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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운남성 대리국의 역사와 대리국을 구성하는 민족들 : 운남성에 현재까지 남아있는 소수민족
  • 알렉세이정
  • 등록 2026-04-12 13:12:43

대리국은 현재의 중국 운남성 지방에서 937년에 건국되어 약 300여 년간 지속된 왕국으로 남조(南詔)의 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운남성 일대의 왕조로 알려져 있다. 중국어로는 다리(大理)라고도 불리며 동쪽으로는 송나라, 북쪽으로는 토번, 티베트와 인접하고 있었다. 남쪽으로는 대월(大越)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국가와 인접한 내륙국으로 종교는 불교의 일파인 아리(Ari) 불교를 믿고 있다. 그리고 라마불교와 마찬가지로 국왕이 왕위를 물려주고 승려로 출가하는 전통이 존재하고 있었다. 대리국의 멸망 이후 태국, 라오스, 인도의 아삼 지역으로 대량의 이주민이 발생했으며 이들은 라오스, 태국, 미얀마의 직접적인 조상이 된다. 대리국(大理國, 937~1253)은 937년에 현재의 중국 운남 지방을 주된 영역으로서 통치했으며 한 때는 귀주 지역과 사천 지역 일부까지 장악했던 국가였다. 이러한 대리국은 상술한 내용을 재 언급하자면 남조(南詔)의 후신으로, 단사평(段思平)이라는 인물이 937년에 대의녕(大義寧)을 멸망시키고 건국했다. 왕족인 단(段)씨는 대리 지방의 백만계(白蠻係)의 부장이며, 남조 역대로 중신을 지내온 가문이었다. 대리국은 이러한 남조 문화를 계승하였고, 불교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백만 문화를 개화시켰다. 

중국 운남성 대리고성, 출처 : 大理州文化和旅游局供圖


송나라와는 거의 교섭이 없었으며, 국내는 외침이 없어 평화로운 시대가 계속된다. 점차 권신 고승태(高昇泰)가 외척 권력의 1인자로 나타나 일시에 왕위를 찬탈해 나라의 역사가 잠시 중단되었으나, 얼마 후 부흥되어 후 대리국(後大理國)이라 부르고, 송나라 시대의 약 3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대리국의 시조인 단사평(段思平, 893~944, 재위 : 937~944)은 백족(白族) 계열로, 그의 가문 사람들은 대대로 남조의 무장을 했다. 그는 장수 단보륭(段保隆)의 아들로 딘보륭은 5대 10국의 중원 혼란기 당시 전촉(前蜀)이 침공하자 이를 격퇴했던 인물이다. 단보륭이 사망한 후, 단사평이 출사하여 여러 차례 전촉과 초(楚)나라의 침공을 막아내는 군공을 세웠고 이어 대의녕(大義寧)의 통해절도사(通海節度使)로 승진했다. 당시 대의녕(大義寧)은 양간정(楊干貞)이 대천흥(大天興)을 멸망시키고 세워진 국가였는데, 양간정의 동생 양조(楊詔)가 단사평이 제왕의 상이 있다며 참소하자 양간정은 단사평을 죽이려고 하였다. 마침 대천흥의 황제였던 조선정(趙善政)의 신하 수고방(守高方)은 단사평과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을 보내 단사평에게 이를 알렸고, 단사평의 동생 단사량(段思梁)은 군사(軍師) 동가라(董迦羅)와 함께 단사평을 보호하였다. 


이후 단사평은 동쪽 흑찬(黑爨)의 37만부(蠻部)에게서 병사를 빌려 양간정을 공격하였으며 937년, 단사평은 대의녕을 멸망시켰고, 대리국을 세웠다. 연호를 문덕(文德)으로 개원하고 수도를 대리(大理)에 두었다. 938년 동가라를 상국으로 임명하였고, 수고방(守高方)을 악후(岳侯)에 봉했다. 재위기간 동안 봉건제를 실행하였고, 8부(府)와 4군(郡), 33부(部)를 설립하였으며, 사회 생산력 또한 발전하였다. 944년 단사평이 사망하자 시호를 성신문무황제(聖神文武皇帝), 줄여서 신황제(神皇帝), 묘호를 태조(太祖)로 하였다. 대리국은 평화롭게 이어오다가 1094년 보정제(保定帝) 단정명(段正明)이 양의정(楊義貞)에게 살해당하는 쿠데타가 발생한다. 그 양의정(楊義貞)을 토벌한 권신 고승태(高昇泰)가 대리국을 대중국(大中國)으로 개칭하여 스스로 제위에 오르는 사건이 벌어졌다. 고승태는 1년 만인 1095년 병으로 눕게 되자 단정순(段正淳)에게 왕위를 반환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하게 된다. 대중국은 이와 같이 1년 만에 단명하고 1096년 후일 문안제(文安帝) 단정순(段正淳)이 제위에 올라 단씨의 대리국은 지속되었지만 고씨(高氏) 가문이 재상 자리를 지내며 왕권은 위축되었다. 이 시기를 기준으로 전한, 후한과 같이 이전의 대리국을 전(前) 대리국, 이후의 대리국을 후(後) 대리국으로 지칭되고 있다. 


그러다가 1253년 몽골 제국에게 다른 나라들과 연합하여 멸망당하게 되고 중국 권역에 통합되었다. 강력한 몽골 제국만 없었더라면 대리국은 더 오래 생존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운남 지역은 중국과는 전혀 별개의 지역으로 남아있을 가능성이 있다. 대리국의 주류 종족인 백족(白族)은 원나라의 통치를 받았음에도 민족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원나라가 멸망한 후 운남에 고립되어 있던 몽골 대립 정권인 양왕(梁王)의 정권을 명나라 주원장 홍무제가 멸망시켰을 때, 이 지역에서 몽골 황족들을 도우면서 정권을 잡고 있던 대리국의 단씨는 양(梁) 왕국을 배신하고 명나라와 동맹을 맺고 그러한 공로로 인해 몽골로부터 재 독립을 염원했다. 하지만 대리국의 은 광산을 차지하기 위해 주원장은 대리국을 속이고 군대를 이끌고 다리에 진격해 정복하고 직할령으로 만들어버렸다. 명나라는 백족을 귀속시킨 이후로도 대리국의 왕족들에게 계속하여 도독, 제독, 진무와 같은 관직을 주면서 현지의 토사(土司)로 삼았다고 한다. 현대에 백족은 중국의 소수민족 중 하나로써 다리 바이족 자치주를 유지하며 명맥을 잇고 있지만, 다른 소수민족 자치주나 자치구와 사정이 비슷하여 대리국의 후예들인 백족의 숫자는 자치주 내에서 1/3에 불과하고 한족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대리국은 남조와 구별하여 서술하는 경우가 많지만, 서로 간의 민족 구성이나 문화, 언어, 영토 등 많은 면에서 일치하는 부분이 많아 같은 국가로 포함해서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대리국과 남조를 합치면 무려 515년을 존속했고 이는 류큐의 450년보다 더 길며 한국 조선 왕조의 519년보다 더 길다. 한국어에서 나타나는 대리석이라는 돌 또한 이 대리국에서 왔을 정도로 자원과 식생이 풍부할 뿐 아니라 8세기 당나라의 침공과 더불어 남조가 멸망할 때 몽골의 침공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외세의 침략 없이 평화를 누리기도 했다. 내륙 국가로써 전쟁에 강한 국가이자 민족이었기 때문에 송나라가 침략을 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대리국의 위치는 송나라의 입장에서 볼 때 훌륭한 완충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장점으로 인해 송나라는 사천성까지 몽골에게 점령당하면서도 대리국을 장기적으로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봤다. 그리고 몽골은 남송을 공격하다가 남송 공략의 배후를 제거하기 위해 남하하여 대리국을 공격해 멸망시켰다. 또한 동남아시아의 역사에 미친 영향력은 엄청난 국가지만 남조 시절부터 운남성 일대의 여러 남방 계열 민족들이 남조의 원정이나 교역을 통해 동남아시아로 꾸준히 유입되었다. 


이로 인해 유입된 민족들 중에 버마족, 타이족과 라오족은 각각 미얀마와 태국과 라오스의 기원이 되었으며 대리국의 존재는 동남아시아의 역사를 바꾼 셈이 되었다는 것에서 큰 의미가 있다. 대리국은 기본적으로 남조 시대부터 이어져오는 반(反) 당나라, 항당정책이 주요 국가의 기조를 이루었으나, 중국의 문화를 상당히 받아들인 편이었다. 문화적으로는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 문화권의 접경지로써 인접한 나라들에 문화적인 고리 역할을 했다. 특히 종교적인 부분에서 대리국의 불교의 경우 티베트의 색채가 나타났고 더불어 미얀마와 태국 등과도 매우 유사한 점이 많다. 역사적으로도 상호 교류가 존재했으며, 중국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힌두교의 가루다, 나가 같은 상징들도 종종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대리국을 구성하고 있는 민족들을 알아볼 필요가 있는데 이러한 민족들이 어떤 민족들이 있고 구성되고 있는지 대리국을 연구하면서 반드시 살펴봐야 할 중요점이라 생각된다. 첫 번째로 백족에 이어 납서족(納西族)이 존재하는데 이들은 중국어로 나시족이라 불리는 민족이다. 납서족은 고대 시대에 중국 서북 지역의 하황(河湟) 일대에 거주하였던 고대 강족(羌族)의 일파로서, 이족(伊族)과 함께 남하하여 운남성에 정착한 오만(烏蠻) 집단으로 알려진 종족들의 후예라고 하였다. 


진(秦)나라 한(漢)나라 시대에 납서족의 직계조상인 마사족(摩挲族)이 대도하(大渡河)에서 금사강(金沙江) 상류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통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나라 개원(開元) 연간(713~742)인 현종 시기에 금사강 이남의 납서족 선조들 일파는 오늘날 대리주(大理州) 빈천현(賓川縣)에 6개의 부족정권 가운데 하나인 월석조(越析詔), 혹은 마사조(摩些詔)를 건립하였는데 이후 남조국(南詔國)이 육조국(六詔國)을 병합하기 전까지 중요한 군사적인 세력을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나라 번작(樊綽)이 지은『만서(蠻書)』는 납서족 조상에 대하여 기술한 가장 최초의 기록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후 당(唐)나라, 토번(吐藩) 및 남조(南詔)의 3대 정치 군사 세력 간에 합종연횡을 하면서 분쟁이 지속되었다. 이후 송(宋)나라가 중원을 장악한 후 남조(南詔)는 대리(大理)의 단씨(段氏) 왕조로 대체되었고 더불어 티베트 지역의 토번 왕조가 완전히 붕괴된 상황에서 송나라도 서남부 지역에 대해 세력이 거의 미치지 못하자 납서족의 주요 세력들이 다시 남하하여 여강(麗江)을 기반으로 하게 되었다. 이후 여강 지역은 납서족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1253년 원나라의 쿠빌라이(忽必烈) 칸이 몽골군을 이끌고 대리국을 친히 정벌함에 따라 여강(麗江) 지역 납서족의 주요 분포 지역은 원나라의 지배 아래 목(木)을 성으로 하는 납서족 통치 집단이 이 지역에 출현하여 납서족의 문화와 경제 등을 재정비하게 된다. 


포랑족(布朗族)은 중국어로 부랑족으로 불리며 고대 운남성 영창(永昌) 지역의 복인(濮人)과 관련이 있다. 주(周)나라와 진(秦)나라 시기에 운남성 서남부 지역에 거주하였던 복인(濮人)은 대다수가 애뢰(哀牢) 지역에 거주하였던 이유로 하여 이들을 애뢰인(哀牢人)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당(唐)나라 시대에 포랑족은 고대 영창 지역의 복인(濮人)에게서 분화되었는데 이들을 박자만(朴子蠻)이라고 하였다. 당(唐)나라와 송(宋)나라 시기에 수렵과 채집 활동 또는 초기 농업 단계에 있던 박자만은 남조국(南詔國) 및 대리국(大理國)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았다. 당나라와 송나라 시대에 일부는 포만(蒲蠻)이라고 불렸다. 원(元)나라 시기부터 포랑족의 사회는 불균형적으로 발전하는 현상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순녕(順寧) 지역 등에 거주하던 포랑족은 한족(漢族)과 타이족(傣族) 등의 민족들과 교류를 하면서 농업 생산이 주 요소가 되는 경제 단계로 신속하게 발전한 반면, 운남성 서남부의 서쌍판납(西雙版納) 지역에 거주하던 포랑족은 사회가 발전하는 속도가 늦어 1950년대 초기까지 원시 사회 말기에서 계급 사회로 넘어가는 단계에 머물렀으며 또한 일부 씨족 공동체 사회의 잔재도 남아 있었다. 아창족(阿昌族)은 중국의 역사서에 아창(峨昌), 아창(莪昌), 아창(蛾昌) 및 아창(阿昌) 등 서로 비슷한 음으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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