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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아인과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관계 - 이란의 조상은 누구인가?
  • 알렉세이정
  • 등록 2026-04-13 18:17:15

아케메네스 왕가와 괸련된 역사는 주로 헤로도토스, 크테시아스, 크세노폰과 같은 그리스의 역사가들과, 히브리어 성경, 그리고 이에 따른 유대교 문서들, 현지 이란인들의 자료들을 통해서 알려졌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아케메네스 왕조는 파사르가다에(Pasargadae)의 부족의 씨족으로 아마도 파사르가다에의 주변에 정착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들은 B.C 9세기에 다른 페르시아 부족들을 지배했을 수도 있다. 이후 아케메네스의 뒤를 이어 즉위한 다리우스 1세는 하사마니스(Haxāmaniš)에 이름을 따서 명명하고 있었던 알려지지 않은 혈통인 아케메네스로 그의 족보를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아케메네스라고 불리는 왕에 대한 기록은 상당수 사라지고 없다. 아케메네스는 페르시아 제국을 통치한 아케메네스 왕조의 공통 조상으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가 아케메네스 왕조의 공통 조상이라는 것 외에는 그의 삶에 대해 많은 것들이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아케메네스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시조로만 알려진 실존하지 않는 전설적 존재일 수도 있고, 역사에 존재하는 인물이라면 B.C 8세기 후반과 B.C 7세기 초반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란 시라즈 페르세폴리스 유적에서 발굴된 페르시아의 샤한 샤 석각,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다만 아케메네스가 실존 인물이라는 것에 대해 베히스툰 비문을 비롯하여 헤로도토스, 크테시아스, 크세노폰과 같은 그리스의 역사가들의 기록들을 중심으로 언급하고자 한다. 우선 아케메네스의 뜻을 보자면 유럽에서 쓰이는 명칭인 '아케메네스', 그리고 베히스툰 비문에 표시된 아카드어 Aḫamaniišʾ에서 유래하고 있다. 그의 고대 페르시아어 이름은 전통적으로 “친구”라는 뜻의 Haxā-와 '생각하는 힘'이라는 뜻의 Manah으로부터 유래되어 '친구의 마음을 가진 사람'을 의미한다. 최근의 해석은 Haxā-를 '추종자, 지지자'로 해석하며 '추종자들의 영혼이 깃든 사람'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현대 페르시아어로는 هخامنش (Haxâmaneš)로 사용되고 있다. 베히스툰 비문에서 다리우스 1세는 아케네메스를 테이스페스의 아버지, 그리고 키루스 2세와 다리우스 1세의 선조로 묘사하고 있다. B.C 5세기 중반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는 베히스툰 비문과 비슷한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키루스 2세와 다리우스 1세를 합쳐서 설명한다. 원시적 자료들과 역사적 기록에서는 그에 대한 짧은 설명만 나오며, 그에 대해 자세하게 알려진 정보는 거의 없다. 


아케메네스는 역사에 실존하는 인물이 아닌, 신화적인 공통 조상 일수도 있다는 것에 무게를 두는 학자들이 많다. 많은 학자들은 그가 메디아 제국의 속국이였던 파르수아의 군주였으며, 아케메네스는 그곳에서 B.C 681년 군대를 이끌고 아시리아의 왕 센나케립(Senakerib)에 대항했다고 생각한다. 베히스툰 비문의 아케메네스에 대한 기록은 다리우스 1세가 자신의 왕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든 허구일 가능성이 존재한다. 키루스 2세는 키루스 원통의 상세한 계보에 아케메네스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케메네스의 후견인(Haxāmanišiya)은 키루스 2세의 죽음 이후 다리우스 1세에 의해 건설된 파사르가다에에 대해 언급된다. 이처럼 아케네메스는 다리우스 1세가 키루스 2세와의 왕조적 관계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든 허구의 인물일지도 모른다. 다리우스 1세는 키루스 2세와의 연관성을 주장할 수 있는 공통 조상이 필요했고, 키루스의 딸 아토사(Atosa)와의 후속 결혼을 통해 더 강하게 연관시켰다. 고대 그리스의 작가들은 아카메네스를 둘러싼 여러 전설들을 만들었다. 


B.C 4세기 후반에 플라톤이 전술했다고 알려진 <알키비아데스 1>(120e)는 그리스가 헤라클레스에서 기원되었다는 전설과 같이 아케메네스를 페르시아의 영웅적 창시자로 묘사하며, 아케메네스와 헤라클레스를 제우스의 아들인 페르세우스의 아들로 설명하고 있다. 이 이야기의 다른 내용에 의하면 아케메네스를 아이게우스의 아들로 설명하며 위 페르시아의 영웅적 창시자로 묘사한다. 페르시아 아케메네스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시조로 전설상의 인물일 가능성이 있지만 실존했다면 살았던 시대는 B.C 8세기 말~B.C 7세기 초로 추정되고 있다. 아케메네스는 페르시아의 약 10~15개의 부족 중 하나인 파사르가다에의 족장으로 전해진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청동기 유적인 베히스툰 명문(銘文)에서는 그가 다리우스 1세의 5대 조인 현조부로 기록되었으며 아케메네스가 활동한 시기는 대략 B.C 8세기이다. 이 명문에선 아케메네스를 왕이라 명확히 서술하였는데 사실이라면 아케메네스는 페르시아 역사상 최초의 군주일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일부 학자에 관해서는 다리우스와 아케메네스의 관계에 의문을 제시했다. 


먼저 다리우스 대제는 키루스 2세의 사위로 아케메네스 가(家) 왕실 혈통이 아니다. 그는 키루스의 후계자 바르디야(Bardiya)를 축출해 샤한 샤로 즉위했고 정통성 확보를 위해 자신을 왕실의 시조인 아케메네스의 후손으로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다만 다리우스 1세는 캄비세스 2세의 6촌이라는 기록도 있으므로 신빙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케메네스 제국의 7대 샤한 샤 다리우스 대제는 아케메네스가 기록이 잘 나타나지 않은 불분명한 인물이지만 그를 제국의 시조로 추존하면서 아케메네스 제국과 페르시아의 기원으로 격상하였다. 아케메네스가 실존 인물이라면 B.C 8세기에 페르시아 부족을 이끈 메디아 왕국의 제후였을 가능성이 높다. B.C 8세기에 아케메네스는 안샨을 중심으로 페르시아 부족의 왕국을 세웠다고 하며, 그가 세운 왕국은 엘람의 간섭을 받았다고 한다. B.C 681년 아시리아의 사르곤 왕조가 내분에 빠진 틈을 이용하여 B.C 609년 신바빌로니아, 엘람, 메디아, 안샨이라 불리는 페르시아 연합군이 아시리아를 공격해 멸망시켰는데 이 연합군 중엔 아케메네스도 안샨의 지휘관으로 소속되었다고 명문은 밝히고 있다. 스키타이, 킴메르, 아람, 만나이, 스파르다, 킬리키아, 유대도 이들을 지원했으며 아시리아는 이집트에게 지원 받았다고 한다. 


더불어 아케메네스는 고대 그리스에서 그리스 신화의 영웅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 공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주신 제우스의 손자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당시 페르시아가 차지한 지역이 고대부터 인구와 경제의 중심지였고, 실크로드를 통해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졌으며 파르티아가 수백 년 동안 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한 것을 통해 그 번영을 짐작할 뿐이다. 페르시아는 스키타이나 아리아인과 정치적으로, 외교적으로도 관계가 잦았고 군사적인 충돌도 잦았다. 우선 페르시아군은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의 칸다하르를 공격해 전소시킴으로써 승리를 거의 직전까지 두었다. 그러나 페르시아군은 카불 지역에 집결된 스키타이-아리안 연합군을 공격해서 저항을 저지시키느냐, 그들을 무시한 채 카불을 우회해 파슈툰 지역인 페샤와르로 진입하여 아리안족을 일소시키느냐를 두고 고민에 빠지게 된다. 힌두쿠시의 좁은 산길에서 언제까지고 대군과 피난민이 농성할 수는 없는 일이고, 아리아인의 영토들이 모조리 페르시아에게 돌아가고 나면 조만간 내부 분열을 거쳐 페샤와르 지역은 자멸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당시 다리우스 1세의 선택은 카불에 대한 공격이었다. 아마도 산악 지대의 게릴라 군까지 전멸시키고 나면 탁실라를 비롯한 페샤와르, 파슈툰 일대는 알아서 항복해올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약 300여 전차들이 3단으로 이루어진 전술 노선을 선택했고 그 중 200여 대의 전차들은 아리아인의 기마병들과 함께 동원된 전차들이었다. 아리아의 전차부대들은 페르시아보다 운영 기술적인 부분에서 앞서는 편이었으나, 전차를 햇볕에 말릴 시간이 없어 전 날 쏟아진 비로 인해 빗물을 상당히 먹은 채라서 페르시아 전차보다 무거웠으므로 기동력이 오히려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카불과 힌두쿠시 산맥 외곽을 뒤덮은 페르시아의 군대는 폭우와 헤라트 일대에서 게릴라전으로 맞서는 아리아인들로 인헤 그 수가 많이 줄기는 했어도 전차의 수는 아직 600대 이상이었다. 이는 누가 봐도 페르시아 쪽이 우세했다. 그러나 자체적인 공병들이 부족하던 페르시아의 전차부대는 페니키아, 이집트, 이오니아 등에서 징발한 전차들의 연합이었으며 따라서 결속력과 투지 뿐 아니라 전차가 고장 났을 경우, 제대로 수리를 하지 못했다. 게다가 빨리 승리를 얻고 싶었던 다리우스 1세는 결국 스키타이군 사이에 내분이 일어났다. 


일부는 인더스 강을 빠져나가 달아날 것이라는 가짜 정보에 속아 자신의 전차와 기병들 중 두 번째로 실력이 뛰어난 이집트 기병대를 강의 반대쪽으로 보내 달아나는 스키타이군을 공격하게 했다. 이어 나머지 기병과 전차부대는 힌두쿠시 산맥 하단부로 돌입하여 혼란에 빠져 있을 스키타이-아리안 잔당들을 소탕하도록 지시했다. 이는 B.C 506년 9월의 일이었다. 그러나 마치 그리스 전장의 테르모필레처럼 좁은 산맥의 협곡으로 많은 기병들이 한꺼번에 들어오니 자연히 질서가 무너졌고, 협곡 틈에 숨어 있던 스키타이-아리아 연합군들이 갑자기 나타나 페르시아군을 공격했다. 기동력이 필수적인 평원에서의 전투가 아니다 보니, 스키타이-아리안 연합군의 산악 보병 전이 오히려 유리했다. 이는 빠르게 기동하여 적의 기병들을 원거리에서 활을 쏘아 죽이기 쉬웠기 때문이다. 당황한 페르시아 군사들은 후퇴하려다가 자기들끼리 부딪치고 진퇴가 불가하게 되니 협곡 안은 대혼란에 빠졌으며, 그와 더불어 측면에 스키타이-아리아 산악 보병들이 돌진해와 협곡의 페르시아 군을 공략했다. 전세가 기울자 이오니아 용병들은 주저 없이 도망쳐 버렸다. 


이 카불 전투에서 스키타이-아리안 측이 잃은 군사들은 400여 명의 전사자에 1,000명 내외의 부상자를 남긴 반면 페르시아 군사들은 최소 20,000명이 전사하고 40,000명의 부상자와 포로가 되는 등의 참패를 당했다. 카불에서의 산악전 후에도 페르시아군은 아직 수적으로 우세했으나, 의도했던 대로 큰 손실 없이 스키타이와 아리아인을 제압하는 일은 이미 불가능해져 있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한 다리우스 1세는 한 때 힌두쿠시의 협곡마다 도로를 놓아 비교적 평탄하게 만들어 침공하려는 시도까지 했으나, 결국 뒤처리를 마이크로니우스(Maikronius)에게 맡긴 채 자신은 대부분의 군사들과 함께 페르시아로 돌아갔다. 계속 아프가니스탄 일대에 머물다가 패전 소식이 본토에 알려지면 변경에서, 혹은 왕궁에서 반란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이크로니우스는 이미 사기에서 뒤지고 수적 우세도 잃은 만큼 스키타이-아리안 군과 정면으로 대결하기보다 내부 분열을 획책해서 이기려고 했다. 특히 스키타이와 아리안의 반목을 노렸다. 


이러한 전략은 거의 성공하는 듯 했으나 이를 역이용해 스키타이를 방관하는 듯 했다가 막판에 군대를 보내 기습한 아리아 인, 그리고 사르마트, 아르메니아 등의 연합군과 칸다하르에서 결전을 치르게 된다. 이번에는 수적으로 불리한 쪽은 페르시아였다. 그래도 분전했지만, 마이크로니우스가 누군가 던진 돌에 맞아 전사하면서 결국 붕괴되고 말았다. B.C 505년이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발루치스탄의 메겔로르(Megelor)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다. 페르시아가 점령한 발루치스탄을 해방하려는 이 전투 역시 아리아 인들의 승리로 돌아갔고, 페르시아와 스키타이-아리아 전쟁의 승세는 확실히 스키타이-아리아 측으로 기울었다. 이제 전장은 아프가니스탄을 벗어나 트란스옥시아나 일대와 카스피 해 동안, 그리고 발루치스탄이나 이란 남부 지역 등 페르시아의 지배지로 옮겨갔다. B.C 503년까지 트란스옥시아나의 도시들이 잇달아 해방되었고, 이후 전쟁 목적은 이미 달성되었다고 갑자기 그만 두려는 스키타이와 달리 페르시아를 계속 몰아붙여야 이후에도 재침공을 할 수 없으리라는 아리아인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각 동맹들이 다시 전쟁의 주도권을 잡았다. 


이들 아리아 동맹은 카라치 전투에서 페르시아의 기병대를 격파하여 다시 한 번 이 일대에서 아리아군의 우위를 확인했고, 이란 남부 지역과 오만 만 일대에서도 페르시아군을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B.C 501년에는 페르시아 본토의 시라즈를 공략하다가 참패하고 말았으며, 이로써 전쟁을 마무리 짓자는 의견이 우세해졌다. 그래서 마침내 B.C 500년, 아리아인과 페르시아 사이에 샤흐레코로드 협약이 맺어져 페르시아와 아리아 인들의 전쟁은 종결되었다. 그러나 이 협약의 그 정확한 연대와 성격은 역사가들 사이에 논란이 있는 상태이며 페르시아와 아리아인들과의 사이에서 소규모 국지전은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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