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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공산당의 거두 찟 푸미삭과 태국 좌익 리버럴 문화계 이야기 - 태국 좌파 문학, 태국의 좌우 이념이 모두 공존하게 된 계기를 마련
  • 알렉세이정
  • 등록 2026-04-12 16:54:47

대중소설 <라덴-란다이Raden-Landai (라덴과 란다이 이야기)>는 19세기 초 라마 3세 재위 시기에, 찟이 삭디나(봉건) 관료로 여긴 경찰 수장 프라 마하몬뜨리(Phra Mahamontri)가 저술한 이 작품은, 인도계 거지 란다이와 두 여인 끄라-애(Kra-ae)와 쁘라데(Pradae)에 관한 이야기다. 란다이의 애인 끄라-애는 시장에서 달콤한 과자를 판다. 쁘라데는 파타니 출신의 아름다운 말레이 여인으로 노예로 방콕에 포로로 끌려와, 역시 인도계일 것 같은 목부(牧夫) 쁘라두아에게 아내로 팔려간다. 란다이가 쁘라데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이들의 불륜은 쁘라데의 남편 쁘라두아의 대립과 마주하게 된다. 여기에 끄라-애는 질투심으로 인해 이 애정 관계에 끼어들면서 상황은 더 복잡해진다. 재미있고 풍자적인 문체에 야한 장면도 일부 담긴 <라덴-란다이>는 당대의 조신과 평민 모두에게 사랑받은 것으로 보이며, 후일 연극으로도 공연된다. 찟에 의하면 이 소설이 특출한 지점에 있어 당대의 관습적이고 편협한 주류 문학이 왕과 왕자 이야기만 다룰 때 등장한 가난하고 주변화 된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점에 있다. 

태국 좌파 이데올로기의 문학 거두, 찟 푸미삭,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저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지만, 찟은 저자의 “삭디나 문학의 관습적 양식을 부순 용기와 당대 관료로서는 보기 드문 진보성”으로 높이 평가했다. 찟은 <라덴-란다이>를 제외하고는 이와 같은 종류의 문학이 태국 왕가에 복무하기 위해 쓰였기 때문에 ‘삭디나 문학’이라 지칭했다. 그는 왕조가 얼마나 당당하고 순조로울지는 문학을 통해 정통성을 확보하는데 달렸다고 지적했다. 독자가 이와 같은 문학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관점 곧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읽음으로써 왕조의 영향력을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 찟의 목표였다. 찟 푸미삭이 태어났던 시기는 절대왕정이던 태국이 입헌군주제로 바뀌기 얼마 전이었다. 그가 살던 동안 태국은 피분 송크람과 사릿의 독재 아래 있었다. 냉전의 맥락과 흐름 속에서 초기에 정부 내 권력을 확립하지 못했던 송크람은 미국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강화했다. 송크람과 타나랏의 공통 의제는 반공이었다. 1958년 송크람 정권을 전복한 타나랏은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는 일에도 반공정책을 교묘히 이용했다. 


정부의 기조 아래서 공산주의는 불교와 왕조에 반하는 외래적 위협으로 여겨졌다. 이와 같은 담론은 당국에 수상한 자들을 재판 없이 구금할 수 있는 권력을 갖게 만들었다. 태국 공산당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리디 파놈용의 민간 정부 아래에서 잠시 동안 표현의 자유를 누리다가 또 다른 쿠데타의 발생으로 인해 지하 단체가 되었다. 물론 타나랏의 쿠데타 이전에 찟 푸미삭은 태국의 사회, 정치 생활을 장악했던 물질주의와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시와 기사를 여러 편 서술했다. 당연히 이와 같은 저술 활동은 1958년에서 1970년 사이 찟을 비롯한 좌파 언론인과 반 왕당파가 공산주의자나 공산주의 동조자라는 명목으로 체포, 투옥되는 빌미가 되었다. 레이놀즈가 지적했던 것과 같이 찟과 다른 좌파의 사상과 활동을 공산주의 외래 세력의 것이라고 몰아간 타나랏 정부의 시도는 그 사상과 활동의 위험성을 축소하고 태국의 실질적인 문제로부터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려는 방편이었다. 랏야오(Lard Yao) 교도소에서 찟은 스스로를 “정치 시인”으로 지칭하며 독재와 친 자본주의 체제에 맞선 정치적 각성을 촉구하는 시와 논고를 60편 이상 계속 서술했다. 


그는 교도소에서 여러 태국 공산당원을 알게 되었으며 그 인연으로 1965년 말 태국 공산당에 입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와 태국 공산당의 관계는 모호한 것이었다. 레이놀즈는 그 관계가 좋지 못했으며 태국 공산당이 찟의 사후에서야 입당을 인정했기 때문에 찟은 살아서 당원이 아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솜삭이 증언하기를 찟이 공산당을 위한 노래를 작곡하는 등 여러 가지로 당과 관련을 맺었고 여러 당 간부가 그를 잘 알았다고 주장하며 레이놀즈의 주장에 반론을 펼쳤다. 몇몇 태국 공산당원들은 찟의 가족과 가까웠으며 그로 인해 찟의 사후, 유고를 입수해 출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찟은 태국 공산당에 가입하기도 전에 공산주의자로 인정되어 공격을 받았으며 찟과 다른 수많은 이들을 공산당에 입당하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반공정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찟이 사망한 지 1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1973년 10월, 태국은 타논과 프라팟 독재 체제를 붕괴시키고 헌법 개정을 요구한 대중 봉기를 겪었다. 이 사건은 태국 정치사에서 최초로 대학생과 왕당파 대중이 이끈 민주화 운동이 승리한 일이었다. 그 후 태국은 민주주의가 성공한 몇 년을 보냈고 공산주의 운동은 태국 공산당에 의해 회복되었다. 


1970년대에 과두 체제 아래서 금지됐던 출판물이 복간되거나 재발행 됐다. <진정한 얼굴>, <‘정치 시인’의 시편과 문학 비평(Collected Poems and Literary Reviews by “Political-Poet”)>, <티파콘 : 예술가, 인민의 전사(Thiphakorn: Artist, Warrior of the People)> 등 찟의 문학 에세이 모음 등이 출간되었고 그 외에도 찟의 도발적인 작품들이 복간되고 숨겨졌던 그의 논문이 발견되어 공개되었다. 찟과 다른 마르크스주의자의 작품은 젊은 학생들 사이에서 널리 읽히고 재해석 되었으며, 이들은 그로부터 영감을 얻고 정치에 참여하고 민주주의를 요구할 각오를 다지게 된다. 청년들을 급진화 하려는 태국 공산당과 신(新) 좌파의 시도에는 도발적인 사회주의 서적의 출판 뿐 아니라 혁명 영웅의 신화를 만드는 과정도 있었다. 체 게바라가 가장 대표적인 일례로 당은 그를 무장투쟁에 동참한 지식인으로 널리 선전했다. 그러나 이후 외국인에서 태국인으로 초점을 옮겨 찟이 “인민의 전사”이자 애국자, 태국의 체 게바라로 알려진다. 그의 전기 뿐 아니라 그에 관한 노래와 시가 당시 여러 유명 예술가들로 인해 만들어졌다. 


1973년 10월에서 1976년 10월까지 태국 공산당이 선전을 전파하며 최전성기를 누리는 사이 학생들의 더해가는 급진주의를 좋지 않게 여기던 도시 중간 계급의 적대감도 역시 커져갔다. 이후 이 중간 계급은, 보수 지배층의 후원을 받아 새로 등장한 우파를 위한 사회적 단체가 되었고 그와 같은 긴장은 1976년 10월 6일 탐마삿(Thammasat) 대학교 학생 학살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학생 시위는 원래 전 총리 타놈이 망명에서 돌아오는 것을 반대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우익 정부와 민병대가 개입해 대학생 100명 이상이 대량 학살당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3,000명 이상이 체포되고 19명이 ‘폭동’과 국가, 종교, 왕가를 위험에 노출시킨 죄목으로 재판을 받았다. 그러한 결과로 인해 간신히 체포를 피한 학생 수천 명에게는 정글로 들어가 태국 공산당에 가입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어졌다. 태국 공산당과 10월 사건의 학생 운동은 어떠한 관계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태국 공산당이 도시 지역 학생들 사이에서 급진주의를 종식시키고 그들이 정글로 들어가 무장 투쟁에 가담하도록 이 시위를 이용했을 수 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 주장에 대해 확실한 근거는 없다.


학살의 직접적인 결과로 인해 태국 공산당은 수많은 학생을 입당시킬 수 있었으며 계속해서 찟에 관한 지하 서적을 출판하고 아사니 폴짠과 같은 다른 사회주의자와 찟을 ‘혁명가 영웅’으로 만들어 놓았다. 정글에서의 혁명에 관한 찟의 시와 옥중에서 만든 행진가는 나중에 청년들 사이에서 불리게 된다. 가장 잘 알려진 노래 <생다오 행 삿타(Sengdao Hang Satta)>는 독재 체제와 전투를 벌이고 사회주의적 애국심을 고취하고자 지하 운동에 뛰어든 청년들을 고무했다. 10월  사건 이후 정글의 태국 공산당에 입당한 학생들은 이미 전설적인 존재로 자리 잡은 찟에 대해 잘 알았기 때문에 그와 그의 작품에 대해 더 알기를 열망했다. 찟 푸미삭은 공산주의자이자 혁명가, 혹은 문화 영웅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여러 연구들에서 지적하는 것과 같이 찟의 내용이 태국 공산당원과 1970년대 좌파 활동가들에 의해 창조되고 윤색되고 재생산 되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 목적은 청년들을 당이 지도하는 무장 투쟁에 참여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고 죽음 10년 후에 만들어진 찟의 모습은 그의 정치사상을 이해하거나 물질화 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그의 삶과 의문의 죽음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다르게 말해서 태국 공산당은 젊은이들 사이에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전파하기보다는 영웅 만들기에 더 많은 노력을 했던 듯하다. 1976년 학생 봉기 및 학살 사건 이후, 태국의 정치 이념으로는 도시 기반 우익과 태국 공산당이 이끄는 정글을 기반으로 하는 좌익으로 양분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태국과 중국 정부의 동맹 및 학생 운동과 공산당의 핵심 인물 간의 분열 등 몇몇 요인 등으로 인해 태국 공산당은 좌파 지배층 사이에 인기를 잃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태국 학계에서는 마르크스주의 연구가 쇠락하고 민족주의와 공동체 연구와 같은 흐름이 부상했다. 이러한 변화는 태국 공산당에 가입한 적 없고 공산주의에 반감이 큰 또 다른 종류의 지식인들을 위한 통로를 연결해주었다. 이들은 혁명가로서 찟을 두고 평가하기를 태국 문학, 어원학, 역사를 주목한 학술 저작을 남긴 학자로 그 평가를 대체하고자 했다. 그 결과 이 시기에 일부 출판사와 학자들에 의해 찟의 작품 출판이 사회주의적 주제에서 언어학과 역사에 관한 다른 여러 주제로 옮겨가는 흐름이 만들어졌다. 달리 말해 태국 공산당의 몰락과 함께 찟의 이미지는 ‘탈급진화’ 탈정치화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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