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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요르단의 왕가, 하심 가문의 역사와 영국-이라크 조약으로 인한 이라크의 독립
  • 알렉세이정
  • 등록 2026-04-13 20:47:15

무함마드의 혈통들은 파티마와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장남이자 무함마드의 손자로 하산 이븐 알리가 있다. 그리고 하산의 후손들은 '샤리프(شريف, Sharif)'라고도 불린다. 초기에 히자즈 지역의 샤리프들은 큰 활동 없이 조용히 지냈다. 그러다가 급진주의 분파인 카라미타(قرامطة, Qarmatians)파가 메카의 카바에서 검은 돌을 훔치는 사건이 발생하자, 압바스 왕조의 속국인 이흐시드 왕조(Ikhshidid dynasty) 측은 이에 메카를 수호할 필요성을 느끼고 964년에 샤리프들 중에서 메카의 아미르를 임명하여 히자즈 지역을 지키게 하였다. 메카와 히자즈를 지배하는 샤리프 아미르를 메카의 샤리프(شريف مكة, Sharif of Mecca)라고도 한다. 메카 아미르 작위는 파티마 왕조 시대에도 존속하고 있었다. 1012년 당시 메카의 아미르였던 아부 알 푸투흐 알 하산(أبو الفتوح الحسن, Abu'l-Futuh al-Hasan)은 파티마 왕조에 대항해 칼리프를 자칭하기도 했으나 그의 동맹 세력이 배신하자 다시 파티마 왕조에 충성을 바치게 된다. 한편, 남부 아라비아에서는 파티마 왕조의 영향을 받아 시아파의 분파인 이스마일 파를 받아들인 술라이흐 왕조(بَنُو صُلَيْح, Sulayhid dynasty)가 1062년 오늘날의 예멘 지역을 정복하고 더 나아가 북쪽 히자즈 지역까지 점령하였는데, 이로부터 한 동안 메카의 아미르들은 이들에 의해 선출되었다. 

요르단의 하심 왕실, 출처 : AL BAHER, The Hashemite Royal Family


1201년 아이유브 왕조 통치 하에 카타다흐 이븐 이드리스(قتادة بن إدريس, Qatadah Ibn Idris)가 메카의 아미르로 임명된 이래 메카의 샤리프 작위는 그의 후손 혈통인 카타다흐 씨족(Qatadids)으로 계속 세습되어왔고, 현대 하심 가문은 이들을 직계 조상으로 두고 있다. 메카의 샤리프들은 본래 자이드파 시아파였으나, 맘루크 왕조의 통치와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지배 초기 무렵, 수니파로 개종하였다. 1405년에는 필리핀을 중심으로 한 술루 지역 군주의 사위가 된 후세인 이븐 알리의 14대 손 샤리프 울 하심(Sharif ul-Hashim)이 장인의 군주 제위를 계승한 이후 술탄을 칭하여 술루 술탄국을 개창하게 된다. 1517년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를 정복한 이래 히자즈 지역 역시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당시 메카의 아미르였던 바라카트 2세(بركات الثاني, Barakat II)는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술탄이 칼리프임을 받아들이며 종주권을 인정하게 되었고, 오스만투르크 역시 메카의 아미르가 히자즈를 다스리는 것을 용인하게 되었다. 이후 히자즈의 행정 구역으로 제다 성(ایالت حبش‎, Eyālet-i Ḥabeş)이 축조되어졌다. 또한 오스만투르크 정부는 메카의 아미르를 직접 임명하여 계승권에 영향을 행사하였는데, 항상 카타다흐 씨족 인물들 중에서 선출하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히자즈 지역의 통치권은 메카의 아미르와 이집트 총독, 제다 총독이 같이 쥐었다. 그러다가 1750년대 아라비아 반도에 와하브파 세력이 점점 강력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1803년 와하브파 사우드 가문 출신의 압둘 아지즈 빈 무함마드(عبد العزيز بن محمد, Abdul-Aziz bin Muhammad)가 메카를 공격하였고, 당시 메카의 아미르였던 갈리브 이븐 무사이드(غالب بن مساعد, Ghalib ibn Musa'id)는 제다로 피신하였지만 제다 역시 사우드 군대에 의해 포위당하였다. 갈리브는 결국 제다가 함락되면서 그는 압둘 무함마드에 의해 포로가 되어 메카로 돌려보내졌고 결국 그는 사우드 가문의 봉신이 되었다.  히자즈를 다른 세력에게 함락당한 오스만투르크 측은 이집트 총독 메흐메트 알리(Mehmet Ali)를 불러 다시 히자즈를 탈환하게 하였다. 1813년 메흐메트 알리가 와하비 세력을 격파하고 히자즈를 탈환했는데 자기만의 아라비아 국가를 세우겠다는 야심을 품은 그는 메카의 아미르를 자기가 선출하여 히자즈 지역의 패권을 장악하려 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카타다흐 씨족을 자이드 씨족(ذوي زيد, Dhawu Zayd)과 아운 씨족(ذوي عون, Dhawu Awn‎)으로 분류했다. 그리고 자이드 씨족인 갈리브를 폐위시키고 아운 씨족인 무함마드 이븐 아브드 알 무인(محمد بن عبد المعين بن عون, Muhammad ibn Abd al-Mu'in)을 등용하게 된다. 


이처럼 씨족을 분류함으로써 메흐메트 알리는 메카의 아미르들을 더 수월하게 조종할 수 있었다. 1840년 런던 조약(Convention of London)의 체결로 인해 메흐메트 알리가 히자즈에서 권력을 상실하고 이 지역은 다시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통치 하에 들어왔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다시 자이드 씨족을 등용하게 된다. 그리고 1872년 히자즈의 행정 구역을 개편하여 제다 성(ایالت حبش‎, Eyālet-i Ḥabeş)을 헤자즈 주(ولايت حجاز,‎ Vilâyet-i Hijaz)로 바꾸게 된다. 총독이 제다에서 메카에 직접 거주하면서 히자즈의 권력은 아미르와 총독이 양분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이 둘 사이에 자주 충돌이 있었다. 19세기 동안 히자즈의 주요 도시였던 메카, 메디나, 제다에는 대부분 중앙아시아,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등지의 비아라비아권 무슬림들이 거주하고 있어 다국적인 분위기를 갖게 되었다. 1856년에는 무함마드 이븐 아브드 알 무인(Muhammad Ibn Abd Al-Mu'in)이 메카의 아미르로 재위하면서 다시 아운 씨족이 집권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손자인 샤리프 후세인으로 아미르의 직위가 이어졌고, 후일 후세인은 아라비아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은 중동 지역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열강 세력으로, 중동에 관련된 3개의 협상을 진행했다. 


오스만투르크 제국과의 전쟁이 부진해지자 영국은 당시 메카의 샤리프였던 후세인에게 접근하였고, 아라비아 지역에서 오스만투르크 제국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다면 전후 그 대가로 통일된 아라비아 국가를 세워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이것을 후세인 맥마흔 서한(Mc Mahon–Hussein Correspondence)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한편으로 프랑스 제3 공화국과 전후 아라비아 지역을 두 국가가 잘 나누어 갖자는 사이크스-피코 협정(Sykes–Picot Agreement)을 체결했다. 이는 영국이 후세인과의 협상을 진행할 때 실제로 그에게 아라비아 지역을 맡길 생각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영국은 유태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전후 중동 지역에 유태인의 나라를 건국해 주겠다는 밸푸어 선언까지 발표했다. 이에 후세인은 영국에 동조하여 연합군 편으로 들어가 오스만투르크 제국에 반란을 일으키고 헤자즈 왕국을 세웠다. 그러나 전후 약속된 아라비아 국가 건설의 약속을 지켜지지 않았고, 영국과 프랑스는 레반트 지역을 차지했다. 하심 가문 측에서는 시리아 아라비아 왕국을 세우고 후세인의 삼남인 파이살 1세를 국왕으로 추대했지만, 그저 미승인국가로 남았고, 건국 4개월 만에 프랑스에 항복하여 없어졌다. 중동 전역에 걸친 통일 아라비아 국가의 원대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요르단과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영국의 영향 아래 각각 후세인의 차남인 압둘라는 트란스요르단의 3남이자 이전 시리아 국왕이었던 파이살 1세는 이라크 왕국의 국왕이 되었다. 터키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칼리프 제도를 폐지하자 메카에 머물던 수호자 후세인은 자신을 칼리프라고 선언했으나 오히려 이를 계기로 반대파들의 공격을 받아 망명해야 했다. 이후 장남 알리가 헤자즈 국왕 자리를 이어받았지만, 혼란을 이용해 압둘 아지즈 이븐 사우드의 네지드 왕국이 침공하여 알리를 추방했다. 추방된 알리는 동생 파이살이 있던 이라크로 탈출했고, 헤자즈 왕국을 합병한 네지드 왕국은 이후 아라비아 반도 대부분을 석권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오늘날의 사우디아라비아이다. 나세르의 아라비아 연합 공화국 구상에 자극을 받아, 1958년 한때 요르단과 이라크의 하심 왕국들끼리 아라비아 연방'이라는 연합을 구성하기로 하고, 이라크의 파이살 2세를 연방의 원수로 추대하기로 했다. 그러나 반년 만에 이라크에서 압둘카림 카심(Abdul Karim Qasim)의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국왕 파이살 2세를 포함한 파이살 1세의 후손들을 학살해버렸고, 이라크로 망명했던 후세인의 장남 알리의 아들 압둘 일라(عبد الإله, 'Abd al-Ilah)도 살해하였다. 후세인의 4남인 제이드는 당시 영국 주재 이라크 대사로 런던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면하였고 현재 이라크 하심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 


트란스요르단 아미르 왕국은 1921년부터 1946년까지 오늘날의 요르단 지역을 다스린 영국의 자치국으로, 영국법 상으로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의 일부였지만, 실제로는 하심 가문이 이끄는 이슬람교도 주도 자치정부의 영역이었다. 1915년 1월부터 1916년 3월까지 기간 동안 샤리프 후세인의 아들 알리 빈 후세인(Ali of Hejaz)과 영국의 고등 판무관 헨리 맥마흔(Henry McMahon)은 당시 레반트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몰아내고 대신 통일 아라비아 국가를 건설할 것을 협상하였다. 이것을 후세인-맥마흔 서한(Mc Mahon–Hussein Correspondence)이라고 한다. 서한을 통해 영국으로부터 독립 국가로의 건설을 약속받은 알리 반 후세인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군대를 조직하고, 영국군과 연합하여 레반트 지역에 주둔하던 오스만투르크 군을 격퇴하였다. 이후 영국군은 오스만투르크 제국과의 완충 지대를 만든다는 명목으로 레반트 지역을 장악하였다. 1920년 4월 25일, 국제 연맹은 요르단 강 유역을 영국이 다스리는 위임통치령으로 설정했으니, 영국령 팔레스타인이 세계 지도에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1921년 영국군은 하심 가문과 협상하여 요르단 강의 동쪽 지역에서 하심 가문의 압둘라 1세 알 후세인(Abdullah I bin al-Hussein, 1882~1951)을 군주로 하는 트란스요르단 토후 왕국이 성립되었다. 


트란스요르단은 영국으로부터 자치권을 부여 받았지만, 국방권과 외교권은 여전히 영국에게 위임되어 있었다. 1922년 국제 연맹은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 안을 승인하고, 이에 따라 요르단 강의 서쪽 지역은 영국의 직할구로서 이슈브(Ishub, 유태교도 자치정부)의 영역이 되었다. 반면에 요르단 강의 동쪽 지역은 하심 가문이 이끄는 토후 왕국(이슬람교도 자치정부)의 영역이 되었다. 1928년 2월에는 토후 왕국에서 전면적으로 왕이 통치하는 왕국으로 지위가 격상되었다. 1946년 5월 25일, 트란스요르단은 영국으로부터 분리 독립하여 요르단이 되었다. 또한 트란스요르단의 군주였던 압둘라 1세가 요르단의 초대 국왕이 되었다. 이로써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령의 범위는 공식적으로 요르단 강의 서쪽 지역에 완전히 축소되었다. 하심 가문의 후세인 빈 알리는 1908년 청년 투르크당 혁명의 결과로 인해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술탄 압둘하미트 2세에 의해 메카의 샤리프에 임명된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6년에 아라비아 독립에 대한 영국의 지원을 약속 받은 그는 오스만투르크 제국에 대한 아라비아의 반란을 선언하고 아라비아의 반란 직후 그는 통일 아라비아 왕국의 국왕임을 선언했지만 연합국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현재 사우디아라비아의 서쪽 지역인 헤자즈의 국왕으로만 인식되었다. 


영국은 1917년 팔레스타인에 유태인의 독립국을 건설해준다는 밸푸어 선언을 했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시리아, 이라크, 팔레스타인을 프랑스와 함께 위임 통치하기로 명시한 베르사유 조약을 맺었다. 후세인 빈 알리가 이에 항의해서 조약의 비준을 거부한 이후 연합국의 지원이 중단되었다. 또한 1920년 산레모(Sanremo) 회의와 세브르 조약으로 패전국인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영토를 분할하여 메소포타미아 위임 통치령이 세워진다. 이듬해인 1921년 영국은 후세인의 차남 압둘라를 요르단 국왕으로 세웠고, 몇 개월 후, 같은 해에 후세인의 셋째 아들인 파이살을 이라크(메소포타미아) 국왕 파이살 1세로 하여 영국의 위임 통치를 받는 형식적인 왕국으로 독립시켜 주었다. 새로운 이라크 왕국의 영토는 과거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모술, 바그다트, 바스라 빌라예트(Vilayet) 지역을 3개를 통합시켜서 세워졌는데 오늘날 쿠르드족과 이슬람 원리주의 국가인 ISIS와 이라크 정부군의 전쟁을 생각하면 오늘날의 형세와 유사하다. 1932년 정식으로 이라크 왕국으로 독립한다. 1933년 국가 단결을 위해 노력한 파이살 1세가 노환으로 서거하자 그의 아들인 가지 1세가 즉위했는데 문제는 이 인물이 반 문맹이었다는 것이다. 


무능하면서 권력 욕심이 많았던 가지 1세는 군부를 이용하여 독재를 강화하려 했고 1936년 바크르 장군을 시켜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는 등 이라크의 군부 전횡의 발판을 마련했다. 하지만 대중이 원하는 것을 알아내는 능력은 기발하였고 자기 자신도 반영주의자라서 적극적인 반영 정책을 펼쳐 큰 인기를 얻었다. 가지 1세는 영국에 저항하면서 현대화 된 민족주의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제시하였으나 1939년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가지 1세가 사망한 이후 이라크의 왕위에는 어린 파이살 2세가 즉위했다. 그러던 도중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지나친 내정 간섭에 지친 라시드 알리 알 가일라니(Rashid Ali Al Ghailani)와 황금 광장을 중심으로 한 이라크의 민족주의자들과 황금 광장은 쿠데타를 일으켰다. 정권을 잡은 이들은 친 영국 정치인을 체포하고 독일에 지원을 요청하게 된다. 또한 독일이나 이탈리아에 가입하여 영국과 전쟁을 벌였으나, 한 달도 안 되어 패배하였고, 이라크는 영국에 항복하여 독일이나 이탈리아 연합국 중 가장 먼저 항복한 국가가 되어 버렸다. 영국은 이라크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여 이라크를 괴뢰 국가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영국은 1948년까지 이라크를 통치하다가, 1948년 영국-이라크 조약을 통해 이라크는 주권을 되찾고, 1955년 바그다드 조약을 통해 완전한 독립 국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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