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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의 시칠리아 & 시라쿠사 원정 실패는 아테네의 전성기를 종식시킨 전쟁 - 무능한 지도자와 지휘관이 나라를 망친 대표적인 사례
  • 알렉세이정
  • 등록 2026-04-12 13:13:50

이탈리아 남서부의 큰 섬 시칠리아는 초반에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제외되어 있었지만, 점차 전쟁과 관계가 깊어져 갔다. 시칠리아의 작은 도시들은 아테네와 같은 이오니아인들이 세웠지만, 가장 강력한 도시인 시라쿠사는 스파르타와 같은 도리아인이 세웠다. 시라쿠사에게 위협을 받던 작은 시칠리아 도시들은 강력한 아테네를 끌어들여 시라쿠사를 견제하고자 하였고, 아테네에게 있어서도 시라쿠사는 언제든지 스파르타와 연계될 수 있는 잠재적인 적국이었기 때문에, 아테네가 전쟁 중에 시라쿠사에 진출할 이유는 충분했던 셈이다. 그 뿐만 아니라 시칠리아의 자원은 아테네가 욕심낼 만한 것이었다. 제1차 시칠리아 원정(B.C 427~B.C 424) 때 아테네는 시칠리아로 배 20척을 보내 시라쿠사에 맞서 동맹국들을 지원하였으나, 아무런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B.C 425년 아테네는 증원군 40척을 보냈지만, 가던 길에 필로스에서 스파르타와 전투를 벌이느라 늦었고, 그 사이 시칠리아의 아테네 동맹국들은 시칠리아인을 위한 시칠리아를 천명하는 평화 협정을 맺게 된다. 이로 인해 아테네는 시칠리아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Map of the Peloponnesian War, 출처 : Wikipedia, Peloponnesian War


이후에도 아테네는 시칠리아를 점령할 요량으로 시라쿠사와 다른 도시 국가들 간의 분쟁이 생길 때마다 계속 참여했는데, 마침 B.C 416년 세게스타(Segesta)라는 작은 도시 국가가 아테네에 구원을 요청해 왔다. 세게스타는 이웃 도시 셀리누스(Selinus)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자 아테네를 끌어들일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자신들이 모든 전쟁 비용을 부담하겠다고 제안해 왔다. 실제로는 그만한 재력이 없었던 세게스타는 아테네를 속이기 위해 우선 60달란트(1,560kg)의 은화를 제공했고, 아테네의 사절이 왔을 때 그들이 가진 모든 금과 사치품들을 모두 모아 보여주면서도 보여주지 못한 재산이 더 많다고 과장했다. 당시 아테네는 페리클레스의 사망 이후, 멍청한 평화주의자인 니키아스의 주장으로 인해 B.C 421년 스파르타와 휴전을 맺었으나, 주전파의 젊은 지도자이자 유능한 지도자인 알키비아데스가 다시 주전론을 펼치고 있던 상황이었다. 아테네의 민회는 격론 끝에 전함 60척과 경보병만 파견했으며 알키비아데스, 니키아스, 라마코스(Ramacos)에게 지휘를 맡기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는 최악의 선택이었다. 사령관이 3명이나 선출된 것은 주전파의 지도자인 알키비아데스와 온건파의 지도자인 니키아스를 모두 포함시키고, 여기에 군 경험이 많은 노장 라마코스를 포함시켜 조화를 노리고자 한 것이지만 이는 최악의 선택을 불러왔다. 니키아스와 알키비아데스는 서로를 최대의 정적으로 여기고 있었고, 니키아스의 경우, 이후의 민회에서도 계속 알키비아데스를 비판하면서 원정을 반대해 왔었던 인물이다. 그러나 이미 원정으로 기울어진 민심으로 인해 시칠리아의 부와 국력을 일부러 과장하여 아테네 시민들에게 겁을 주게 만들어 이 원정을 취소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테네의 민회는 오히려 원정대의 규모를 2배로 늘려, 전함 134척에 중장 보병만 해도 5,000명 이상, 함대 운용 인력을 계산하면 20,000명 이상이라는 대규모 전력을 파견하기로 하였다. 여기에는 아테네 뿐만 아니라 아르고스 등 동맹국들의 병력도 상당수 존재했다. 문제는 아테네의 민회조차도 지혜로운 인물이 전무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출항하기 전날 밤, 누군가가 행운의 표시인 헤르마(Herma)라는 신상을 다수 파괴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기회를 이용해 니키아스를 비롯한 알키비아데스의 정적들은 가짜 증인을 내세워 알키비아데스가 파괴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유능한 지휘관으로써 아테네 군부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던 알키비아데스는 억울함을 호소하여 원정 이전에 재판을 열어줄 것을 요구했지만, 이 탄원은 기각되었고 우선 알키비아데스는 원정군과 함께 출항하게 됐는데 이는 니키아스의 계략이었다. 알키비아데스를 재판에 세우기 위해서는 민회 의원들을 대상으로 투표를 진행, 다수의 표를 얻어야 했는데 원정이 급하다며 알키비아데스의 군부대를 먼저 보내고, 군인들의 표를 없애 그를 불리하게 만든 것이다. 군인들의 표가 없어지자 기다렸던 알키비아데스의 정적들은 궐석 재판을 열고 신성 모독 혐의로 알키비아데스를 소환했다. 사태가 이렇게 돌아가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알키비아데스는 결국 적국인 스파르타로 망명했는데, 이후 몇 년 동안 그는 아테네의 모든 정보를 스파르타에게 넘겨주게 되면서 아테네는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아테네의 기둥이나 마찬가지였던 유능한 인물인 알키비아데스를 돌아서게 만든 것은 니키아스 같은 무능한 인물에게 선동을 당한 아테네의 시민들이었다. 


한편 시칠리아로 도착한 아테네 원정군은 사실 세게스타에 약속한 돈이 없이, 큰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와 같이 황당한 상황에서 원래 온건파였던 니키아스는 세게스타의 적국에게 무력 시위만 하고 돌아가자고 주장했지만, 결국 다른 사령관 2명의 의견을 따라 이렇게 된 이상 그냥 시라쿠사를 공격하기로 했다. 아테네 원정군은 첫 야전에서 시라쿠사의 1,200명 기병에게 기습을 당해 패배했지만, 얼마 후 총 600명 가량의 기병들이 수송되어왔고, 결국 시라쿠사를 포위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소극적이며 전쟁 경험도 없고, 무능한 니키아스는 애초에 그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원정에 때마침 병까지 앓았다. 설상가상으로 알키비아데스는 도주하고 라마코스는 포위망을 건설할 시기에 시라쿠사 군대에 역습을 받아 전사하였기 때문에 소극적이고 환자이며 전쟁 경험이 전무한, 매우 무능한 인물인 니키아스가 전권을 쥐고 지휘하는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다. 한편 아테네 군이 시라쿠사를 포위하는 담벽 건설을 시작하자 시라쿠사는 사방으로 원군을 구하러 다녔다. 


때마침 스파르타로 망명해 온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에게 시라쿠사까지 원군을 보내야 하는 이유를 역설하면서, 또한 아테네 근처의 데켈레아를 점령하고 요새화하도록 조언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스파르타는 명목상으로는 아테네와 휴전 중이었으나, 아테네의 시라쿠사 원정을 휴전 협정의 파기로 간주하였고 전쟁을 재개했다. 그러나 시라쿠사에 대한 스파르타의 초기 지원은 매우 작은 규모였는데, 스파르타와 코린트 각 2척으로 구성된 함대에 스파르타 시민 병사는 한 명도 없었고 지휘관 길립포스(Gilibpos)마저 완전한 스파르타 시민이 아닌 모타케스(Motaces, 열등자) 출신이었다. 그런데 이와 같이 별 볼 일 없는 병력이 봉쇄를 돌파하는데 성공했고, 이어 상륙에도 성공하면서 시칠리아 전역에서 지원병을 모았다. 그러면서 아테네 군의 포위 담벽 건설을 저지하기 시작했다. 결국 포위 담벽 건설은 실패로 돌아가고, 원래부터 전쟁에 열의가 없었던 니키아스는 아테네에 원정군이 위기에 봉착했다고 서신을 보내 철수 허가를 받고자 했다. 그러나 아테네의 민회 또한 무능한 것은 매한가지였고 그들의 답변은 니키아스가 기대하던 것과 정반대였다. 오히려 에우리메돈(Eurimedon)과 데모스테네스(Demostenes)의 지휘 하에 비슷한 규모의 2차 원정군을 파견한 것이다. 


도착한 데모스테네스는 니키아스의 지휘가 매우 무능하고 소극적이기 때문에 위기가 왔다고 판단하여 즉각 적극적인 공세를 가했다. 그러나 시라쿠사 성벽에 대한 야습 와중에 서로를 오인하고 전투를 벌여 실패하였고, 많은 아테네 군이 절벽이나 경사에서 떨어져 사망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아테네 군의 영채는 습지에 있었기 때문에 질병이 만연해 있었다. 이후에 왔던 에우리메돈과 데모스테네스는 이제 철수를 원했으나, 이제는 오히려 원래 반(反) 원정파였던 니키아스가 철수에 반대하고 나섰다. 원정 실패에 대한 책임 추궁이 두려웠던 것이다. 더불어 시라쿠사의 재정이 소진되면서 친(親) 아테네 세력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아테네 군이 시일을 지체하는 동안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지원군이 도착했고, 이제 아테네에게 철수 밖에 남은 대안이 없어졌다. 그런데 때마침 월식이 일어나면서, 이를 불운함의 징조로 받아들인 신관들이 9일씩 3차례를 기다릴 것을 조언했고, 니키아스는 이 예언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철수할 기회를 완전히 날려버렸다. 


그런데 니키아스는 시라쿠사 시를 둘러싸는 포위 담벽 건설에 실패했을 때 계획을 바꾸어 해상과 육지 공격이라는 작전을 펼치고자 했고, 이 때문에 증원군이 도착하기 얼마 전에 원래 안전한 후방에 있던 3단 노선을 시라쿠사 후방에 있는 시라쿠사 만의 안쪽으로 옮겨둔 상태였다. 그러다가 증원군과 함께 시도한 야습이 실패로 돌아가고 아테네 군이 본국으로 퇴각하려고 하려는데, 시라쿠사 해군이 펠로폰네소스에서 보내온 지원군과 함께 아테네 해군을 격파하고 만의 출구를 봉쇄했다. 절망적 상황에 몰린 아테네 함대가 또 다시 결사적으로 돌파를 시도했으나, 유리한 지형을 잘 활용한 시라쿠사 해군이 방어에 성공하면서 아테네 원정군은 시라쿠사에서 완전히 고립되었다. 아테네 원정군 약 40,000명은 이제 둘로 분할되어 육로를 통해 주변 동맹국으로 탈출하고자 했지만, 추격에 나선 시라쿠사 군이 퇴각하던 원정군을 차례로 공격을 감행했고, 아테네 원정군은 궤멸되었다. 스파르타의 장군 길립포스는 니키아스와 데모스테네스를 포로로 잡아가려고 했지만 시라쿠사군은 그들을 붙잡아 처형시켰고, 아테네인 포로 약 7,000명은 이후 대부분 노예가 되어 채석장에서 가혹한 강제 노동을 당하다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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