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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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중후반에 만연한 아랍 사회주의(Arab socialism)는 범아랍주의(Pan-Arabism)라는 민족주의에 기반한 사회주의 이념으로 통칭된다. 이러한 아랍 사회주의자들은 아랍 지역의 주류 좌파 세력들로 알려져 있다. 반대로 주류 우파 세력은 걸프 이슬람주의(Gulf Islamism)으로 원리주의 이슬람과 아랍 민족주의가 혼합한 이념이다. 20세기 중반에 아랍 지역에서 이집트가 제4차 중동전쟁 때 생각 외로 선전했었고 프랑스로부터 알제리가 독립하면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소련이 붕괴된 이후 아랍 사회주의는 큰 타격을 받아 쇠퇴하면서 그 정체성을 이슬람 종교주의로 바꾸어 현재까지 혼용으로 남아있다. 이와 같은 아랍 사회주의는 20세기 중반 이후 크게 2개의 형태 및 체계로 나뉘는데 정통 아랍 사회주의적 성향의 나세르주의(Nasserism)와 나세르주의에서 갈라진 일파인 카다피주의(Gaddafism), 그리고 중동 지역의 민족주의와 결합되어 반 제국주의의 성향과 아랍 사회주의 성향이 혼용된 형태로 드러낸 바트주의(Ba'athism)가 존재하고 있다. 주로 나세르주의나 카다피주의는 북아프리카에서 유행했고, 바트주의는 중동 지역에서 대체로 유지되었다. 특히 이라크에서 유행했는데 이라크 인구의 20% 정도를 차지하는 수니파 아랍인과 프랑스 식민 지배 시기부터 권력을 쟁취하여 종교적 소수자로 머물러 있다가 실세가 된 시리아의 알라위파는 자신들의 입지를 상호 보완, 강화하기 위해 바트당을 중심으로 아랍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하여 유지했다.

하산 알 바크르와 사담 후세인, 출처 : Wikipedia, Ahmad Hassan al-Bakr
이러한 바트주의는 정통 사회주의가 아닌 극우 민족주의, 혹은 파시즘에 가깝다는 평가를 하기도 하는데 일단 이는 종교적인 부분을 철저히 배제했다. 사회주의는 종교와 극과 극으로 상극인 이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동 지역의 바트주의의 선구자는 미셸 아플라크(Michel Aflaq)라는 인물이다. 그는 바트주의를 창시한 인물로, 본래 무슬림이 아닌 시리아 정교회 신자였다. 그는 아랍계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아랍 무슬림과 아랍계 기독교인은 모두 민족주의를 통해 서구 제국주의의 침탈에 맞서 단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예언자 무함마드는 아랍 민족주의의 영웅이라 해석했다. 이는 종교적인 관점에서의 무함마드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민족적, 정치적인 관점에서의 무함마드를 바라본 것이다. 이는 무함마드가 단순한 종교지도자가 아닌, 이슬람을 통치한 정치적 지도자라는 것에 더 무게를 두었다. 단순히 종교 지도자로만 이전에 해석되어 왔던 것을 그가 아라비아 반도를 어떻게 통치했고, 아랍 민족을 어떻게 통합시켰는지에 대해 주목한 것이다. 이런 관점은 종교를 초월한 통합의 지도자로써 무함마드가 등장하게 되니 근대적 의미의 아랍 민족주의는 이렇게 통합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무함마드는 아랍 민족 통합의 상징으로 등장했다. 이런 미셸 아플라크(Michel Aflaq)의 영향을 크게 감화되었던 인물이 바로 오늘 소개할 아흐마드 하산 알 바크르(Ahmad Hassan al-Bakr)이다. 하산 알 바크르는 1914년 오스만투르크 제국령 티크리트(Tikrit)에서 태어났다.
사실 하산 알 바크르의 경우, 아버지가 아랍인이고, 어머니가 쿠르드족이다. 그의 고향인 티크리트(Tikrit)는 쿠르드족의 역사적 영웅이자 1187년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 군대와 함께 십자군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을 탈환한 살라딘(Saladin)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로 티크리트는 반 서구, 반 제국주의의 성향이 강하며, 서구 제국주의를 또 다른 십자군의 형태로 인식했다. 하산 알 바크르 또한 그런 배경에서 성장했고, 사담 후세인 또한 이곳이 고향이라 하산 알 바크르와 동향이기도 하면서 그와 같은 반 서구, 반 제국주의의 성향의 배경에서 성장했다. 하산 알 바크르는 터키어와 아랍어, 페르시아어에 능숙했기에 그는 이 지역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지역 주민들에게 민족주의를 가르쳤다. 그는 1938년 고향인 티크리트를 떠나 바그다드로 들어가 이라크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는 당시 이라크를 지배하고 있던 영국에 대한 큰 반감을 갖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국왕이었던 가지 1세가 암살과 비슷한 사고로 미스테리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 때 이라크는 친영 세력과 반영 세력으로 분리된 채,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당시 가지 1세 이후에 승계한 파이살 2세의 나이가 4세에 불과했기에, 그를 압둘 알 일라(Abdul al-Ilah)가 섭정하고 있었고, 그는 친영 세력을 대표했던 인물이었다. 반영 세력은 이라크의 총리였던 라시드 알리 알 가일라니(Rashid Ali Al Ghailani)가 이끌고 있었고 그는 군부를 장악하고 있었다.
알 일라는 연합국의 병력이 이라크를 통과할 수 있도록 군사통행권을 허가했지만, 민족주의자 총리 알 가일라니는 이를 거부했고, 나치 독일을 지지했다. 그러자 이라크는 영국의 강력한 경제 제재를 받게 된다. 한편, 북아프리카에서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연합군이 패배하고 있다는 소식은 가일라니의 지지율을 하락시켰고, 이를 이용해 압둘 알-일라 섭정은 알 가일라니의 퇴임을 요구했다. 그러자 알 가일라니는 섭정을 암살하고 권력을 탈환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압둘 알-일라 섭정은 자신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빠르게 알아채고 이라크를 탈출했으며 1941년 4월 1일, 가일라니는 그의 지지자들과 하산 알 바크르와 함께 쿠데타를 일으킨다. 알 가일라니는 국가 방위 정부를 설립하고, 섭정이 주도하면서 돌아가던 국가를, 총리의 주도 체제로 바꾸었다. 그리고 이라크에 존재하던 영국군의 기지에 대한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이라크-영국 전쟁이 발발한다. 그러나 전력에서 영국에게 전혀 상대가 되지 않은 이라크군은 크게 밀리게 되었고, 결국 알 가일라니는 이란으로 망명했다. 이와 함께 하산 알 바크르 또한 바그다드에서 체포되었으며 군에서 추방되었다. 이후 그는 15년 동안 자신의 복권을 시도한 끝에 1956년에 군에 복귀했다. 그리고 같은 해 미셸 아플라크(Michel Aflaq)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아랍 사회주의 바트당(Arab Socialist Baath Party)에 가입하게 된다.
1957년 군에 있으면서 하산 알 바크르는 준장으로 승진했고 군내 사회주의 조직인 자유장교운동과 협력했다. 이 때 자유장교운동의 지도자격 인물은 바로 압둘 카림 카심(Abdul Karim Qasim)이었다. 1958년 7월 14일, 자유장교운동 조직은 마침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하심 왕조를 전복시켰다. 압둘 카림 카심(Abdul Karim Qasim)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정권의 등장은 이라크 뿐 아니라 중동 전 지역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다. 이에 큰 영향을 받은 국가가 같은 바트주의를 갖고 있던 시리아다. 카림 카심은 이 시기에 중앙 조약 기구(Central Treaty Organization)를 탈퇴했으며 소련과 관계 개선에 나섰다. 당시 이라크 내에서는 나세르주의자들이 많았는데 이들의 대부분은 쿠르드족이 연관되어 있었다. 그러면서 1959년 3월, 나세르주의를 지지하는 군 장교들과 쿠르드 민주당이 카림 카심 정권에 반기를 들었다. 모술 주둔군 사령관인 아브드 알 와하브 알 샤와프(Abdel Wahab al-Shawwaf)는 다수의 쿠르드족을 이끌고, 나세르주의자들과 합류하여 사회주의에 대해 반기를 들었지만 반란은 이라크 정부군에 의해 신속히 진압되었다. 하산 알 바크르는 이 때, 모친이 쿠르드족이기에 반란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아 다시 군에서 퇴출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모함을 받던 시기에도 하산 알 바크르는 바트당 내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했다. 그리고 1950년대 후반부터 동향 후배인 사담 후세인을 만나 관계를 구축했다.
1962년 바트당의 지도자인 알리 살리흐 알 사디(Ali Salih al-Sa'di)는 카심 정권에 대해 반발하여 전국적 반정부 시위를 주도했다. 그는 철저한 반서방, 반미 감정을 갖고 있던 인물로, 카림 카심 정권이 취하고 있던 중립 외교관과 친미 성향에 대해 심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 알리 알 사디는 1963년에는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쿠데타를 계획했다. 여기에 하산 알 바크르는 이라크 군의 실권을 가진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군 내부 지지 세력을 구축하면서 쿠데타의 기반을 마련했다. 그리고 하산 알 바크르가 조직한 이 군 조직이 중심이 되어 1963년 2월 라마단 혁명이라 일컬어지는 쿠데타를 성공시켜 카림 카심 정권을 축출하는데 성공했다. 라마단 혁명 이후, 압둘 살람 아리프(Abdul Salam Arif)가 대통령, 하산 알 바크르가 총리 겸 부통령으로 임명되었다. 압둘 아리프의 새 정권에서는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급진적 군인들과 비(非) 바트주의 인사들을 포용하자고 주장하는 온건주의로 나뉘어 두 파벌이 형성된다.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급진적 군인들은 알리 알 사디가 지도자로 이끌었고, 온건주의는 하산 알 바크르와 사담 후세인이 이끌었다. 압둘 아리프 대통령은 양측을 조율하여 어느 정도 통합을 이끌어 내려 했지만 당내 분열이 더더욱 심화되자 결국 1963년 11월 압둘 아리프는 군을 동원해 바트당 당사를 장악하고 관련 수장들을 모두 투옥시켰다. 이 때 알리 알 사디는 체포되기 전, 이라크를 탈출하여 시리아로 망명했다.
한편 하산 알 바크르는 수감되었지만, 이후 바트당 내에서 그의 영향력은 오히려 더 강화되었다. 그는 석방된 이후, 이라크 바트당 지역 사무국의 사무총장이 되었고, 사담 후세인과 긴밀하게 협력하면서 당시만 해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사담 후세인은 이 시기에 당 보안기구를 조직해 자신의 권력 기반을 다졌으며, 하산 알 바크르는 자신의 고향인 티크리트 출신 인물들과 가족을 중용하여 사실상 인맥 중심의 인사 정책을 주도했다. 그런데 압둘 아레프는 이집트와 관계를 강화하면서 나세르주의자들을 기용하자 하산 알 바크르와 사담 후세인은 이에 반발했고, 또 다시 쿠데타가 발생할 것을 우려한 압둘 아레프는 알 바크르와 사담 후세인을 체포해 2년 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1965년 사담 후세인이 가석방 형식으로 먼저 출소하면서 바트당의 부 사무총장으로 임명되어 바트당을 재건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하산 알 바크르보다 사담 후세인이 먼저 출소한 사건은 사담 후세인이 자신의 권력 기반을 바트당에 두고 이를 매우 강고히 구축하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같은 해, 시리아의 바트당이 분열하게 되면서 이라크 바트당은 독자적인 노선을 수립하게 되었고, 하산 알 바크르는 1966년에 출소했다. 1968년 2월 제9차 당 대회에서 바트주의 & 바트당의 대부인 미셸 아플라크(Michel Aflaq)를 영입하여 당 총서기로 선출했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하산 알 바크르는 쿠데타를 주도하여 압둘 아리프 대통령을 축출하고 바트당 정권을 재수립하게 된다.
바트당 정권 초기에는 군부의 인사였던 압드 알라자크 알나이프(Abd Al-Razak Al-Naif) 총리와 이브라힘 다우드(Ibrahim Dawood) 국방 장관에게 실권을 넘겼지만, 이미 당내에서 최고 실세가 된 하산 알 바크르는 정치적 수완과 당 조직력으로 그들의 권력을 제압했으며 1968년 7월 30일 수정 쿠데타를 일으켜 두 사람을 모두 축출하고 추방시켰다. 이후 하산 알 바크르는 대통령이 되면서 총리와 혁명사령위원회 의장직까지 모두 겸임하여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고 독재 정치의 기반을 갖추게 된다. 이어 티그리트 동향 출신 후배인 하르단 알 티크리티(Hardan al-Tikriti)를 국방장관 겸 부총리로 임명했다. 대통령이 된 하산 알 바크르와 바트당은 급진적인 사회주의 정책을 내세웠지만 실제로 펼친 정책은 국민들에 대한 포퓰리즘과 티그리트 지역의 인사들을 중심으로 한 족벌주의 정치였다. 사담 후세인도 하산 알 바크르, 하르단 알 티크리티와 동향이었지만 하르단은 사담 후세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워낙 사담 후세인의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하르단은 이를 경계했고, 하산 알 바크르에게 건의해 후세인을 추방해 버렸다. 그러나 후세인은 일주일만에 돌아와 하르단이 대통령 자리를 노리고 있다고 알 바크르를 설득해 결국, 하르단은 이라크 국방부 장관과 부총리직에 해임되었다. 이어 1970년대 후반부터 사담 후세인이 경제 정책의 실권을 장악하면서 국가 주도의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더욱 강화되었다.
이어 사담 후세인은 산업의 다각화를 추진하여 석유 의존도를 줄이려 했다. 1969년에 정부는 몰수된 토지에 대한 보상을 취소하면서 농업 투자 정책을 확대했고, 1970년에는 새로운 토지 개혁을 시행하여 협동 조합을 설립하도록 만들었는데, 농민들은 보조금을 받으려면 협동 조합에 가입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이러한 토지 개혁은 식량 생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토지와 보조금 배분이 정치적인 충성 확보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이는 현 베네수엘라 마두로 정권과 유사한 부분이라 볼 수 있다. 그로 인해 부패와 불평등은 이전보다 훨씬 더 심화되었다. 하지만 이라크 석유회사를 국영화함으로 인해 막대한 보조금을 국민들에게 지급함으로 인해 국민들의 불만을 일시 완화시켰다. 특히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이후 석유 가격이 급등하면서, 하산 알 바크르는 경기 침체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으며, 석유로 얻은 수익금의 대부분을 대규모 인프라 사업에 치중하여 시골 곳곳에 전기가 들어오고, 무상 의료 및 무상 교육이 전면적으로 시행되었다. 따라서 이라크의 의료 수준이 한 때 중동 최고 수준이라고 평가받았다. 이에 결과로 1970년대 이라크는 연평균 11.7%의 고도의 경제성장을 달성했다. 더불어 자동차와 TV, 전화가 대중화 될 정도로 국민들의 생활 수준은 크게 향상되었다. 필자는 이 때가 이라크의 최전성기인 것으로 본다.
그로 인해 하산 알 바크르는 현대 이라크에서 평가가 매우 좋은 대통령으로 인식되고 있다. 물론 이 시기에도 쿠르드족과의 갈등 및 쿠웨이트와의 국경 분쟁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전과 이후를 비교해 보면 정국의 혼란과 전쟁이 없었으며 그의 집권 시기는 잦은 쿠데타로 점철되던 이전 시기와 비교해 볼 때, 매우 안정적이었다. 게다가 외교에서도 반미, 반서방 전선이 주류를 이룰 것이라는 예측과 다르게 아랍권 및 서방 선진국들하고도 관계가 좋았고, 소련과 유고슬라비아와의 관계도 매우 긴밀했다. 그는 석유 국유화를 단행하여 얻은 수익을 기반으로 연평균 10%대의 고도의 경제성장을 기록했는데 물론 이 시기가 고유가라는 시대를 잘 만난 부분도 존재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도시는 물론 시골에서도 인프라 공사가 성공적으로 이어지고, 무상 교육 및 무상 의료도 실현되었으며 중공업을 육성하기 위해 산업화에도 열을 올렸던 시기였다. 그래서 이 당시에는 조만간 이라크가 선진국으로 진입할 것이라는 전망도 많았다고 한다. 이 때만큼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 시대와 압바스 왕조 시대의 영광을 재현할 것이라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였다. 이 시기에 이라크 인프라 건설 붐이 일어 우리 대한민국에서 많은 젊은 노동자들이 달러를 벌기 위해 이라크에 와서 토목 공사에 참여했고, 우리 기술자들로 인해 이라크의 인프라는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다. 하산 알 바크르의 집권 시기는 우리 대한민국 건설 노동자들의 피와 땀, 헌신이 있었기에 선진국과 비슷한 수준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친소와 같은 공산주의 체제보다 미국 및 서방과의 관계를 더 중요시 했던 사담 후세인으로 인해 하산 알 바크르의 세력은 점차 축소되어 갔고, 미국 CIA가 사담 후세인을 적극 지원했다. 사담 후세인은 CIA의 지원을 등에 업고 안보 기관을 통해 바트당과 국가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했다. 결국 1979년 하산 알 바크르는 "건강상의 이유"로 모든 공직에서 사임하면서 사담 후세인에게 권좌를 이양했고, 3년 뒤인 1982년에 갑자기 사망했는데 하산 알 바크르의 죽음에는 CIA가 관련되어 있다는 설이 매우 유력하다. 이란 측 정치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하산 알 바크르의 죽음에 사담 후세인이 관련되어 있고, 그 배경에는 CIA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