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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에서 물러난 러시아 제국 & 소련의 치욕적인 처사
  • 알렉세이정
  • 등록 2026-04-13 18:24:20

독일 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발트 지방을 차지하였고, 괴뢰국인 리투아니아 왕국, 발트 연합 공국을 설립하였으며, 1918년 3월 3일, 본 국가의 국명에서 유래된 괴뢰국인 쿠를란트-젬갈렌 공국을 수립한다. 그러나 설립된지 1년도 안돼서 같은 해 11월 라트비아가 독립을 선언하고, 독일 제국이 패전하여 멸망했다. 독일 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발트 지방을 점령하였으며, 1918년 3월 3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하고 쿠를란트-젬갈렌 공국 등 많은 괴뢰국을 수립하였다. 공국의 정식선언은 동년 3월 8일 발트 독일인들로 구성된 쿠를란트 행정부에 의해 이루어졌다. 쿠를란트-젬갈렌 공작의 작위는 독일 황제인 빌헬름 2세가 맡게되었다. 1918년 10월경, 막시밀리안 폰 바덴(Prinz Maximilian Alexander Friedrich Wilhelm von Baden) 제국수상은 쿠를란트-젬갈렌에 설치된 군정을 민정으로 전환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민정으로 제대로 전환되기도 전에 독일에서 혁명이 발발했고, 11월 18일 라트비아 공화국이 독립을 선언하였다. 결국 12월 7일 독일군이 공식적으로 라트비아 공화국에 권력을 이양하면서 멸망하게 되었다.

고뇌하는 레닌, 출처 : Fine Art Images / Heritage Images / Getty Images


러시아 혁명 이후 블라디미르 레닌이 4월 테제에서부터 주장했던 '무병합 무배상의 민주적 강화' 논리에 따라 1917년 12월부터 소련은 독일과 협상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곳곳에서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있던 민족들은 제정이 붕괴되자 독립을 선언하기 시작했다. 사실 러시아도 1917년 11월 전 러시아 내 민족의 권리 선언을 통하여 민족들의 자결권 및 자치권을 인정하기는 했으나 이 정도로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크게 확산되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독일은 이러한 러시아 내 독립 운동을 도와 러시아의 세력을 최대한 축소시키려고 했다. 그리고 소련은 공산 정권 수립 이후 레닌의 저서 <국가와 혁명(Государство и революция)>에 나타난 원칙에 따라 군대의 동원을 해제하고 이를 자발적인 민병대 조직으로 재편하겠다는 계획을 실현했는데 당연히 군인들은 참전하기 원하지 않아 군대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당시 소련이 독일에 대적할만한 군대 중 그나마 나은 부대가 라트비아 소총 연대 정도였다. 이들 라트비아 소총 연대의 규모는 일반적인 연대보다 훨씬 큰 수준이었다. 이들은 나중에 러시아 적백내전에서도 맹활약하게 된다.


특히 주요한 철강과 석탄 산지였던 우크라이나 측의 의회가 독립을 선언하게 되자 소련과 독일은 다시 충돌하게 된다. 독일은 우크라이나의 풍부한 자원이 필요했기에 적극적으로 우크라이나를 도운 반면 소련은 자신들의 영토가 독일에게 종속되는 상황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소련 내에서도 입장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레닌은 15만㎢ 정도의 영토와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한 초기 조약을 받아들여 여유를 가질 것을 요구했으나, 니콜라이 부하린(Никола́й Буха́рин, 1888~1938)과 레프 트로츠키(Лев Троцкий, 1879~1940) 등은 전쟁의 종결이 오로지 노동자들의 세계 혁명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기에 이를 반대했다. 트로츠키는 공산당이 인민들 앞에서 몇 건의 성명서만 발표한 후, 외무부를 폐쇄해 버릴 것이라고까지 말하면서 강경하게 나왔다. 마침내 트로츠키는 무전쟁-무평화라는 유명한 선언을 하며 독일의 최후 협상 요구를 거부했다. 그리고 최후 통첩일인 2월 10일까지 끝내 소련은 협상에 응하지 않았다. 그동안 독일은 우크라이나와 이미 조약을 맺고 있었고, 전쟁은 재개되었다. 2월 21일 레닌은 위험에 처한 사회주의 조국! 이라는 선언을 발표하며 볼셰비키군의 소집을 요구했고, 2월 23일 볼셰비키의 군대가 곳곳에서 소집되었다.


러시아 혁명 자체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지친 군대와 국민들의 항명으로 벌어진 사건이었기 때문에 소련은 아직 제대로 성립되지도 않은 국가였기 때문에 그 세력이 매우 부족했다. 독일은 훗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전격전을 연상시키는 속도로 우크라이나 등 러시아의 지배 하에 있던 동구권 국가들을 자신들의 세력권으로 확장시키며 동쪽을 향해 진군했다. 당시 독일군의 전략은 기관총 병사들을 기차에 태운 후 수시로 내려서 지역마다 볼셰비키 당 간부들을 사로잡고 다시 기차 타고 진군하는 것이었다. 이를 두고 철도 진군이라고 하는데 당시 소련은 이 정도의 군대조차 요격하여 섬멸하지 못했고 당장 수도인 페트로그라드를 지킬 군대도 없었다. 이 결과로 인해 소련은 약 220만 ㎢의 영토를 상실했다. 참고로 한반도가 약 220,000㎢인 것을 감안하면 한반도 10배 정도의 면적을 상실한 것이다. 독일은 동유럽에 완충지대를 만들 것인지, 혹은 소련을 최대한 약화시키고 동유럽을 관할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한 끝에 결국 후자를 선택하여 소련에게 굴욕적인 조약을 강요했다.


레닌을 위시하여 강화파들이 소련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소련은 독일의 요구 조건을 모두 수용하는 조약을 맺게 되었다. 이것이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이다. 이 조약 내용이 매우 치욕적이였기 때문에 볼셰비키 중 트로츠키 같은 고위 인사들은 조약에 자신들의 이름을 넣는 것을 거부해 실제 조약에 서명한 러시아의 인물들은 당 간부 중에서도 서열이 낮은 인물들이었다고 한다. 이 조약의 치욕적인 내용은 러시아 유럽 영토의 절반을 독일에게 내주고 인구는 5,600만 명, 석탄 산업의 90%, 철강 산업의 70% 이상, 산업의 54%, 철도의 26%를 넘기는 조항이었다. 산업 비중이 석탄과 철강에 비해 적지만 저런 정도 수준이면 근대의 핵심인 석탄과 철강이 대부분 빠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후 독일이 패전하여 맺은 베르사유 조약에서 협상국이 독일에게 강요한 조건도 가혹했고 치욕적이었지만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은 베르사유 조약보다 더 치욕적이고 가혹했던 것으로 보여 진다. 이후 독일군이 방심하고 있던 소련을 선전포고 없이 공격해 들어온 1941년 6월 22일부터 소련군이 프루트 강을 건너 루마니아로 진격해 나간 1944년 4월 8일까지 소련군과 시민들은 소련 땅에서 독일군 주력부대에 맞서 싸워야 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은 소련을 기습 침공하였다. 흔히 동부전선이라고 부르며 제2차 세계대전을 구성하였던 하나의 전역으로 보기도 하지만, 그 자체만으로 역사상 최대의 전쟁이라 정의해도 무방한 독소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소련(러시아)에서는 대조국전쟁(Великая 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이라고 하는 이 전쟁은 한마디로 강철과 강철이 정면으로 충돌하였던 인류사 최대의 재앙이었다. 독일은 소련을 일거에 석권하기 위해 330만 명에 이르는 병력을 동원했고 여타 추축국과 위성 국가들로부터 500,000명의 병력을 추가로 지원받았다. 그리고 2차 대전을 기점으로 전선의 주역으로 정립되어 가던 전차 3,300여대와 작전기 2,000여기가 투입되었다. 게다가 라트비아 독립군이 약 100,000명이 비알리스토크와 민스크 점령 전에 참전했다. 이는 당시까지 지구상에 등장한 사상 최대 규모의 원정군이었다. OKH는 이러한 대군을 독자적으로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집단군(Heeresgruppe)이라는 거대한 3개 병단으로 나누었다. 소련군이 모여 있는 비알리스토크는 독일 OKH 계획에 중요했었다. 비알리스토크를 넘으면, 민스크-모스크바로 이어지는 전략적인 철도 교차점과 모스크바의 주요 통신망, 방어선이 위치했다. 또한, 독일은 북서부 전선에서 11군을 사로잡았다. 


북쪽에서는, 3기갑군이 11군을 북서부에서 끊는 공격을 하고 네만 강을 도하했다. 2기갑군은, 6월 23일에 부크 강을 도하하며 소련 영토에서 60km를 전진했다. 기갑군들의 목표는 민스크를 동쪽에서 포위하여 소련군의 철수를 막는 것이었다. 기갑군은 비알리스토크 근방에서 9군과 4군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6월 23일에는, 소련 10군은 전쟁 전의 계획에 따라 반격을 시도했으나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 6월 24일, 파블로프 장군이 자신의 작전 요원에게 11기계화 군단, 6기계화 군단, 6기병 군단에게 흐로드나에서의 반격을 시도하여 비알리스토크의 포위를 막을려고 했다. 이 공격은 막대한 피해와 함께 실패하나, 일부 군단은 민스크의 포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6월 25일 저녁, 독일 47기갑 군단은 슬로님과 비알리스토크 사이를 끊고, 파블로프는 슬로님 근방의 포위를 막기 위해 사차하라 강으로의 후퇴를 명령한다. 대부분의 전술로는 독일군을 막을수 없었으며, 탈출하는 사람들은 중장비를 버리고 도보로 탈출했다. 이것으로 인해 민스크 남쪽으로의 진격로가 열렸다. 


침공 5일 후인 6월 27일, 구데리안의 2기갑군과 호트의 3기갑군은 민스크 동쪽으로 포위했다. 기갑군들은 모스크바로부터 321km 앞으로 3분의 1을 진격했다. 그것은 놀라운 성취였다. 6월 28일 4, 9 독일군은 비알리스토크의 10 군을 포위한 작은 포위망과 나바후르다크의 3, 13 군을 포위한 큰 포위망을 만들었다. 궁극적으로, 17일만에 소련은 서부군의 625,000명에서 420,000명을 잃었다. 6월 26일, 벨라루스의 수도인 민스크는 독일 국방군이 점령했다. 독일군을 소련 땅에서 몰아내는 데 걸린 시간은 거의 3년에 달했던 것이다. 유럽에서의 전쟁이 독일군과 소련군의 전쟁이었던 것은 사망자 수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총 사망자 수는 5,000만~7,000만명 사이로 추정되는데, 이 중 소련인 사망자 수가 2,500만~2,700만명으로 추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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