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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데시의 금수저 집안, 무지부르 라흐만 가문의 몰락
  • 알렉세이정
  • 등록 2026-04-12 14:59:55

무지부르 라흐만 집안은 방글라데시에서 매우 절대적인 금수저 집안이다.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Sheikh Mujibur Rahman, 1920~1975)은 방글라데시의 독립 영웅인데다 방글라데시의 국부(國父)의 위치에 있는 인물이다. 그의 가족과 연결되어 있는 집안은 방글라데시에서도 손꼽히는 금수저 집안이고, 무지부르 라흐만의 가족들은 이와 같은 방글라데시의 신분 사회의 가장 정점에 있는 집안이기도 했다. 그래서 전 방글라데시의 총리인 셰이크 하시나(Sheikh Hasina)는 방글라데시의 절대적인 영웅인 무지부르 라흐만의 딸이라는 것만으로도 큰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무지부르는 대통령 중심제와 민주 집중제에 근거하여 헌법을 개정했다. 그러나 이는  사회주의 체제의 급진적 도입으로 오해한 동파키스탄 우파, 벵골족 민족주의자들의 거센 도전에 직면했고,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과 군부 중심의 친(親) 파키스탄 세력들이 반발하여 이들 폭동을 일으킨 가운데 결국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은 아내인 셰이크 파질라툰네사 무집(Sheikh Fazilatunnesa Mujib)과 함께 온 가족들이 집안에서 살해된다. 당시 하시나는 서독에서 유학 중이라 간신히 목숨은 건질 수 있었는데 이 사건이 후일 하시나가 정치계에 입문하여 벵골인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은 이유가 된다. 

Ousted Prime Minister Sheikh Hasina in Dhaka, Bangladesh, in 2023. 출처 : Ludovic Marin / AFP via Getty Images


영웅과 영웅 집안의 비참한 학살과 같은 이 사건은 동파키스탄 벵골인들의 엄청난 동정표가 하시나에게 몰리게 되는 것은 필연이다. 무지부르 라흐만이 그냥 보통 영웅도 아니고 방글라데시를 독립시킨 국부(國父)였기 때문이다. 하시나가 1981년 방글라데시로 귀국했을 때, 정치에 문외한이었던 그녀가 아와미(Awami) 연맹의 총재로 당선된 이유가 대부분 무지부르 라흐만 가문의 죽음으로 안타까워 하던 시민들의 동정표였던 것이다. 이때부터 하시나의 정치인생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녀보다 상위권에 있었던 집단은 그녀의 집안을 도륙낸 군부정권이었다. 당시 군부정권의 수장은 지아우르 라흐만(Ziaur Rahman, 1936~1981)으로 시아파 이슬람 원리주의자인데다, 순수 벵골인도 아닌 이란계로 친(親) 파키스탄 성향을 갖고 있었다. 그 또한 서파키스탄의 동파키스탄 차별로 인한 불만이 누적되어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당시, 무지부르 라흐만의 진영에 합세했지만 세속주의 무슬림인 무지부르와 종교적 갈등으로 자주 부딪쳤고, 방글라데시가 독립한 이후로는 아예 무지부르와 정적으로 맞섰던 인물이다. 그러한 상황에 하시나가 귀국하여 아와미 연맹의 총재가 되자 위협을 느낀 그는 하시나를 가택 연금시켰다. 


그러자 아와미 연맹은 이를 무지부르 일가에 대한 탄압으로 여기고 군사정권 타도를 외치며 반군부 투쟁에 나섰다. 이러한 상황에서 군부에서도 분열이 일어났고, 지아우르 라흐만 또한 이 내분으로 인해 후세인 무하마드 에르샤드(Hussain Muhammad Ershad, 1930~2019)에게 암살을 당한다. 이후 치뤄진 대통령 선거에서 에르샤드가 당선되었고 국민들의 지속적인 압박과 시위 등으로 인해 1986년에 이르러 일부 아와미 연맹을 포함한 야당에 대해 해금령을 내리고 총선이 실시된다. 당시 혼란기의 방글라데시는 계엄령이 실시되고 있는 중이었고 이 상황에서 치뤄진 총선은 부정선거가 자행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특히 옛 군부 세력의 민족주의당(বাংলাদেশ জাতীয়তাবাদী দল)은 총선에 보이콧을 선언하면서 여당인 에르샤드 정권의 정당에 매우 유리한 양상으로 치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와미 연맹은 생각보다 선전했지만 에르샤드 정권의 지속적인 탄압과 견제로 인해 소수 야당으로 전락했고, 하시나는 1년 만에 국회의원 직을 사퇴했다. 에르샤드는 의회를 곧바로 해산시켰으며 1991년에 제대로 된 총선이 치러지기 전까지 에르샤드의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군부독재가 자행되었다. 그러자 폭압적인 에르샤드 정권에 대한 민심이 폭발하면서 1990년부터 전국적으로 에르샤드를 축출하기 위해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에르샤드 정권에 반발한 인물이 전임 지아우르 라흐만 대통령의 부인인 칼레다 카눔 푸툴(Khaleda Khanum Putul)이다. 그녀는 민족주의당 대표로 반정부 투쟁을 이끌었지만 하시나와는 악연이었다. 그녀의 남편 지아우르 라흐만이 자신의 아버지인 무지부르 라흐만과 그 일가를 몰살시킨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에르샤드는 1990년 연말에 사임하게 되었고 1991년 총선은 성공적으로 치러져서 칼레다 푸툴이 이끌던 방글라데시 민족주의당이 압승을 거두게 된다. 하시나가 이끄는 아와미 연맹은 제1 야당으로 승격되었지만 칼레다 푸툴은 매우 무능한 인물이었다. 게다가 하시나와는 악연이었기에, 둘은 적대관계일 수밖에 없었으며 푸툴이 더 경악스러운 행동을 한 것은 전임 에르샤드 정권 세력에 대해 면죄부를 준 일이었다. 하시나는 이같은 푸툴의 행위에 강한 비판을 가했다. 이후 1994년 하시나는 보궐선거에 나섰지만 칼레다 푸툴이 관련된 부정선거로 인해 민족주의당 후보에게 패하면서 국회 입성에 실패했다. 하지만 민족주의당 정권은 국민들의 민심을 충족시키지 못했고 오히려 부정선거와 부패에 대한 논란 등으로 인해 인기가 폭락했다. 


이에 아와미 연맹은 칼레다 푸툴 총리가 사퇴할 것과 임시정부를 구성할 것을 요구했지만 푸툴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아와미 연맹은 사상 유례 없는 다카 시민들과 함께 시위에 나섰다. 결국 칼레다 푸툴은 무하마드 하비부르 라흐만(Muhammad Habibur Rahman)을 필두로 한 임시정부를 구성한 후 사임했다. 1996년 2월 15일에 치러진 총선에서 아와미 연맹은 압승했으며 이로서 하시나는 최초로 총리에 오르게 된다. 1996년 총리에 오른 하시나는 아버지인 무지부르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키고 무지부르 집안을 파탄낸 범죄자들을 보호하는 일명 '보상법'을 폐지하고 이들을 재판에 넘겼다. 그리고 인도의 갠지스 강의 물을 30년 동안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협약을 맺어 방글라데시의 고질적인 물부족 문제를 해결했으며 관영 중심의 텔레콤 사업을 민영으로 전환했다. 그리고 외국계 회사들이 100% 자회사를 운영하는 것도 허락하는 등 제법 개혁적인 국정을 운영했다. 그럼에도 방글라데시 서민들의 생활으 나아지지 않았고, 1998~1999년에 이은 세계적인 금융 위기로 인해 방글라데시의 경제는 더욱 폭망하기 시작하면서 하시나의 인기 또한 급속히 추락했다. 


결국 2001년 총선에서 민족주의당과 칼레다 푸툴에게 정권을 내주고 말았다. 그러나 칼레다 푸툴의 2기는 더욱 처참했다. 부패는 일상이었고, 더불어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2005년 8월 17일 오전 수도 다카를 비롯한 전국 456개 지역에 동시다발적인 테러를 저지르니 치안마저 불안해진 상황에 민심이 다시 악화되어 2005년 다카 시장 선거에서 아와미 연맹에게 패배했다. 이에 2006년 푸툴이 총리에서 사임했으며 이후 집권당인 민족주의당은 총리를 선출하지 못한 채, 권한 대행들이 선출되면서 국정이 매우 불안정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으며 국민들의 시위는 끝없이 이어지게 되었다. 이 와중에 민족주의당 정권이 강경 진압을 하게 되면서 40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로 인해 국민들은 민족주의당 정권에 대한 반감이 높아만 갔고, 위기에 몰린 민족주의당은 이같은 반정부 시위의 원인이 하시나에게 있다 주장해 그녀를 2007년에 구속, 수감시키게 된다. 그러나 이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이 극심해지고 폭동과 같은 불길한 상황을 예감한 민족주의당은 2008년 하시나의 건강 악화 등을 이유를 들어 보석으로 석방했다.그러나 방글라데시의 민심은 민족주의당으로부터 등을 돌렸고 2008년 총선에서 아와미 연맹이 재집권에 성공하여 하시나는 다시 총리가 된다. 


아와미 연맹은 2024년에 있었던 총선거에서도 승리하여 4회 연속으로 총선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하시나는 방글라데시 최장수 총리 기록을 갱신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반대파에 대한 강한 탄압을 이어갔고, 부정선거 의혹도 짙어지면서 일당독재에 준하는 의회를 구성했다. 더불어 방글라데시 경제가 최악임에 부정축재 의혹이 짙어졌으며 독립운동가 후손들에게 공무원 자리의 30%를 할당하려 했다가 높은 청년 실업률로 고생하고 있던 방글라데시 Z세대 청년들의 반발이 이어져 이는 폭동에 준하는 시위로 이어진다. 방글라데시는 청년 인구가 매우 많아 청년 실업률이 40%에 달할 정도의 실업난이 심각한 상태로 매년 약 40만 명의 대학 졸업생 중 많은 이들이 월급은 높지 않지만 안정적인 공직 3,000개를 놓고 경쟁하는데, 많지 않은 유공자 자녀들에게 공직의 1/3을 할당하면 경쟁률이 133:1에서 200:1로 급상승하게 된다. 참고로 방글라데시의 공무원 월급은 매우 낮은 편에 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공무원들 사이에서 뇌물과 각종 비리가 횡행했다. 공무원이 되면 뇌물을 받기 쉽기 때문에 여기저기서 받은 뇌물로 축재하기 용이하다. 거기에다가 공무원 특유의 왠만하면 정년이 보장되어 있다는 안정성까지 겹쳐 공무원 경쟁률이 매우 높다.


이 문제의 원인은 무지부르 라흐만이 1972년 파키스탄에서 독립한 직후 공무원 일자리 80%를 참전용사 등에게 할당하는 채용 할당제를 도입하면서 오늘날까지 방글라데시에서 독립유공자의 후손들은 권력을 잡은 기득권으로 세습되다시피 유지되어 왔다. 하시나의 독립 유공자 30% 할당제는 표면상의 이유일 뿐이고 실질적으로는 기득권 자녀 할당제인 것이다.  그러니 시위가 벌어지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하시나 총리의 할당제 추진은 반정부 여론을 더욱 촉진시키게 된다. 당시 상당수의 대학생들은 이와 같은 할당제에 대한 정책과 관련하여 하시나 총리가 자신의 지지 세력을 위해 추진하는 정책이며, 사법부는 정부의 심복에 불과하다 주장했다. 한편 아와미 연맹을 지지하는 대학생 회원 등 할당제를 지지하는 측 친정부 학생들 또한 찬성 시위를 벌였고, 찬반 두 집단이 충돌하면서 벽돌과 몽둥이를 들고 상호 간의 난투극이 벌어졌다.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최대 1,400명이 희생되었다. 경찰이 개입했지만 할당제 찬성 측 학생들보다는 할당제 반대 측 학생들만 강경하게 진압하게 되니 할당제 반대파의 시위는 점차 반정부 & 민주화 요구 시위로 규모가 더욱 확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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