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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에 미친 유럽 열강들의 영향
  • 알렉세이정
  • 등록 2026-04-12 16:52:59

16세기 초부터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등이 아시아로 진출했다. 당시 이들 유럽 국가들의 공통된 구호는 ‘그리스도교도와 향신료를 위하여(In search of Christians and spices)’라는 단순한 구호에서 시작되었다. 이는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인도항로를 개척하여 1498년 현재 인도 코지코드(Kozhikode)로 알려진 캘리컷(Calicut)에 도착했을 당시, 그곳에 온 이유를 질문 받고 대답한 말이라고 전해진다. 그리스도교도라는 의미는 전설적인 성직자로 알려진 프레스터 존(Prester John)의 그리스도교 왕국을 지칭하고 있으며, 향신료는 당시 유럽인들의 조미료로 애용되는 후추를 의미하고 있다. 이러한 유럽인들의 움직임은 그리스도교 문화의 도전과 중상주의 유럽의 진출, 제국주의로 발전하는 식민주의가 도래했음을 암시했다. 16세기 초 포르투갈에 의해 인도양을 지나 인도로 항해하는 해상 무역이 거의 독점적으로 운영되었으며 인도와 동남아시아 일대에서 수입되는 후추로 유럽에서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그리고 포르투갈이 스페인에 병합되면서 스페인의 아시아 진출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러한 사건은 영국과 네덜란드가 인도로 향하는 해상무역을 직접적으로 나서게 되는 동기가 되었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現 베트남 사이공, 출처 : The influence of European powers on Southeast Asia


해상을 개척하여 인도로 진출은 물론 영국이 앞선 상태였지만 해상무역은 네덜란드가 상업 국가답게 체계적으로 발달되어 있었다. 당시까지 영국은 대부분 식민지를 약탈하는 것에 의존하였고 네덜란드는 아시아와 상업적인 거래를 통해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동인도회사를 먼저 설립한 곳은 네덜란드이며 동인도의 특산품인 후추, 커피, 사탕, 쪽, 면직물 등을 수입하면서 네덜란드 본토의 상업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하지만 여러 곳의 무역회사가 경쟁적으로 무역에 나서자 가격이 폭락하고 회사들 사이에 경쟁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로 인해 여러 곳의 회사를 하나로 통합하여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설립하고 운영하였는데 이는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인도로 향하는 해상무역은 중상주의를 내세운 유럽 여러 나라의 사활을 건 상업전(商業戰)의 일환을 이루고 있었다 1602년 이전까지는 개별적인 무역회사들이 설립되었다가 1602년 3월 네덜란드에서는 여러 개의 무역회사를 하나로 통합하여 국가가 관리하는 동인도회사를 출범시켰다. 그러나 2년 전 영국에서도 1600년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였지만 본격적인 무역에서는 네덜란드에 비해 많이 낙후되어 있었다. 프랑스는 1604년에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였지만 본격적으로 무역에 나서지는 못했고 17세기 중반이 되어서야 해상무역에 진출하게 되었다.   


이들 동인도회사는 동인도의 여러 섬을 정복하고 직접적인 지배 또는 그 지역의 지배 세력을 이용하여 상업적인 부를 취하는 등 간접적인 지배를 행했다. 이를 통해 해당 지배 지역에 특산품을 강제로 재배하게 하였고 그 땅을 헐값에 사들여 해당 지역의 향신료무역을 독점했다. 그러나 1652년부터 오랜 기간 동안 영국과 네덜란드 사이에 전쟁이 계속 되었고, 이 전쟁에서 패배해 심한 타격을 입은 네덜란드는 영국과의 상업적은 경쟁에 있어서도 밀리게 되었다. 또한 18세기 이후 네덜란드 동남아시아 지역의 향신료 무역이 부진하게 되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식민지경영을 주로 하게 되었으며, 1799년에는 영토를 본국 정부에 이양하고 회사는 해산했다. 쪽과 질 좋은 면직물을 중심으로 한 인도무역에 주력한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1600년에 설립되었으며 18세기 유럽에서 영국과 프랑스와 전쟁으로 인해 각종 무역들이 규제되면서, 인도에서 1604년에 설립한 프랑스 동인도회사와 격렬한 경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결국 플라시 전투를 계기로 하여 영국 동인도회사는 인도 무역을 거의 독점함과 동시에 인도의 식민지화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 후 사적 독점상업회사(私的獨占商業會社)인 동인도회사에 대해 영국 국내에서 상당한 비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는 식민지화로 인하여 막대한 자금을 얻었지만 국내로 유출되는 물품들이 상당히 비쌌고 이 물품들의 질 또한 그다지 좋지 않았다. 게다가 양도 한정되어서 들어오니 영국 국내의 여론이 좋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그로 인해 경영난에 빠진 회사가 영국정부의 원조를 요청하게 되었으므로 1773년 노스 규제법(North's Regulating Act)에 의해 본국 정부의 감독 하에 놓이게 되었다. 1833년에는 무역독점권이 폐지되고, 1858년 세포이의 항쟁이 일어난 뒤에는 인도가 영국 국왕의 직접적인 통치에 들어가게 되어, 동인도회사는 그 기능이 정지되었다. 결국 동인도회사는 중상주의 시대의 전근대적 독점상업조직으로, 자본주의의 세계적 확산과 산업자본의 지배가 확립되면서 그 역할은 종결되었다. 그러나 독점무역에 따른 이윤은 유럽 여러 나라에서 자본의 본원적축적(本源的蓄積, Primitive accumulation)에 크게 공헌하게 된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1874년에 국유화되었고 2년 후인 1876년에 해산하면서 본격적으로 국가의 지배 체제로 들어갔다. 그러나 1978년부터 영국 문장원에서 문장사용 허가를 얻었고, 현재의 동인도회사가 만들어져 홍차 회사가 운영되고 있다. 동남아시아에서 국책회사(國策會社, Government-run corporation)로 지어진 주식회사들은 무역과 식민지 경영에 있어 크게 후퇴했다. 


무역특허회사(貿易特許會社, Trade chartered company)의 활동은 상업적 발전의 근거지를 설정하는 것이었고, 국가 권력에 영향을 주지 못했다. 이를 대체한 것이 본국정부의 직접지배의 실현에 따른 식민지의 설정이었다. 유럽의 동남아시아에 대한 제국주의적 진출에 있어서 영국의 싱가포르를 점령한 것은 매우 획기적인 사실로 간주되고 있다. 1819년 인도 총독이었던 W. 헤이스팅스(W. Hastings)의 대리인인 토머스 래플스(Thomas Raffles)는 조호르바르의 토후들과 조약을 맺어 제국주의적 식민지화 시대로 새로 개척했다. 이러한 식민지화의 성공으로 인해 결국 무역회사는 제국으로 대체되었고, 동남아시아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영국은 1826년 말레이 반도에 해협식민지(海峽植民地, Straits Settlement, 1826~1946)를 건설했다. 그리고 1824년부터 미얀마를 침공하기 시작하여 세 차례에 걸쳐 영국-미얀마 전쟁(1824~1826, 1852~1853, 1885~1886)을 벌인 끝에 1886년에 미얀마를 영국령 인도의 한 주로 완전히 병합하였다. 인도를 두고 영국과 경쟁하였으나 플레시 전투의 패배로 실패하여 일찍부터 동남아시아로의 진출을 노리던 프랑스는 1847년 다낭에 포격을 가하는 것으로 인도차이나 침공을 본격화하였다. 1858년 베트남 응우옌 왕조가 선교사 2명을 처형한 것을 빌미로 하여 다낭을 점령했고, 1859년에는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수도였던 후에(Hue)를 공격했다. 


1862년 제1차 사이공 조약으로 남부 3개의 성을 함락한 후에도 군사적인 도발을 계속했으며, 1887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연방을 세워 이 지역을 자신들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이후 인도차이나 연방은 50년 동안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일찍부터 스페인의 식민 지배를 받던 필리핀에서는 19세기 말 독립을 쟁취하려는 저항운동이 활발했다. 그러나 1898년에 벌어진 미국-스페인 전쟁의 결과로 필리핀의 지배권은 미국으로 넘어갔으며, 미국은 필리핀 민중들의 독립 요구를 인정하지 않고 식민 총치를 계속하였다. 결국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인 1946년에야 필리핀의 완전 독립 요구를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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