론' 속에서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를 다루는 것이 일반적으로 추측해볼 수 있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대중서에서 그만한 배려가 없다고 하면 많은 독자들은 '역시 철학은 너무 어려워!' 하면서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 수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필자 역시 '낚였다!'는 한 마디로 대신하면서 넘어가고자 한다.



9장이나 되는 이 책의 많은 제목들을 일일이 다 따라가면서 언급하기는 힘들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 2장부터 9장까지의 내용은 크게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특히 중요해지고 있는 '문화', '문화인', '문화 콘텐츠' 등의 개념을 핵심적으로 다루고 있다. 다음으로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에서, 특히 '현존재 분석'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일상과 실존'의 문재, '세계', 예술', 종교에 관한 내용들이 등장한다. 선생은 일찍부터 현대 세계에서 '문화가 차지하는 비중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하기도 했다. 문화를 다룬 내용은 7장 예술철학-사물, 인간, 자연의 어울림에서 좀 더 심도 있게 논의된다. 여기서 김아타의 '사물과의 대화'를 하이데거의 '사물하다', '세계하다'와 마주 세우기도 한다. 사실 서양철학의 추상적 이론을 가지고 한국의 예술가들이나 그 작품들을 분석한 것은 대단히 의미가 있다고 본다. 선생은 8장 한국인과 예술철학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이제석, 강익중, 이태석, 오세영 등의 예술가들을 생생하게 다루고 있다. 이렇게 다른 전통과 다른 실천 등을 마주 세우는 것이야말로 현대 문화에서 가장 요구되는 '소통'과 학문들 간의 '융합' 등에 참으로 필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두 부분에 대한 선생의 오랜 관심과 연구가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한국의 독자들이 특히 관심을 갖는 부분은 아마도 6장 21세기 철학의 디딤돌-들뢰즈와 하이데거라는 부분일지 모른다. 철학에 관심 있는 자들이라면 그런 반응이 훨씬 자유롭다. 잘 알다시피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이라는 획기적인 저서를 통해 20 세기 과학의 시대에 존재 물음을 근본적으로 다시 제기했다. 그의 <기초존재론>은 20세기 독일 철학을 주도하고, 그 이후 프랑스에서 등장한 푸코, 라캉, 데리다, 들뢰즈, 레비나스 등 기라성 같은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철학자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자장(磁場)은 21세기 들어와서도 여전하다. 선생은 자타가 공인하듯 하이데거에 관한 최고의 권위자라 할 수 있다. 하이데거의 주저인 『존재와 시간』을 2번씩이나 번역했고, 그 밖에 핵심 연구서들을 여러 권 번역도 했고, 선생 자신이 직접 쓴 글이나 연구서 들도 적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선생이 20세기 말 가장 많이 읽히는 들뢰즈를 하이데거와 관련지은 해설은 관심을 가장 많이 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설명이나 해석은 오직 선생만이 할 수 있다.



이 부분을 설명하는 방식은 들뢰즈가 『천 개의 고원(plateau)』에서 제시한 들뢰즈 특유의 철학이나 용어, 그리고 독특한 사용법 등을 설명하고, 그것이 어떻게 하이데거 철학과 연관되는지를 해석하는 형태로 진행된다. 예를 들어 들뢰즈는 그 이전의 다른 철학자들과 달리 존재하는 모든 것을 ‘기계’로 보고, 그와 관련해 ‘추상 기계’, ‘기계적 배치’, ‘전쟁 기계’ 등을 말한다. 그에게는 국가장치도 기계이고, 감옥이나 병원, 학교도 다 기계이다. 이질적인 것들이 모여서 어떤 특정의 기능을 하니까 기계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 이전의 다른 철학자들은 유기체나 기타 다른 이름으로 불러 왔었다. 이 기계들은 서로 연결 접속된 상태로 관계를 맺는다. 이런 상호 관계에서 ‘감응’이나 ‘이모션’(imotion)의 개념이 나온다. 이런 기계를 선생은 하이데거의 ‘도구’와 연관 짓는다. 하이데거는 일찍이 “하나의 도구란 없다"라는 유명한 말을 한 바 있다. 하이데거는 다양한 연관 속의 존재자 혹은 사물을 ‘도구’로 만난다고 했다. 여기서 사용자와 전체적으로 연관되는 '손안에 있음('Zuhandenheit)이나 전통 인식론에서 대상화된 객체라는 의미에 '눈앞에 있음'(Vorhandenheit) 같은 개념들이 등장한다. 선생에 따르면, 이러한 하이데거의 도구를 들뢰즈/가타리는 ‘기계’로 대체했던 것이다. 이런 예들은 이 책에서 부지기수로 다루어지고 있다. ‘배치’의 개념은 하이데거에서는 도구 연관과 도구의 자리에 해당한다. 하이데거는 특히 인간 ‘현존재’를 ‘세계 안에 있음’이라는 말로 특징짓는다. 모든 존재자들은 인간과의 도구 연관 속에서 인간의 의미 부여에 따라 인간의 세계가 된다. 세계는 단순히 자연이나 우주와는 다르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의미 부여하고, 삶의 터전으로 만든 것이다. 그것을 들뢰즈/가타리는 ‘영토화’라 부르고, 이와 관련해 '탈영토화', '탈주', '다양체' 등의 사유를 발전시켰다. 들뢰즈/가타리는 이렇게 하이데거에 빚지고 있는바가 적지 않은데, 선생은 그것들을 비교 연구의 차원에서 잘 밝히고 있다. 지금까지 많은 철학자들은 이런 유산을 간과한 상태에서 들뢰즈만을 이해하느라 애를 많이 먹었다.



필자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특히 인상적인 느낌을 받았다. 사실 들뢰즈의 ‘생성 존재론’은 새로 만든 개념들이나 의미들이 다소 이질적이기 때문에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지만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라는 <전도서> 기자의 말처럼, 들뢰즈의 철학도 아무런 유산이나 배경 없이 등장한 것이 아니다. 들뢰즈가 하이데거가 그랬던 것처럼 다른 어떤 철학자들 보다 그 이전의 철학자들을 많이 연구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마찬가지로 그 전 시대의 철학과 맺고 있는 연관이나 발생 기원 등을 이해하면 다소 난해한 그의 철학의 내용도 훨씬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의미도 잘 받아 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들뢰즈와 하이데거를 다룬 6장이 특히 그렇다. 하지만 이 부분을 읽으면서 필자가 느낀 한 가지 아쉬운 점도 있다. 이 부분은 20세기의 사유의 거장인 '하이데거'와 '들뢰즈', 그리고 21세기 이 땅에서 사유하는 한국의 철학자 '이기상'이 만나는 곳이다. 그렇다면 단순한 소개와 설명 이상으로 21세기 한국의 철학자의 입장이 좀 더 분명하게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이러한 설명에 철학 고유의 ‘비판’(critic)이 가해졌더라면 이 책의 의미가 읽는 이들에게 보다 강하게 각인되지 않았을까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선생은 지난 수 십 년 동안 지나치게 서구 편향적인 한국의 철학 풍토와 관련해 비판을 많이 했었고, 또 우리 철학의 정립을 위해 노력도 많이 기울여 왔다. 이런 선생의 경력이 바로 3명의 사상가들이 만나는 과정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지 못했다는 것이 필자가 보기에 아쉬운 점이다. 대중서의 한계가 아닐까라는 말로 넘어갈 수만은 없을 것이다.



이기상 선생의 『인공지능 시대와 철학의 쓸모』(옥당, 2026)는 오래간만에 좋은 철학서를 읽었다는 뿌듯한 느낌을 준다. 철학서도 이렇게 쉬운 말로 쓰고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런 글쓰기 방식과 문제의식을 앞으로 많은 후학들이 벤치마킹해야 할 것이다. 보다 많은 이들의 읽기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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