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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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 26일, 서아프리카의 소국이자 최빈국 중 하나인 기니비사우에서 쿠데타가 발생했다. 기니비사우에서의 쿠데타는 서아프리카 프랑스 영향권에 속해 있는 국가들에게 큰 영향을 받게 된다. 이미 앞서 말리와 니제르, 부르키나파소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정부가 교체되면서 이들의 영토에서 자원을 뽑아가던 프랑스의 영향력이 축소되었고, 그나마 남아있던 서아프리카 국가들에게도 이는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 이웃 국가인 세네갈에 미치는 파장은 크다. 그런데 기니비사우는 과거 프랑스의 식민지가 아닌 포르투갈의 식민지였고, 지금도 공용어로 포르투갈어를 쓰고 있다. 15세기 중반 포르투갈의 아폰수 5세는 엔리케 왕자에게 해양 탐사를 지시했고, 그로 인해 1440년대에 들어서 흑인 노예무역과 금 거래가 시작되었다. 1419년 포르투갈 남단 알가르베(Algarbe) 주의 총독이 된 엔리케는 사그레스(Sagres) 곶에 항해 연구소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식민화 활동에 나섰는데 곤살베스(Godalbes)와 트리스탕(Tristang)에 의해 포르투산투(Portudantu) 섬을 포함한 마데이라(Madeira) 제도가 처음으로 발견되었고 오늘날의 기니비사우가 발견되며 이 지역들은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된다.

기니비사우의 수도 비사우의 풍경, 출처 : AP, By ASSANA SAMBU and MARK BANCHEREAU
그러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범아프리카 민족주의가 퍼지게 되면서 그 영향으로 인해 아프리카 각국이 독립했다. 따라서 식민지 독립 운동의 분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했고 1956년에 독립운동 단체인 기니 카보베르데 독립아프리카 당(PAIGC)이 결성되어 1963년부터 PAIGC의 지도자였던 아밀카르 카브랄(Amílcar Cabral, 1924~1973)이 바다 건너 포르투갈의 식민지 해외령이였던 카보베르데의 독립운동가였던 아리스티드스 페레이라(Aristides Maria Pereira) 등과 함께 대포르투갈 무장 투쟁을 전개하면서 장기간에 걸친 독립전쟁이 발생한다. 같은 시기였던 1960, 1970년대에는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식민지였던 앙골라, 모잠비크와 함께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의 3대 전선이 되었고, 소련의 지지와 지원을 받게 된다. 본래 이들은 평화적으로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하려 했으나, 1959년 피지기티 학살(Massacre de Pidjiguiti)이 발생하면서 이를 계기로 하여 무장 투쟁 노선으로 전환하게 된다. 그러나 이후, 포르투갈은 PAIGC가 그다지 중대한 위협이 된다는 것을 몰랐고, 후일 이를 파악했을 때는 매우 늦었기 때문에 포르투갈 정부의 방관과 소련의 지원은 PAIGC가 세력을 키울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따라서 대포르투갈 독립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에 앙골라와 모잠비크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지원해 주는 등 포르투갈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지만,그들과 달리 기니비사우는 이미 포르투갈이 열세에 놓인 상태였기 때문에 영토의 3분의 2를 PAIGC가 점령했다. 이후 1972년에는 PAIGC의 통치 지역에서만 선거가 실시되는 등, 이 지역은 국가 기능을 점진적으로 수행했다. 그러다가 1974년에 포르투갈의 카네이션 혁명과 식민지 통치 종료 선언으로 인해 기니비사우는 마침내 독립을 쟁취하게 된다. 독립 이후에는 소련과 같이 일당제 체제를 나타내게 되었는데 전권을 장악한 측은 기니비사우 공산당으로 좌파 정권이었다. 그러한 도중에 1980년에 쿠데타가 발생하자, 카보베르데 아프리카 독립당은 따로 떨어져 나가면서 카보베르데와의 통합 논의는 완전히 무산되었다. 1991년에 일당제 체제를 폐지하고 현재 헌법으로 바꾸게 되면서 다당제 체제로 바뀌었고, PAIGC는 1994년에 대선과 총선에서 집권 여당이 되었다. 그러나 1999년 총선에는 의회에서 제3당으로 몰락하게 된다.
기니비사우는 유럽의 식민 지배에서 독립한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들이 그러하듯이, 독립 이후에 무수한 쿠데타에 시달리게 된다. 기니비사우의 2대 대통령인 주앙 베르나르두 비에이라(João Bernardo Vieira, 1939~2009)는 초대 대통령이자 기니비사우의 국부인 루이스 카브랄(Luís Cabral, 1931~2009)을 쿠데타로 축출했다. 주앙 비에이라 대통령은 철저한 사회주의자로 소련의 막대한 지원를 받았다. 주로 쿠바와 소련으로부터 군사지원을 받았으며 현재도 기니비사우의 무장은 구소련제 무기로 주력화되어있다. 현재까지 T-34-85를 운영하고 있는 국가 중 하나로 약간 노후화 되어 있지만 주앙 비에이라 대통령이 통치하던 80년대는 그마저도 나은 무기였다. 주앙 비에이라 정권이 집권한지 18년째 되던 해, 1998년 6월 7일, 비에이라 정권에 불만을 품은 군 참모총장 안수마느 마네(Ansumane Mané, 1940~2000)가 반란을 일으켰고, 이들은 세네갈 국경 일대에서 활동하면서 정부군과 게릴라전을 벌인다. 이와 같은 기니비사우 내전은 마네의 반군이 세네갈의 적극 지원을 받으면서 더욱 격심해졌다. 참고로 세네갈의 배후에는 프랑스가 있다. 실질적으로 프랑스가 기니비사우의 반군을 도왔던 셈이다.
내전 사망자는 655명으로 비교적 적은 편이었으나, 인구가 120만 명 정도이던 나라에서 무려 350,000명에 달하는 난민이 발생했고 이 난민들 대부분은 세네갈과 남쪽의 기니 공화국으로 흘러 들어가 사회 문제가 되었다. 이후 내전은 1999년 5월 10일에 종결되었으나 내전 발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비에이라가 하야하면서 사회주의 세력이 주도하던 시대가 끝나게 된다. 이처럼 쿠데타와 내전의 역사가 반복되면서 마약 밀매 거점 국가로 전락해버렸다. 세네갈 출신 난민들도 기니비사우에 거주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이지리아 조직에서부터 들어오는 다량의 코카인이 세네갈 출신 난민들로 인해 기니비사우에 유입되었고 이는 인근 국가인 부르키나파소와 말리, 북쪽으로는 모로코까지 흘러 들어가 엄청난 사회 문제를 야기했다. 기니비사우군과 경찰이 총동원되어 코카인 밀매단들과 전쟁을 선포했지만, 군과 경찰, 코카인 밀매단들과의 사이에 부정부패가 심해 코카인 근절이 쉽지 않다. 한편 마침 기니비사우를 지원하던 소련이 1990년에 붕괴되고, 러시아가 엄청난 경제 침체를 겪게 됨에 따라 기니비사우를 도울 수가 없었고, 친프랑스계인 쿰바 얄라(Kumba Yalá, 1953~2014)가 대통령이 되면서 프랑스 세력이 사실상 기니비사우를 접수한 격이 되었다.
그러나 2003년에 군 참모총장이었던 베리시무 코헤이아 세아브라(Veríssimo Correia Seabra, 1947~2004)가 쿠데타를 일으켜 쿰바 얄라(Kumba Yalá) 대통령을 축출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자크 시라크(Jacques Chirac) 대통령의 지원을 받은 주앙 비에이라가 세아브라를 타도하고 다시 대통령이 된다. 때마침 2005년 2월 5일 토고의 지도자 냐싱베 에야데마의 사후, 시라크는 그를 추모하고 부친을 승계할 그의 아들 포르 냐싱베를 지지했다. 그러면서 기니비사우 비에이라의 복귀를 돕게 되는데 이는 프랑스의 안방이나 다름없는 서아프리카 지역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조처였다. 그러나 비에이라는 재집권한지 4년도 채 안 되어 2009년 3월 2일에 자택에서 원인모를 폭탄테러로 인해 암살당하게 되었고, 기니비사우의 정국은 더욱 더 안갯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비에이라가 암살당한 이후, 라이문두 페레이라(Raimundo Pereira)의 권한 대행을 거쳐 말람 바카이 사나(Malam Bacai Sanhá)가 2009년부터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그러나 사나 대통령은 건강이 그리 좋지 않았다. 평소 당뇨를 앓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시력을 잃고 있었다. 2012년 1월 9일에 프랑스 파리의 병원으로 실려갔지만 끝내 숨졌다.
기니비사우는 페레이라와 마마두 투르 쿠루마(Mamadou Touré Kuruma), 마누엘 세리푸 냐마조(Manuel Serifu Nyamazo)가 대행을 맡았다. 특히 페레이나 대행은 평화유지군으로 와 있는 앙골라군과 유착하여 군 개혁을 단행해 쿠데타를 방지하고자 했다. 당시 앙골라군은 600여 명이 있었기에 이같은 군 개혁이 가능하다 보았다. 그러나 이를 파악하고 있었던 기니비사우군 지도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 결선 투표에서 당선이 유력한 카를로스 고메스 주니어(Carlos Gomes Júnior) 전 총리와 레이문도 페레이라 과도수반을 체포했다. 이어 군은 기존 정부기관을 해산하고 정권을 장악했으며 야당과 함께 통치기구로 국가과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이에 따라 기니비사우는 아프리카 연합(African Union) 회원국 자격이 정지되었고, 서부 아프리카 15개국으로 구성된 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ECOWAS)는 기니비사우 군부와 계속 접촉해 고메스 전 총리 등 구금된 정치인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한편 평화유지군 병력 70명이 도착하자, 군부는 대통령 선거의 유력 후보였던 카를로스 고메스 주니어와 페레이라 대행을 석방했으며 고메스와 페레이라는 코트디부아르로 임시로 망명했다
프랑스의 영향력을 강력히 받고 있는 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ECOWAS)의 70여 명의 평화유지군은 선거가 안정적으로 치뤄질 수 있도록 도왔고, 여기에 조제 마리우 바즈(José Mário Vaz)가 당선되었다. 그리고 여기에 2025년 군부 쿠데타로 축출당한 문제의 인물인 우마로 시스코 엠발로(Umaro Sissoco Embaló)를 총리에 올려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