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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멘 자이드파와 자이드 교리에 의해 생성된 후티 정신
  • 알렉세이정
  • 등록 2026-04-13 18:27:21

제4대 정통 칼리파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가 암살된 후 그의 장남 하산 이븐 알리, 차남 후세인 이븐 알리을 거쳐 후세인의 아들인 제4대 이맘 알리까지 시아파 진영은 하나로 유지되어 있었지만 알리 이븐 후세인이 사망한 후 그의 두 아들인 무함마드 알 바키르(Muhammad Al Bakir)와 자이드 알 샤히드(Zayed Al Shahid)를 두고 분쟁이 벌어졌다. 무함마드 알 바키르(Muhammad Al Bakir)는 지하에서 조용히 신학 연구에만 몰두했는데 자이드 알 샤히드(Zayed Al Shahid)는 형과 달리 정치적이었고 이맘의 현실적인 권력을 믿고 세속적인 부분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반(反) 우마이야 투쟁에 나섰다. 이 때 형 무함마드 알 바키르를 이맘으로 추대하며 재야에 머물던 이들이 주류 시아파를 이루게 되었고 동생인 자이드 알 샤히드를 따라 무장 투쟁에 나선 이들이 자이드파를 이루게 되었다. 740년 마침내 자이드 알 샤히드는 무장 봉기를 일으켰으나 우마이야 칼리파 히샴의 군대에 패배하고 붙잡혀 처형되었다. 2년 후 그의 아들 야흐야가 재차 봉기했지만 그도 전사하고 말았다. 비록 실패했지만 자이드파는 이라크의 쿠파 일대에서 영향력을 유지했다. 자이드 일가가 사망한 후 자이드파는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차남인 후세인 이븐 알리의 후손이 아닌 장남 하산 이븐 알리(Hassan Ibn Ali)의 후손들 중에서 이맘을 찾았다. 그 결과 하산의 아들인 하산 알 무사나(Hassan Al Musana)의 후손들이 이맘직을 역임했다. 

예멘 자이드파의 교리를 받아들인 후티와 예멘 정부군과의 내전으로 예멘은 초토화되었다. 출처 : Britannica, Houthi movement


그는 자이드 이맘으로 인정되었으며 그의 장남 이브라힘 알 아므르(Ibrahim Al Amr)의 5대손 야흐야 알 하디(Yahya Al Hadi)는 아라비아 반도 남부 예멘에 왕국을 건국하여 1,000년 동안 유지되었고 다른 아들인 압둘라 알 카밀(Abdullah Al Kamil)의 막내인 이드리스는 메디나에서의 반란이 실패한 후 북아프리카 마그레브로 이주하여 이드리스 왕조를 세웠으며 일단의 하산과 후세인의 자손들이 자이드파와 아직 이슬람의 지배력이 미약했던 이란 북부의 타바리스탄에서 선교를 통해 알라비 왕조를 건국하여 압바스 왕조를 위협했다. 이와 같이 자이드파는 다른 시아파의 분파들에 앞서 여러 곳에서 자립을 시도했다. 7이맘파는 909년에 이르러서야 파티마 왕조를 건립했고 12이맘파는 10세기 중반에 부와이흐 왕조로 역사의 중심에 나타났다. 사실 자이드파는 12이맘파였던 사파비 왕조 이전까지 시아파 가운데 가장 큰 그룹이었으며 현재도 시아파에서 12이맘파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그룹이었다. 자이드파는 후세인 이븐 알리 이후의 이맘은 이스마(Isma), 무오성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12이맘파에서 주장하는 숨겨진 이맘 사상도 거부하며 중요하게도 우마르, 우스만 등 수니파 정통 칼리프나 그들의 가르침도 인정하고 있다. 그 때문에 자이드파의 교리는 시아파 가운데서는 비교적 가장 수니파에 가깝다고 평가되고 있다. 그들을 비롯한 사하바(Sahaba)들이 처음부터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를 지지하지 않은 것은 과오였지만 그렇다고 죄는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는 시조라 할 수 있는 자이드 알 샤히드가 후에 수니파에 흡수되는 무타질라 학파의 스승 와실 이븐 아타이(Wasil Ibn Atay)의 제자였던 사실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이성과 유연한 사고를 중시했던 그 가르침에 따라 자이드 알 샤히드는 우월한 이맘과 평범한 이맘이 공존할 수 있다고 주장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우미이야 칼리프 왕조처럼 명백히 비합법적인 칼리프들에 대항해 전투를 벌이는 것은 신자의 도리로 여겼으며 타키야나 임시 결혼 등 수니파의 박해를 피하기 위한 신앙 위장을 허락하지 않는 엄격한 모습도 공존하고 있다. 2014년에 벌어진 예멘의 후티의 발호는 시아파 계열 자이드파가 중심이 되어 일어났기 때문이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손자 하산 이븐 알리의 후손들이 모로코 지역에 자이드파 국가인 이드리스 왕조를 건국했다. 하산의 후손들은 북이란 카스피 해 연안에 자이드파 왕조를 세우기도 했고 북예멘을 1962년까지 자이드파 아래서 통치하기도 했다. 이슬람 시아파의 일파인 자이드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위 알리의 손자 이름에서 유래한다. 자이드파는 12이맘파 제4대 이맘의 자식으로서 태어나, 은거한 형인 제5대 이맘인 무함마드 알 바키르와는 달리 적극적인 정치 활동으로 우마이야 왕조로부터 정권을 시아파로 탈취하려고 기도했다. 메디나에서 시아파의 본거지인 쿠파로 옮겨 동지를 모아 740년에 이곳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수일 후에 진압되었고 그는 전사하게 된다. 


이 종파는 이맘론에서 특징적인 설을 주장하였는데 그 교의는 수니파에 가깝다. 자이드는 알리가 예언자 무함마드의 지명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가장 우수한 자이기 때문에 예언자의 후계자라고 주장하였으며 알리 이전의 3명의 칼리프를 시아파 주류가 찬탈자로서 비난하는 것에 대해, 그는 열등한 <이맘>이라 하면서도 3명을 합법적 존재로서 인정하였다. 자이드의 반란 실패 후, 이 종파는 이슬람 세계의 변경에 존속하였고 카스피 해 남안에 자이드 왕조, 예멘에 라시드 왕조를 구축하여 1962년까지 계속된 예멘의 이맘도 이 종파에 속하는데, 북예멘에서는 인구의 반 수 이상이 자이드파의 신자이다. 하산 이븐 알리는 제5대 칼리파이자 제2대 이맘이다. 아버지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뒤를 이어 제5대 정통 칼리파가 된 이후 무아위야 1세에 대적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인해 그에게 항복하고 직위를 헌납했다. 그는 625년경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와 예언자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의 아들로 출생했다. 전승에 의하면, 무함마드는 외손자가 태어났을 당시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그의 이름을 알리 하산으로 지으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무함마드는 손자의 오른쪽 귀에는 아단(Adan), 왼쪽 귀에는 이카마(Ikama)를 암송하고 숫양을 자신의 이름으로 제물로 바쳤다. 하산과 동생 후세인 이븐 알리는 외조부인 무함마드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하디스>에 의하면 무함마드가 하산과 이븐을 “천국 젊은이들의 지도자(Leader of the youth of heaven)”라고 칭하고 두 사람이 앉아서 평화 협정에 동의하거나 서서 전쟁에 나서거나 할 때도 이맘이라 밝혔다 전하고 있다. 하산 이븐 알리는 아버지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휘하에서 여러 전투에 참여했으며, 예멘에 이슬람을 전파하는 선교사로서 활약했다. 제3대 정통 칼리파 우스만이 마드마(Madma) 궁전에서 시위대에게 피살당하고 아버지가 칼리프로 선출되었을 때, 하산은 아버지의 최측근으로 다방면에서 활동했다. 먼저 이라크의 쿠파로 가서 아버지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무슬림들을 토벌했다. 뒤이어 바스라, 시핀, 나흐라완 등 여러 전투에서도 용맹을 떨쳤다. 알리는 그러한 아들을 이맘으로 선출해 신도들을 가르치는 역할을 맡겼다. 661년 아버지가 하와리즈 종파에게 암살당한 이후, 알리의 지지자들은 장남인 하산을 제5대 정통 칼리파로 선출했다. 알리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 무아위야 1세는 시리아, 팔레스타인, 트란스요르단의 모든 지휘관들을 소집하여 새로운 전쟁을 준비했다. 그러면서 하산 이븐 알리에게 서신을 보내 신변을 보장해주고 이맘으로서 지위를 인정해줄 것이니 칼리프를 양도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무아위야 1세는 6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하산이 있는 이라크 쿠파로 진군했다. 하산 역시 40,000명의 군대를 일으켜 그를 향해 진군했다. 양군은 곧 사바트(Sabat) 인근에서 조우했다.


전투가 임박했을 때, 하산 이븐 알리는 분열을 증오한다고 밝히며, 부하들에게 자신의 명령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무조건 추종할 것을 호소했다. 일부 병사는 이 말이 하산이 항복할 준비를 한다는 걸로 여기고 격분해 그를 공격했다. 하산은 부상을 입었지만, 그의 충성스러운 병사들은 즉시 그를 호위하고 반란군을 살해했다. 한편 하산의 부관인 우바이드 알라 이븐 압바스(Ubaid Allah ibn Abbas)는 걸출한 지휘관이었던 알리가 전사하고 아군은 서로 의견이 분분하여 내분이 발생하려 하자 무아위야 1세를 이길 가망은 없다고 판단하여 무아위야 1세에게 귀순했다. 이에 대한 일설에 의하면, 정체불명의 남자들이 무아위야 1세와 하산의 소규모 분견대 간의 충돌 당시 하산이 전투를 회피하려 했다가 패배를 초래했다는 소문을 냈다. 소문을 듣고 격노한 지지자들이 반란을 일으켜 하산의 진영을 약탈했고, 하산은 호스로 궁전으로 피신해야 했다. 그는 이 사건에 큰 충격을 받고 무아위야 1세에게 평화 협상을 하자고 제의했다고 한다. 하지만 평화 협상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양군은 결말이 나지 않는 교전을 몇 차례 벌였다. 무아위야 1세는 이대로 전투가 지속된다면 자신이 승리할 확률이 높지만, 무력으로 칼리프를 찬탈했다는 악명이 생길 것을 매우 우려했다. 그는 하산 및 그 추종자들과 화평을 어떻게든 이루어내기로 하고, 바누 쿠라이시에서 2명의 사절을 보냈다.


마침 하산 역시 많은 무슬림이 내전으로 희생되는 것을 원하지 않고 있었던 상황이라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수니파 학자들에 의하면, 하산은 무아위야 1세가 <꾸란>과 <순나>를 따라야 했다. 그가 칼리프를 승계하는 것을 받아들이겠지만 알리 추종자들에 대한 어떠한 복수도 하지 말라고 요청했다. 무아위야 1세는 이를 받아들였고, 뒤이어 제시된 다음 조건들을 모두 받아들였다고 한다.


1. 아와즈 지방에서 징수하는 모든 세금은 하산 이븐 알리에게 지급되어야 한다.

2. 연간 200만 디르함이 하산 이븐 알리에게 지급되어야 한다.

3. 전투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에게 사면을 선포해야 한다. 


시아파 학자들에 의하면, 하산은 무아위야 1세가 사망한 이후 자신이 아직 살아있다면 칼리파를 자신에게 돌려줘야 하며, 만약 자신이 무아위야 1세보다 먼저 죽는다면 칼리프 직위를 동생인 후세인 이븐 알리에게 넘겨주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러자 무아위야 1세는 이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 이후 무아위야 1세는 쿠파로 가서 그 곳의 무슬림들에게 충성을 맹세하라 요구했고, 하산에게 하와리즈 종파 에 대한 토벌에 군사를 제공하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하산은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나는 모두의 평화와 화해를 위해 내 권리가 정당함에도 불구하고 당신과의 싸움을 포기했다. 그런 내가 당신과 함께 싸울 생각이 있겠는가?”


하산은 칼리프에서 퇴임한 이후, 메디나로 은퇴했다. 그러나 아버지 알리에 대적하다가 이제 메디나 총독이 된 마르완 1세의 핍박에 시달려야 했고, 최대의 적인 무아위야 1세에게 칼리프를 양도한 사실에 분노한 지지자들의 비난을 받아야 했다. 그렇게 어려운 시간을 보내던 하산 이븐 알리는 670년에 사망했다. 시아파들의 전승에 의하면, 무아위야 1세는 자신의 아들 야지드 1세에게 칼리프 직위를 물려주고 싶었고, 전임 칼리파 하산 이븐 알리를 세습 계획에 반대되는 자들이라 여겼다. 무아위야 1세는 비밀리에 하산의 아내 자다 빈트 알 아샤트 이븐 카이스(Jada Bint Al-Ashat Ibn Qais)와 접촉하여 남편을 독살하면 막대한 돈을 주고, 야지드 1세와 결혼시켜주겠다고 제안했다. 자다는 연이어 한 권고에 넘어가 남편에게 꿀을 섞은 독약을 먹였다. 결국 하산 이븐 알리는 심한 고통을 겪다가 사망했다. 남편을 죽인 자다는 다마스쿠스의 무아위야 1세 궁정으로 서둘러 들어가 보상을 받으려 했지만, 무아위야 1세는 그녀와 약속을 어기고 그녀를 다른 남자와 결혼시켰다. 반면 수니파 측은 하산 이븐 알리가 자연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산은 생전에 자신이 사망하면 외할아버지 무함마드 옆에 매장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마르완 총독은 이를 막아서면서, 무함마드의 세 번째 아내 아이샤 빈트 아비 바크르(Aisha Bint Abi Bakr)에게 하산이 그곳에 묻히는 것이 허락된다면 자신의 친척인 우스만 이븐 아판(Uthman Ibn Affan)도 무함마드 옆에 매장하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요구했다. 아이샤는 배신을 일삼는 마르완을 개인적으로 좋지 않게 여겼기에 받아들이지 않았고, 더 나아가


“예언자 옆에 누구도 묻힐 수 없다.”


고 선언했다. 하산 이븐 알리의 가족은 어쩔 수 없이 예언자의 모스크인 마스지드 알 나바위(Masjid Al Nabawi) 건너편에 있는 알 바키(Al Baki) 묘지에 하산의 시신을 안장했다. 하산의 아들인 카심(Qasim)은 680년에 카르발라에서 숙부인 후세인 이븐 알리를 지키다가 죽었다. 카심 외에도 압둘라, 비시르, 탈하 등 하산의 아들 대부분이 카르발라에서 죽었으며, 자이드와 하산만이 살아남아 후손을 남겼다. 어렸을 때는 외조부인 무함마드의 귀여움을 받으면서 자랐다. 이후 아버지인 알리가 우마이야 가문과 전쟁을 벌이다 피살당해 위기에 처했으나, 형인 하산 이븐 알리가 우마이야 군대와 전투를 벌여 무승부는 거두었기 때문에 이후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에서 상당 기간 동안 거주했다. 형 하산이 사망한 이후로는 우마이야 칼리프 왕조에 반대하는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지지를 얻게 되었지만, 후세인은 아직 우마이야 칼리프 왕조의 세력이 강했던 것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에 당장 행동에 나서지 않고 메카에 은신했다. 그러다 680년 무아위야 1세가 사망하자 시아파가 많았던 쿠파 주민들로부터 편지를 받고 쿠파로 갔는데 이 와중에 우마이야 왕조의 군대에 붙잡혀 살해당하고 말았다. 


제4대 라시드 칼리프 알리를 추종하던 시아파들이 후세인을 지도자로 모시기 위해 그를 초대했으며, 이에 후세인은 자신의 일가족만 데리고 쿠파로 이동했다. 그런데 우마이야 왕조는 그것을 미리 파악하고 쿠파에 군대를 파견해서 시아파를 굴복시켰고, 쿠파 앞 카르발라라는 평원에서 후세인을 회유하려 했으나 후세인은 이를 거부하고 전투에 임했다. 그러나 처음에 100명도 안 되는 소수의 인원만 데리고 쿠파로 갔기 때문에 중과부적이 될 수밖에 없었고, 결국에는 학살에 가까운 형태로 전투가 마무리 되어, 후세인 자신도 어린 아들을 품에 안은 채 머리가 잘리고 말았다. 후대의 복수를 우려한 우마이야 병사들이 동시에 공격하여 후세인을 참수했다고 전해진다. 전투가 끝난 이후 후세인의 아내와 추종자들은 수도 다마스쿠스의 감옥으로 이감되거나 노예가 되었으며 작은 아들은 기아로 인해 사망했다. 후세인의 수급 역시 다마스쿠스에 있었던 야지드 1세에게 보내졌고, 다시는 <꾸란>을 낭송하지 못하게 한다면서  막대기로 사정없이 내려치는 굴욕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포로들이 감옥에서 자신을 면회하러 온 면회객들에게 카르발라 참극의 전말과 후세인의 인품 등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 동정론이 일게 되었고, 예언자의 직계 후손을 살해한 야지드 1세에 대한 전 이슬람 세계의 여론이 급속히 악화되자 야지드도 더 견디지 못하고 이들을 석방했다. 


한편 카르발라 현지에 묻힌 후세인의 신체와는 다르게 그의 머리는 다마스쿠스의 우마이야 대사원 벽에 약 200년 동안 매몰되어 있었다. 시아파의 전승에 따르면 후세인의 아들인 제4대 이맘 알리가 부친의 머리를 아슈라의 40일째 되는 날에 카르발라의 신체와 합쳐 놓았다고 했으며, 12이맘파에서는 이를 기념하는 행사가 있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전설에 불과하고, 실제론 카르발라 전투 이후 약 2세기에 걸쳐 다마스쿠스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에 대한 순례가 계속되었고, 독실한 수니파였던 압바스 왕조의 칼리프 알 무크타디르는 순례를 막으려 노력했으나 실패하였다. 결국 그는 수급을 비밀리에 팔레스타인 가자 지역 해안의 아슈켈론(Ashukelon)으로 비밀리에 이장시키게 하였다. 다만 70여년 이후 이집트를 장악한 파티마 왕조의 칼리파 알 아지즈(Al Ajiz)는 바그다드 당대인의 진술을 토대로 985년 이를 확인하였고, 11세기 후반 재상 바드르 알 자말리(Badr Al Jamali)가 마슈하드(성지) 건물과 모스크를 세웠다. 12세기 십자군이 당도하여 이집트의 관문 아슈켈론을 지속적으로 공격했는데, 남쪽의 가자가 함락되어 포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반세기 가량 이를 막아낸 것의 여러 요인 중 하나가 성 유물을 지키려는 시아파 주민들의 의지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1153년, 마침내 십자군이 대군을 모아 재차 도시를 포위하자 후세인의 수급은 안전을 위해 이집트의 카이로로 옮겨졌다. 그리고 현재까지 그곳의 후세인 모스크에 안치되어 있는데, 시아파 무슬림의 순례지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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