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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오스만 가문의 발흥과 오스만 1세
  • 알렉세이정
  • 등록 2026-04-13 16:59:53

슐레이만 샤는 1214년 부친 카야 알프(Qaya Alf)에 이어 오구즈 족 아래의 카이으(Kaig)의 부족장이 되었고, 1220년 무렵 몽골과 호라즘 전쟁을 피해 5만에 달하는 투르크멘 족을 이끌고 서아시아로 이주하였다. 도중에 수천의 무리들이 에르진잔(Erchinjan)과 아흘라트(Ahlate)에 정착하였고, 또 다른 무리들은 자지라(Jajira) 지방에 정착하였다. 잔여 세력들과 함께 룸 셀주크의 영토로 향하려던 슐레이만 샤는 1227년 1월, 아유브 왕조의 영토인 라카(Raqa) 인근의 자바르(Jabar) 성채에서 사망하였다. 슐레이만 샤의 사후 카이으 부족은 슐레이만 샤의 장남 귄도두 베이(Gindoud Bey) 및 차남 순구르테긴 베이(Sungurtegin Bey)와 삼남 에르 투그룰(Ere Tugrul) 및 사남 뒨다르 베이(Dindar Bey)의 세력으로 분류되었다. 1,000명에 달하는 귄도두 베이와 순구르테긴 베이의 무리는 아흘라트를 거쳐 그들의 고향인 중앙아시아로 향하였고, 지금도 그 후손들은 투르크메니스탄에 살고 있으면서 투르크메니스탄의 주요 부족이 되고 있다. 에르 투그룰과 뒨다르 베이의 400여 무리들은 시바스를 거쳐 쇠위트로 향하게 되었고 이들은 오스만 베이 왕국을 이루었다.

터키 이스탄불 (당시 코스탄티니예)의 톱카프 궁전 앞에 예열한 오스만 관료들,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부친인 슐레이만 샤가 몽골 제국의 침입을 피해 서쪽으로 피난 오던 길에 시리아 북부에서 사망하자, 부족을 이끌고 아나톨리아에 도착한 에르 투그룰은 비잔틴 제국과 전투를 벌여 아나톨리아 중부의 카라자다그(Karacadağ)라는 산지에 봉토를 받고 베이가 되었다. 그 후 더욱 서진하여 쇠위트를 점령하였고, 베이들 중에서도 자치를 영위할 수 있는 변경백인 우츠 베이(Uç Bey)에 봉해졌다. 1230년에는 룸 셀주크의 술탄 카이쿠바드 1세(Kaiqubad I)의 휘하로 야스체멘(Yaschemen) 전투에 참전하여 호라즘 제국의 잘랄 웃 딘 밍부르누(Jalal Ab Din Mingburnu)와 맞서 전투를 벌여 승리에 크게 기여하였다. 에르 투그룰이 1281년 사망할 때까지 반세기 이상 룸 셀주크 술탄의 봉신으로 있었으나, 사후 그의 아들인 오스만 1세는 룸 셀주크 술탄 국이 와해되자 독립하여 이후 오스만 베이 왕국을 세우게 된다. 쇠위트에는 에르 투그룰의 영묘가 잘 보존되어 있다.


13세기 말, 소아시아 지역에서 패권을 가지고 있던 셀주크투르크가 서유럽의 십자군과의 연이어 벌어지는 전쟁과 결정적인 멸망의 원인이 된 몽골군의 서방 원정으로 몰락하면서 아나톨리아의 투르크계 민족들은 크고 작은 부족으로 분열되었다. 그 중 한 부족인 오구즈의 일파 카으 족의 족장 에르 투그룰 베이(Er Tugrul Bey)는 쇠위트 지역을 차지하고 세력을 기르고 있었다. 오스만은 에르 투그룰의 셋째 아들로 아버지가 사망한 후 1281년 24세의 나이에 부족장으로 추대되었다. 그의 이름 오스만은 이슬람교 남성들이 흔히 가지는 이름으로, 그 뜻은 ‘뼈를 부수는 자’라는 강한 힘을 의미했다. 그리고 맹금류 새인 콘도르(Condor)를 뜻한다고 한다. 그의 이름에서 유래한 콘도르는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자주권과 호전성을 뜻하는 상징이 되기도 한다. 오스만은 족장이 되면서 탁월한 지도력과 전투력을 보여주면서 소아시아의 맹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셀주크투르크가 멸망한 이후, 구심점을 잃고 방황하던 투르크족의 전사들은 세력이 급성장하던 오스만의 명성을 듣고 그의 수하로 모여 들었다.


오스만의 군대는 몽골군에 밀려 아나톨리아로 들어온 투르크 족의 이슬람 전사, 가지(Ghazi)와 인근의 여타 투르크 족 중 오스만의 명성을 듣고 온 모험가들로 인해 점점 세력이 강력해졌다. 아버지 에르 투그룰 시절부터 400기 이상의 기병을 보유한 강력한 군사 조직을 갖추고 있던 오스만의 군대는 그가 족장이 되면서 더욱 성장하게 된다. 그에 따라 오스만 가문과 군대의 유래와 정체성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하다. 그 중 셀주크투르크의 일파로 1077년부터 1307년까지 아나톨리아를 다스린 이슬람 왕조 룸 셀주크의 용병 집단이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룸 셀주크가 몽골군의 침입으로 점차로 약화되자 오스만의 가문도 독립해 독자적인 부족 국가를 이룩한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 에르 투그룰과 아들 오스만을 거치면서 그 세력이 점차로 강력해진 오스만의 군대는 아나톨리아의 기독교 세력이나 이슬람교 세력들과 경쟁하거나 협력하면서 점차 영토를 확대해 나갔다. 그리고 1299년경 마침내 왕국을 선언하고 오스만 1세로 등극했다. 당시 수도는 그의 고향인 쇠위트였다.


왕국을 건국한 이후, 오스만 1세는 비잔틴 제국과의 경계까지 영토를 넓혔으며, 1326년 비잔틴 도시인 부르사(Bursa)를 공략하여 아나톨리아 전역을 통일하였다. 부르사는 그의 사후 아들 오르한 가지에 의해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두 번째 수도가 되었다. 왕국을 건국한 이후의 오스만 1세는 군사적인 면 뿐만 아니라 행정적, 정치적 면에서도 제국으로 가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는 밀레(Millet)로 알려진 종교적, 민족적 소수 집단의 자치구를 설정하여 효율적인 국정을 가능하게 했다. 오스만 1세가 만든 이 제도들은 매우 체계적이어서 이후 약 4세기 동안 큰 변화 없이 오스만투르크 제국 내에서 그대로 유지되었다. 오스만투르크의 건국과 국가의 성장에는 몇 가지 역사적, 지리적 상황도 도움을 주었다. 몽골의 서방 원정과 그로 인한 셀주크투르크의 몰락, 구심점을 잃은 투르크족의 방황 및 비잔틴 제국의 약화는 용맹스러운 전사 집단이었던 오스만과 그를 따르는 이슬람 전사(가지)들에게 새로운 왕국을 열고 성장시킬 기회를 주었다.


방황하던 투르크 족은 혁혁한 전과를 세우며 비잔틴 제국과 맞서는 오스만을 구심점으로 지하드, 이슬람의 성전을 치르기 위해 속속히 집결하여 그의 세력을 강하게 만들었다. 결국 오스만 세력의 성장과 반비례하여 점차로 몰락의 상황에 있던 비잔틴 제국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에게 지중해의 지배권을 내주게 되었다. 13세기에 오스만 1세에 의해 세워진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20세기 초까지 600년간 존속하였다. 이러한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발전과 번영은 건국자 오스만 1세가 그의 꿈속에서 이미 예언을 받은 일이었다고 한다. 오스만 1세는 매우 독실한 무슬림이었다. 그는 족장이 되기 전 젊은 시절 이슬람교의 성자를 찾아다니며 가르침을 받았다. 그 중 그가 스승으로 모신 사람은 셰이크 에데바리(Sheik Edebali)라는 이슬람교의 지도자였다. 에데바리에게는 아름다운 딸이 있었는데 말 하툰(Mal Hatun)이라고 하였다. 말 하툰의 외모와 성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 그녀가 매우 아름답고 육감적인 외모의 소유자였다는 이야기도 있고 한편에서는 종교적으로 성녀와 같은 품성과 성스러운 외모를 가진 신화의 여신과도 같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어떤 형의 외모를 가지고 있었던 미녀였던 것만은 확실한 듯하다. 


오스만은 스승의 아름다운 딸에게 한 눈에 반했고 그녀에게 청혼하였다. 그러나 스승은 신분의 차이를 들어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하였다. 존경하는 스승의 명을 어길 수 없었던 오스만은 상심에 빠지게 된다. 그 사이 말 하툰의 미모에 대한 소문은 다른 부족에게도 퍼져 나가 많은 구혼자가 있었다. 오스만은 말 하툰의 구혼자들과 경쟁하여 이겼지만 정작 스승의 결혼 승낙은 계속 받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와 같이 2년 여 세월을 보내며 스승에 대한 존경과 말 하툰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며 상사병에 걸려 있던 오스만은 어느 날 친지의 집에서 잠시 잠이 들었다가 꿈을 꾸었다. 그 꿈에서 그는 스승 에데바리와 함께 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에데바리의 가슴에서 달이 튀어 나와 오스만의 가슴으로 들어와 잠겼다고 한다. 이는 이슬람의 유명한 전승인 이 이야기에서 달의 모양은 반달이었다고도 하고 보름달이었다고도 한다. 달이 잠기고 잠시 후 오스만의 가슴에서 아름답고 커다란 나무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나무는 점점 자라나 큰 나무 그늘이 생겼으며 그 그늘은 온 세계를 덮었다. 나무 아래 세계의 산맥이 생기고 강이 흘렀으며 사람들은 나무 그늘에서 혜택을 얻고 즐거워했다.


오스만은 자신의 꿈 이야기를 스승 에데바리에게 했다. 에데바리는 오스만의 꿈 이야기에 나온 달이 자신의 딸 말 하툰임을 깨닫게 된다. 꿈이 오스만와 말 하툰이 결합하여 후손을 낳으면 그 후손들이 알라의 가호 아래 번영하는 대제국을 경영할 것을 예언한다는 것을 파악한 것이다. 오스만의 꿈은 그와 말 하툰의 후손들이 가질 영광과 힘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이는 말 하툰과 결합한 오스만이 세울 국가의 미래를 알려주는 꿈이었다. 에데바리는 오스만의 꿈 이야기를 듣고 오랫동안 허락하지 않았던 딸 말 하툰과의 결혼을 승낙했다. 오스만은 매우 원했던 여인과 결혼하였고 그의 꿈이 예언한 대로 향후 600년간 존속할 나라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세웠다.


왕국을 건국한 오스만 1세에게는 몇 가지 선택이 있었다. 소아시아의 내륙으로 들어가 투르크 족을 통합하여 영토를 확장할 것인지와 지중해 쪽으로 비잔틴 제국의 영토를 공격할 것인가의 귀로에서 그는 후자를 선택했다. 비잔틴 제국과의 전투는 투르크 족의 통합보다 더욱 어려운 전쟁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미래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전쟁이었다. 오스만 1세의 선택은 탁월했다. 비잔틴 제국에 대한 공격은 두 가지의 선택을 모두 장악하는 전략이었다. 비잔틴 제국과 전쟁을 치르는 동안 강해진 오스만의 세력권 내로 여타 투르크 족은 별 어려움 없이 병합되었다. 그리고 오스만 1세가 시작한 비잔틴 제국에 대한 공략은 후일 그의 후손 메흐메트 2세가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켰고 이후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그 곳은 현재 터키의 이스탄불로 당시 오스만은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는 또 다른 세계 대제국의 탄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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