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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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4년 네덜란드가 대만의 남부 지역인 타이난, 가오슝, 핑동, 타이동 일대 등을 점령하고, 1626년 스페인이 대만의 북부인 타이베이, 신베이, 지룽, 단수이 등을 점령하여 남북에서 유럽의 두 국가 세력들이 중서부의 대두 왕국을 압박해왔다. 그러다가 당시 서로 사이가 좋지 않던 스페인과 네덜란드가 대만 섬에서 세력을 다투었고, 1642년 네덜란드는 스페인을 대만에서 몰아낸다. 이후 1644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군대가 대만 북부의 케타갈란족(凱達格蘭族)을 공격해 격파하는데 성공한 이후 남쪽으로 진격하여 대두 왕국을 공격하였지만 대두 왕국의 원주민 부족 동맹 연합이 네덜란드 군대를 성공적으로 격퇴시켰다. 그러나 1642년 8월 네덜란드는 한 때 스페인이 식민지화 하여 차지한 대만 북부와 본인들이 차지한 남부를 연결하기 위해 서부 평원의 원주민 정복을 목표로 삼았다. 1644년에 네덜란드의 선장 피터르 본(Piter Boon)은 북부 지역의 순종하지 않은 원주민들의 토벌을 위해 네덜란드 원정대를 이끌었고 그 다음해인 1645년 다시 대두 왕국에 두 번째 공격을 감행하여 대두 왕국의 통치를 받고 있던 반(反) 네덜란드 성향의 13개의 부족 마을을 파괴했다.

17th century watercolor of Fort Zeelandia, 출처 : Wikipedia, Fort Zeelandia (Taiwan)
당시 18개의 다른 부족 촌락의 지도자였던 대두의 왕이자 파포라 족의 카마찻 아슬라미에(Camachat Aslamie)는 즉위 말기에 파포라 족을 이끌고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침입을 격퇴하였으나 결국에는 어쩔 수 없이 부족의 안전과 평화회담을 위해 시몬 판 브렌(Simon van Breen) 목사의 중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으며 네덜란드에게 항복하고 네덜란드가 주최하고 있는 노스 로드 회의에 참석했다. 그리고 1645년 4월에 아슬라미에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남부 지방 회의에 참석하였으며 네덜란드는 무력으로 굴복시킨 아슬라미에한테 강제적으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항복 조약을 서명 및 체결하게 만들어 대두 왕국이 네덜란드에 항복하고 복종했음을 명시하여 대두 왕국을 속국으로 삼고 한때 스페인이 지배했던 북부를 비롯한 대만 섬 전부를 점령하고선 본격적으로 모든 원주민 부족들과 오래 전에 대만 섬에 정착하거나 수입한 한족들을 노예로 착취했다. 대만 타이난(臺南)의 젤란디아 요새(Fort Zeelandia)는 네덜란드가 1624년 동아시아 무역 거래를 위해 축조했다가 1662년 명나라의 유신 정성공(鄭成功, 1624~1662)의 공격으로 인해 중국에 넘어간 보루이다. 그 이전까지 대만은 중국의 영토가 아니라 고산족이라 불리는 원주민들의 국가였다.
따라서 정성공의 젤란디아 요새 함락은 대만이 중국 영토가 된 시발점이 된다. 대만에서는 이 성을 안 평고성(安平古城) 또는 안평고보(安平古堡)라고 부른다. 네덜란드는 38년 동안 이 성루를 유지하는데 엄청난 공을 들였다. 요새 건설에 사용된 벽돌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본사가 있는 인도네시아 바타비아(자카르타)에서 운반해 왔고, 설탕, 흙, 조개껍데기, 찹쌀을 섞어 만든 모르타르도 사용했다. 요새는 3단의 벽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네 군데 모퉁이에는 방어 효과를 높이기 위해 튀어나온 치성을 설치했다. 젤란디아 요새는 1624년에서 1634년 동안, 약 10년에 거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의해 건립된 요새로, 오늘날 대만인 포르모사 섬(island of Formosa)의 안평(安平 타이난)의 마을에 건립되었으며, 포르모사의 서부를 38년 넘게 지배하였다. 이 지역은 예전에 오렌지 시(Orange City 오륜치성奧倫治城), 안평 시(Anping City 安平城), 그리고 타이욘 시(Tayoan City 台灣城)등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오늘날 중국인들은 이 장소를 안평요새(安平古堡)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네덜란드 인들은 타이난 해안 외각에 위치한 모래 투성이 반도를 요새를 세울 장소로 결정했는데 이는 요새가 바다에서 직접적으로 접근하여, 공성전이 일어났을 때 바타비아로부터 구원병과 보급 물자를 받을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요새로 선택된 이 장소는 충분한 물의 보급이 어려웠고, 본토로부터 물자를 수송해 와야 했다. 1622년 네덜란드가 세운 ‘오란여’ 성은 1640년 완공 뒤 ‘젤란디아’로 개명했다. 성은 외성과 내성으로 나뉘는데, 사각형 모양의 내성은 총 3층이며 지하에 있는 아래층은 창고로 사용하고 있다. 지상에는 1, 2층이 있으며 위층 사각 모서리에는 보루가 있고 보루 사이에는 북문과 동문, 남문이 있다. 북문 문미 윗부분에는 ‘T'CASTEEL ZEELDIA GEBOUWED ANNO 1634 (젤란디아 1634년 건설)’ 이라고 적혀 있다. 아래층 사각 모서리에도 보루가 있다. 기단 각 변의 중앙마다 반원형 보루가 있는데, 반원 중앙에는 우물이 하나씩 있다. 북측에는 작은 문과 계단이 있어 지하실 탄약고로 내려갈 수 있다. 1, 2층에는 성가퀴가 있으며 볼록 튀어나온 보루 주변에는 전망대가 있고, 보루는 포탑 역할을 하며, 각각 대포 5대가 존재한다. 성보 전체는 찹쌀 풀과 모래, 굴 껍데기 가루로 만들었다. 현존하는 성벽 및 반원형 보루 잔해유적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은 안평 고성의 잔해 유적이라 볼 수 있다. 15세기 말엽 포르투갈 인이 유럽에서 희망봉을 거쳐 동방으로 가는 직항로를 발견한 후부터, 서방 세력이 동방으로 서서히 이동해 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포르투갈인이었다. 그들은 마카오를 점령한 후 중국 동남쪽 연해에 영사관을 설치했다. 그 뒤를 이어 스페인인이 들어왔고, 이에 일본인도 들어왔다. 원래 명나라와 통상하려고 했던 네덜란드인들은 경제적인 압박을 몇 배로 받았다. 17세기 말 무렵, 네덜란드 사람들은 두 차례 펑후(澎湖)를 점령하려고 했지만 명나라에 의해 실패로 돌아갔다. 1623년 9월, 코르넬리스 레여르스(Cornelis Reyers) 제독이 군사를 끌고 와서 안평 항구 입구에 죽암(竹巖)을 세웠다. 이후에 명나라가 펑후를 공격하면서 군사적 위기에 처한 네덜란드는 수비를 철수하고 죽암을 철거했다. 하지만 1624년 7월, 네덜란드는 다시 대만을 점령했다. 최초의 주 대만 총독인 송크(Song Q)는 1곤신(鯤鯓) 죽암의 옛 지역에 성벽을 쌓았다. 벽돌과 돌이 부족해 모래와 흙으로 지은 다음 아오룬니야(Aoruniya) 성이라 불렀다. 1627년 젤란디아로 개명한 이후에는 성벽의 재료를 벽돌과 돌로 조금씩 변경했다. 전체 공정은 1633년 음력 1월 1일에 완료했다. 이것이 초창기 대만성(왕성, 적감성, 안평성)이다. 네덜란드 인이 만든 성인 데다가 그 당시 네덜란드 인들은 붉은 털이라 불렸기 때문에 이 높은 지대는 홍모성(紅毛城)이라고도 불렸다. 안평(安平) 소포대의 경우 대만 성 잔해 유적 서쪽에 위치했다.
포대의 성 보호 돌 제방은 좁고 긴 형태로 남북으로 뻗어 있는 형태다. 안평 소포대에는 포대 본체 및 북쪽의 성 보호 돌 제방이 포함되고 있다. 포대 본체는 저수지 공원 옆에 위치하고 있다. 화강암과 자갈을 축조했으며 남, 북, 서쪽에 벽돌로 만든 성가퀴가 6개 정도 있고, 그 아래에는 지하 탄약고 설비가 있다. 포대 바닥은 붉은 벽돌로 되어 있고 포대 위에는 원래 영국식 B. P. 9파운드 포환 전장 철포가 있었다. 지금 있는 대포는 원래 있던 물건이 아니다. 북쪽의 돌 제방은 산호석을 축조하여 회삼물을 매립해 만들었다. 이곳에는 총안이 있는데, 총안에는 문과 물막이를 설치했다. 돌 제방의 앞부분은 민가와 왕성 서쪽 지역 사회 계획 지역에 깊숙이 위치하며 민가와 가깝다. 뒷 부분은 옛 포대를 중심으로 한 돌 제방이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광장과 높이가 낮은 민가, 유치원, 성당과 인접해 있으며 서쪽에는 양식장이 있다. 이로써 네덜란드는 선형 방어 체계를 구축했다. 네덜란드를 공격한 정성공의 아버지 정지룡(鄭芝龍)은 복건성 출신 밀무역업자였다. 정지룡이 일본에 체류할 때 하급 무사의 딸 다가와 마츠(田川松)와 하룻밤 사이에서 나온 아들이 정성공이다. 당시는 명청교체기였다. 정지룡은 남쪽으로 추격하는 남명(南明)을 후원하다가 복건성만 남았을 때 청나라에 투항해 버렸다.
이에 아들 정성공은 명나라에 대한 충성을 지키며 반청운동을 벌였다. 한 때 남경을 공격하기도 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청나라가 복건성을 압박하면서 해금(海禁)조치를 내렸다. 청나라 황제는 모든 해안에서 50여km 이내 육지에는 아무도 거주하지 못하게 한다는 칙령을 내렸다. 바다를 근거로 하던 정성공 세력은 근거지를 잃게 되었다. 정씨의 해상 세력은 팽호도(澎湖島) 등 주변의 작은 섬 몇 개로 대 선단을 이끌어 가지 못할 상황이 되었다. 그들의 선택은 네덜란드를 격파하고 대만을 접수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네덜란드와의 전투는 불가피했다. 1659년 남경에 대한 공략이 실패한 이후에 명나라 황실에 충성하는 무리들의 지도자였던 정성공은 청나라 황실이 이미 중국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느꼈고, 이에 따라 그의 군대에 더 많은 보급품과 인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정성공은 자신이 거점으로 삼을 만한 곳을 찾아다니기 시작했고, 대만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서 일하던 하빈(何斌)이라는 중국인이 샤먼(厦门)에 위치한 정성공의 거점으로 도주하여 대만의 지도를 정성공에게 바쳤다. 네덜란드는 오늘날 타이난 시로 불리는 타이욘(大員)에 1632년 거점을 세웠으며, 이 거점은 두 개의 요새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젤란디아 요새였으며, 타이욘 만의 입구 부근에 자리하고 있었고, 네덜란드 인들의 주된 정착지이기도 했다. 두 번째는 프로빈티아 요새(Fort Provintia)로 만에 위치해 있었으며, 상대적으로 그다지 덜 중요하고 규모도 작았다. 동인도 회사에서 파견된 대만의 총독 프레데릭 코예트(Frederick Coyett)는 1,800명의 병력과 함께 젤란디아 요새에 머무르고 있었다. 코예트의 하급자 발렌틴(Valentyn)은 프로빈티아 요새를 방어할 책임을 맡고 있었으며, 이 곳의 수비병은 500명 정도였다. 정성공의 세력이 대만을 침공할 것이란 정보를 네덜란드의 대만 총독 프레데릭 코예트(Frederick Coyett)은 입수하고 있었다. 그는 바타비아에 급전을 보내 지원을 요청했다. 1660년 동인도회사 이사회는 얀 판 데르 란(Jan van der Laan) 함장을 지휘관으로 삼아 12척의 전함과 600명의 병력으로 지원병을 파병했다. 그러나 판 데르 란은 코예트를 무시했다. 지원군 함장은 포르투갈이 점령한 마카오를 장악할 궁리만 했다. 이를 파악한 정성공은 기만 전술로 대만을 침공할 의사가 없다는 신호를 보냈다. 판 데르 란은 정성공에 속아 넘어갔으며 지원군 책임자와 현지 총독 사이에 갈등이 커지게 되었다. 그러자 1661년 2월 마침내 판 데르 란은 함대를 돌려 바타비아로 돌아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