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울란바토르에 있을 때 현지의 한국인들에게서 여러 차례 듣고 내가 직접 확인한 이야기가 있었다. 일본과 한국의 몽골 접근 방식이 현저히 차이가 있다고 한다. 일본은 오래전부터 치밀하고 체계적인 연구에 바탕해서 은 몽골에 접근하는 반면, 한국은 수많은 교회들에서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즉흥적이고 일시적인 선물 공세를 통해 접근한다는 것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몽골을 방문했을 때 체결한 수많은 MOU는 그저 전시용이었을 뿐이었다. 일본의 체계적인 접근은 반드시 그 흔적이 남는 데 비해, 한국의 즉흥적인 접근은 그런 것이 없어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된다. 선물 공세가 자주 이루어지다 보니 몽골인들은 한국인들을 볼 때마다 손을 내밀면서도 빈손으로 오면 오히려 화를 낸다고 한다. 실제로 몽골인들은 일본에 대해서는 크게 감사해 하지만, 일본 보다 훨씬 많이 퍼준 한국인들에 대해서는 거의 고마워하지 않는다. 이런 일이 몽골에서만 일어날까?
한국학자들의 행태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 심원 김형효 선생의 <한국사상산고>(1976)를 읽다 보니 이런 내용이 나온다. 정확히 50년 전에 김형효 선생이 지금 들어도 전혀 새롭지 않은 내용을 가지고 고민을 했던 흔적이다.
"우리의 철학이 서양철학의 해석에 그쳤던 것이 아닌가? 우리의 철학이 동양 사상의 훈고적 풀이에만 그친 것이 아닌가? 또는 우리의 철학적 논문이 자료적 각주의 다과(多寡)에 의하여 평가되었던 것이 아닌가? 만약에 서양철학의 기초적 해설만을 능사로 우리의 철학이 여겨왔다면, 그것은 서양철학의 아류 신세를 면하지 못하리라. 서양철학이 변하면 나의 생각도 따라서 변하여 자기신원의 (정체성) 확보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또 동양 전통사의 개념적 뜻풀이가 우리의 철학이었다면, 그런 철학은 이 시대의 자연사회, 인간의 문제의식과 대응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철학 논문이 각주의 양을 자랑삼아 내보이는 정도에 머문다면, 그것은 공부하는 과정의 습작일 뿐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 없게 되리라. 더구나 그런 발상이 더 위험하게 여겨짐은 논문이 각주 붙이기로 평가됨으로써 한 편의 논문이 지녀야 할 창조적 상상력이 시들어 버리고 만다는 데 있다."
이것은 내가 '에세이철학' 이야기를 하면서 주장한 내용과 거의 다르지 않다. 나는 수입 철학에 매달리는 서양 철학계를 향해 '오퍼상'이라 했고, 2,000년도 훨씬 전인 공맹과 노장의 해석을 반복하는 동양 철학계를 향해 '고물상'이라고 비판했다. 이말은 내가 새롭게 만든 것이 아니라 동서양 철학계에 떠돌고 있는 이야기를 반복한 것이다. '에세이철학'을 이야기할 때 나는 각주와 레퍼런스 없이 글을 쓰자는 주장도 폈다. 이런 나의 일련의 말들을 이미 50년 전에 김형효 선생이 했던 것이다. 지금 심원 선생의 말을 다시 들어도 전혀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의 철학계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단 말인가? 한 마디로 지난 수십 년 동안 실존주의와 프라그마티즘, 독일관념론 마르크스주의, 하이데거와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철학들이 이 땅의 철학자들의 머리를 사로잡았어도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수많은 이 땅의 철학자들이 도대체 무엇이었단 말인가?
사실 그 사이에도 틈만 나면 여러 철학자들이 비슷한 주장들을 해왔다. 30년 전에는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이기상 선생을 중심으로 '우리말 철학' 운동도 있었다. 같은 파주에 사는 동양철학자, 고대의 이승환 교수는 내 말을 듣자마자 자기도 오래전부터 그런 주장을 폈다고 했다. 나중에 내가 그분의 논문들을 검색해 보았더니 정말 그랬다. 이승환 교수는 쉬운 우리 말을 통해 동양철학이나 한국 철학 관련 글도 쓰고 책도 여러 권 썼다. 왜 이렇게 적지 않은 철학자들이 비슷한 문제의식을 갖고 주장도 했는데 수십 년이 지났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앞서 한국의 대 몽골 접근과 마찬가지로 그냥 두더지 제 굴 파듯 각자도생을 했을 뿐 서로 간에 체계적으로 연결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현상은 한국인들의 오랜 습성과도 연결되어 있는지 모른다. 일본의 철학자 오구라 기조가 지적했던 것처럼, 한국의 철학자들은 새롭게 뒤집기(개변주의)를 반복할 뿐 체계적인 축적이 없다. 그러니까 늘 새롭게 같은 삽질을 반복했다는 말이 정확한 것이다. 한국의 철학자들은 기존의 사상이나 체계의 변화에 관심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대장이 되어야 하는 데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협력이고 나발이고 그런 것들은 대부분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전시용이자 명분일 뿐인지 모른다. 그러니 후학들이 같은 운동을 해도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다. 여기서 무슨 축적과 발전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한 마디로 '무한 삽질'을 반복할 뿐이다.
인문학자들과 철학자들이 놀 수 있는 플랫폼인 <에세이철학회>를 개설한 것은 이런 일을 좀 더 체계적으로 하고자 하려는 뜻도 있다. 후대의 다른 철학자들이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래야 쓸데없이 같은 수고를 되풀이 하지 않고, 축적도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앞서 활동한 이들이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는데 있다. 도대체 왜 그런지 알 수가 없다. 우리 자신의 흥보가 없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그런 선배들을 우리가 제대로 대접을 하지 못해서 그런가? 이도 저도 아니면 그분들이 여기서 대장 노릇을 하지 못해서 그런가? 혹은 그분들이 해온 우리 철학이나 학계 비판은 그저 명분에 그칠 뿐 오직 자기 이름만을 내는 것에 더 관심이 있는 것일까? 도대체 세계 10위 안에 드는 국가에서 철학을 하면서도 제나라 말로 된 <철학대사전> 하나 없다는 것은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일들은 철학 분야에 한정되지 않는다. 한국인들에 특유한 유전자적 각인이 이루어져 있는 지도 모르겠다. 참으로 알고 싶다. 도대체 왜 그럴까, 이유가 무엇일까? 한국 철학계의 생태계가 무너져 내려가는 것도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