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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과 베트남 국토에 아직도 남아 있는 극심한 후유증
  • 알렉세이정
  • 등록 2026-04-12 13:19:11

1964년 8월 2일 통킹만 사건으로 시작된 11년 동안의 베트남 전쟁은 베트남 전 국토에 극심한 피해를 남겼다. 이와 같은 피해로 인해 베트남은 전쟁에서 승리했을지 몰라도 경제적으로 피폐해져 성장이 더디어 현재까지 영향이 있는 상황이다. 그나마 최근에는 많은 다국적 기업이 투자하고 있어 그나마 살림이 나아진 상태에 있다. 전쟁 당시 미군의 화력이 워낙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미국 정치인들은 별 무리없이 빠르게 전쟁이 승리로 종료되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베트남의 끈질긴 저항으로 인해 실제로는 미국 정치인들의 예상과는 반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미 국방부는 전차와 비행기로 밀어 붙이는 재래식 전쟁에 익숙했지만 베트남에서의 게릴라 전은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전투였다. 국력만으로 볼 때 북베트남보다 훨씬 우월했던 일본을 정글의 게릴라 전에서 격퇴했던 미군이었지만 베트남에서는 유독 고전했다. 이에 대해 미군이 고전하는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존재하는데, 이는 베트남 전쟁과 태평양전쟁이 치루어진 장소와 기후 조건만 비슷할 뿐 모든 상황이 달랐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UXO is still being discovered 50 years since US troops left Vietnam 출처 : Chris Humphrey / Al Jazeera


우선 일본군은 베트남군, 베트남 게릴라군과 같은 게릴라 전술을 사용하는 군대가 아니었으며 미국과 같은 정규전을 수행했던 군대였기 때문에 베트남 전쟁과는 그 흐름이 전혀 달랐다. 그리고 일본군은 멀리 떨어진 일본 열도에서 배로 보급을 실어날라야 했기 때문에 미군이 제해권과 제공권을 차지한 이후로는 보급을 하는게 거의 불가능해졌지만, 북베트남은 육로와 미리 파 놓은 땅굴글을 통해 중공으로부터 안정적으로 보급을 계속 받을 수 있었다. 전투가 정글에서 펼쳐졌기 때문에 전차 등 중장비는 제대로 활용할 방법이 없었고, 보병들이 홀로 정글 속에 들어가야 했다. 베트남 게릴라 군은 땅굴 등을 통해서 자신들이 싸우고 싶을 때 나타나고 불리할 때는 숨어버리는 새로운 형태의 적이었고 미군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 전략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 정글의 나뭇잎, 풀들을 모두 없애기 위해서 사용한 농약이 현재 사용이 금지된 그 유명한 고엽제다. 이와 같이 새로운 전장과 새로운 형태의 전투로 인해 미군 역시 새로운 모습으로 바꾸게 되었다. 방탄복을 입고 M16 소총을 든 미군이 UH-1 헬리콥터를 타고 정글로 들어가 잘 보이지 않는 적과 전투를 벌이는 전형적인 베트남 전쟁의 장면이 계속 펼쳐졌던 것이다.


베트남 전쟁에서 북베트남이 전쟁을 주도하긴 했지만 남파되거나 현지에서 충원된 베트남 게릴라 군에 의해 공세가 이루어진 경우도 많았다. 물론 북베트남에서 지원 병력이나 지도를 위해 간부를 내려보내기도 했으며 전투 물자를 계속 보내기도 했지만 자국 내에서 반란군이 발생하는 실정이라 자국 통제도 제대로 못했다. 미군은 대체로 남베트남 군대를 불신했고, 정말로 군인다운 일부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예우하지 않았다. 게다가 미국에서 지원받은 무기들이 암시장에서 떠돌다가 북베트남군이나 베트남 게릴라 군의 손에 들어가는 일도 벌어졌다. 정부군에게 탈취되거나 전장에 유기된 미국제 무기를 사용하는 베트남 게릴라 군의 존재는 미군의 전면적인 개입 이전에도 존재했었다. 그들은 일본군이나 프랑스군과도 맞서 싸운 바 있는 사실상 전쟁에 특화된 민족이었던 것이다. 미군은 북베트남군이 보급로로 이용하고 있다는 이유로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무차별적으로 폭격했고, 당시 사용된 폭탄의 양은 태평양전쟁 당시에 사용한 폭탄의 양보다도 몇 배는 많았다. 그래도 호치민 루트가 폐쇄되지 않자 국경을 넘어 라오스와 캄보디아에 미군과 남베트남군을 보내 침공하기까지 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공격과 유사한 현상으로 이같은 폭격에 대해 라오스와 캄보디아 둘 다 모두 심각하게 여겼으며 이는 그들이 비동맹 중립주의 노선을 추구하는 약소 중립국이었기 때문에 폭격한 미국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베트남의 게릴라 군과 베트남 공산군은 몰래 캄보디아나 라오스 등지의 정글을 통과하는 도로를 만들어 북베트남이 베트남 게릴라 군을 지원할 수 있는 길을 만들었는데 이를 미국에서는 "호치민 루트"라고 불렀다. 당시 미국과 중국, 소련 등은 주변 국가인 캄보디아와 라오스는 중립으로 두고, 오로지 전쟁은 베트남 국내에 한정한다는 협약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막을 수는 없었다. 물론 암묵적으로 미국 특수부대가 양 국가에 있는 호치민루트를 타격하였으며 엄청난 공군 폭격을 감행했으나 효과는 미미했고, 호치민루트는 전쟁 내내 건재했다. 게다가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주와 라오스의 파테트라오 등의 공산 반군들은 호치민루트 형성을 지원했으며, 이들 두 국가의 정부는 이를 막을 능력이 전혀 없었고 의지조차도 전혀 없었다. 캄보디아의 노로돔 시아누크 왕은 베트남 게릴라 군들이 땅굴을 파고, 호치민루트를 만드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전혀 제지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불만을 가진 미국이 캄보디아의 군부에 공작을 벌여 시아누크 국왕을 추방하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결국 시아누크 국왕이라는 입지전적의 전통 지도자가 사라지자 오히려 추방된 시아누크가 선동하여 폴 포트의 크메르 루주 같은 공산계 게릴라들이 준동하여 캄보디아의 정국은 더욱 혼란에 빠지게 되자 미군은 호치민루트를 막는 것은 더 어려워져 버렸다. 라오스는 미군 병력의 직접적인 침공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남베트남군이 람손 719 작전(Lam son 719)을 발동해 라오스 영내로 침공해 올 때 미군이 적극적으로 지원했기 때문에 오히려 거기서 거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심지어 폭격 일지를 조작하고 언론을 통제해 자국민에게까지 이 사실을 숨겼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해 이와 같은 사실이 드러나자 미국민의 반전여론은 말 그대로 불타 올랐고, 이는 남베트남의 패망으로 이어졌다. 남베트남 뿐만 아니라 라오스와 캄보디아도 북베트남과 중국이 이를 계기로 자국 내 공산주의자들을 본격적으로 지원하면서 공산화를 피할 수 없었고, 캄보디아의 경우에는 인류 역사상 유래를 찾기 힘든 대학살인 킬링필드까지 겪어야 했다. 


물론 라오스는 그렇지 않았지만 베트남 전쟁 끝나고 캄보디아는 태국과 북베트남에 불신을 샀으며 특히 친소정책을 펼친 북베트남에 배신해 버렸다. 베트남 전쟁이 끝난지 50년이 지났어도 베트남은 아직까지도 그 후유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전후 지뢰와 불발탄 때문에 최소 40,000명이 사망했으며  부상자들은 60,000명으로 집계됐다. 아직 파악되지 않은 피해자들도 많아 실제 피해 규모는 더 클 것으로 보인다. 베트남전 당시 미군이 항공기로 투하한 폭탄, 지뢰 등은 모두 1,500만 톤에 달하고 있다. 이 가운데 여전히 800,000톤 가량의 불발탄이 땅 속에 묻혀 있다. 베트남 국방부는 이 가운데 3.2%만 제거된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전체 베트남 면적의 18.82%가 여전히 지뢰, 불발탄에 오염되어 있다. 유엔개발계획(UNDP), 베트남 지뢰 제거센터(VNMAC)와 함께 불발탄, 지뢰 제거를 하고 있지만 지뢰 탐지 제거 작업은 쉽지 않다. 나무를 베고, 사람이 직접 탐지기로 현장을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수작업을 하다보니 시간이 매우 오래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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