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3238185&PAGE_CD=N0006&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utm_campaign=naver_news&CMPT_CD=E0033M빨치산의 태평소 소리 좋아했던 미군, 국악의 전도사가 되다[이희용의 월드코리안 12] 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민족·국제 이희용(hoprave)▲가야금 타는 해의만만년의 해...
신농(神農)은 사람의 몸에 소의 머리를 가진 전설적인 군주로 나타난다.『史記』「五帝本紀」에 의하면 사신인수(蛇身人首 : 뱀의 몸에 사람의 머리)의 군주인 여와(女媧)가 죽은 후 염제 신농씨가 계승했다고 하였다. 신농의 어머니는 용의 영기(靈氣)를 감지하고 아이를 가져 신농씨를 낳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신농씨는 인신우두(人身牛頭)라 하여 머리부터 상반신은 소, 신체는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며 태어난 지 3일 만에 말을 하고, 5일 만에 걸었으며, 7일 째에는 이가 났다. 장성하자 키가 3m에 이르는 장신(長身)이 되었다. 이렇게 구전으로 전해지는 내용으로 인하여 신농씨는 신화(神話) 시대의 군주로 나타나며 중국 고대사인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시대 전체를 신화의 역사로 보고 있다. 따라서 신농씨를 비롯한 삼황오제가 활약했던 시기가 주로 신화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는 어려운 것으로 보여 진다. 이러한 전설상의 제왕인 신농은『帝王世紀』의 기록에도 나타난다. 이 기록에는 “신농씨의 성은 강(姜)씨고, 어머니는 유교씨(有嬌氏)의 딸로 소전씨(小典氏)의 아내가 되어 신룡(神龍)에게서 영감을 얻어 인신우수(人身牛首)의 신농씨를 낳았다.” 라고 한다.

Truyền thuyết Lạc Long Quân Âu Cơ được khởi từ ghi chép trong Lĩnh Nam chích quái. Ảnh : Internet.
그리고 화덕(火德)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염제(炎帝)라 했는데 나무를 잘라 구부려서 뇌사(耒耜)를 만들어 백성들에게 농경을 가르쳤으며, 백초(百草)를 맛보아 약초를 찾아내 병을 치료했고, 오현금(五絃琴)을 만들었으며 팔괘(八卦)를 겹쳐 64효(爻)로 점을 보는 점술(占術)을 고안해냈다. 그리고 시장을 세워 백성들에게 교역을 가르쳤다고 한다. 농업과 의약, 음악, 점서(占筮), 경제의 조신(祖神)이며, 중국 문화의 원천으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신농씨(神農氏)에 대해『史記』「三皇本紀」에서 언급하자면 앞서「五帝本紀」에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성은 강(姜)이고 이름은 괴(魁)로서, 소전의 아들로 전해지고 있다. 소전의 아내 안씨(安氏)가 화양(華陽)에 올라 유람을 즐기고 있는데 신령스러운 용이 화양에 나타나 느낌으로 서로 통하다가 신농씨를 낳았다고 한다. 그의 얼굴은 사람이지만 용의 눈을 가졌으며 농사짓는 일을 좋아했기 때문에 신농(神農)이라 불렸다. 신농의 성이 강씨(姜氏)인 이유는 섬서성의 강수(姜水) 부근에서 태어나 성장했기 때문이다. 후일 주(周) 무왕(武王)을 도와 중원에 정복한 강태공(姜太公)도 염제 신농씨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오늘날 세계 강씨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
후손으로 중국의 천수강씨(天水姜氏), 한국의 진주강씨(晉州姜氏)가 있다. 그가 신농이라는 호(呼)를 사용한 것은 최초로 나무를 깎아서 호미를 만들었고, 나뭇가지를 구부려서 호미 자루를 만든 농기구의 발명자이며, 그것을 사용해서 사람들에게 농사를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농은 당시에 처음으로 제사에 농작물을 바치는 등 시장과 상업이 발전하는 계기를 제공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신농씨는 베트남의 고대사의 시조로 기록되어 있고 신농씨, 염제신농은 본문 내용에서 기술한 것과 같이 동이족으로 많은 연구가들이 연구한 자료가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신농씨의 자손들 중 남방으로 서서히 이등한 민족들이 베트남 민족인 Khin 족의 조상되는 것이다. 동이족의 후예인 베트남인들은 양자강 남쪽 지역에 오(吳), 혹은 월(越), 남만(南蠻), 남이(南夷)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게 되며 이들은 광대한 수원(水原)을 바탕으로 농업 경제를 추구해 나갔다. 결국 베트남인들의 강인한 근성과 끈질긴 생명력의 근원은 동이족의 근성 및 생명력과 맞닿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치우와 황제는 중원을 두고 격돌한 탁록 전투에서 치우는 패배했다. 치우의 후예들은 여러 갈래로 갈려졌고 한 종족은 하서주랑을 중심으로 한 청해성, 감숙성, 산서성 일대로 들어가 강융(羌戎)과 흉노의 계파 등을 형성했고, 북쪽으로 이동한 종족들은 부여, 고구려를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남으로 내려간 민족들은 장강으로 이남으로 내려가 묘만(苗蠻) 세력이라 하여 오늘날의 호남성, 강소성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들을 통칭 삼묘(三苗)라 하여 오(吳), 월(越)의 선조가 된다. 오(吳), 월(越)의 후예들은 후일 베트남의 선조들이 되는데 오(吳), 월(越)은 점차 남방으로 영토를 확대하여 오늘날의 광동성, 광서장족자치구, 북베트남 일대를 장악하며 백월(百越)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이들 백월은 북베트남도 장악함에 따라 남월(南越)이라고도 하며 베트남 고대 왕조들의 시초가 되었다. 여기에서 유력한 지도자가 제명(帝明)이라는 자인데 그는 베트남어로 데민(Đế Minh)이라고 한다. 그는 신농씨의 3대 후손으로 삼묘족과 여족(黎族)을 거느리고 북베트남에 정착했다. 그는 광서 지역과 광동 지역까지 점령하여 남월(南越)의 기반을 마련했다. 특히 턴농(Than Nong · 神農)으로 알려진 신농씨의 자손인 3세 손 데민(帝明)이 4세 손인 록뚝(Loc Tuc · 祿續)으로 하여금 낀 즈응 브엉(Kinh Duong Vuong)에 봉하여 남방을 다스리게 하였고, 그 이름을 씩꾸이(Xich Quy)국이라 하였다. 이러한 씩꾸이(Xich Quy)국은 현재의 중국 운남성(雲南省)에서부터 남중국해 통킹 만에 이르는 지역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낀 즈응 브엉(Kinh Duong Vuong)은 용왕(Dong Dinh Quan)의 딸 티엔롱(Than Long)과 결혼하여 아들 숭람(Sung Lam)을 낳으니 이가 바로 락롱꿘(Lac Long Quan)인 것으로 보인다.
락롱꿘은 씩꾸이 국을 다스려 백성들에게 농경을 가르치고, 음식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나, 후일 어떠한 사연인지 알지 못하고 용궁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한편, 북으로부터 데 라이 왕이 씩꾸이 국을 정복하려 하자 용궁으로 은퇴한 락롱꿘이 다시 출현하며 데 라이 왕과 대항했고 얼마 후 데 라이 왕의 사망으로 그들의 군대가 철수하자 락롱꿘은 데 라이의 딸인 어우꺼(Au Co)를 유인해 그녀와 성관계를 가졌다. 이후 어우꺼는 100개의 알이 들어 있는 자루를 낳았다고 전해진다. 위의 내용은『嶺南拓怪』에 나타나는데 이러한 어우꺼의 100명 아들들이 부화하여 나왔다. 그리하여 락롱꿘과 어우꺼는 100명의 아들을 50명씩 나누어 아들 50명은 아버지를 따라 용궁으로 가고 나머지 아들 50명은 어머니 어우꺼와 함께 퐁쩌우(Phong Chau)의 산속으로 들어가 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러한 사유로 인하여 베트남 사람들은 용의 후손이라고 전해진다. 이후 어우꺼 여신의 직계 후손인 훙(Hung)이 베트남 최초의 부족 국가인 반랑(Văn Lang)국을 건국하였다. 최근 발견된 고고학적 유물들에 따라 홍방 왕조가 풍 응우옌(Phung Nguyên)이라는 고도로 발달된 문화를 건설했음을 확인하였다.
락롱꿘과 어우꺼의 장남이 반랑국의 초대 왕인 훙(Hung)이라고 전해진다. 베트남의 고대국가 발생기(B.C 690년~B.C 111년)는 B.C 690년 훙(Hung) 가문이 최초의 국가인 반랑(Văn Lang)국을 건립하고 툭(Thuc) 왕가의 어우락 국(B.C 257년), 찌에우다(Triêu Ða)의 남비엣(Nam Viêt, 남월, B.C 207년)이 차례로 건국되었다. 당시 백월(百越)이라 부르던 민족들이 양자강 주변으로부터 북베트남에 이르기까지 흩어져 살고 있었다. 베트남 역사의 주체는 이들 백월이라 불리던 민족들로부터 생겨났다고 볼 수 있으며 이들은 광동성에서부터 오늘날 광서장족자치구를 지나 베트남 북부에 이르기까지 현재 중국의 남방을 거의 지배했던 민족들로 판단되어 진다. 하지만 신화 속인 부분들을 제외할 때 역사적으로 현재 베트남인들의 기원을 명확히 정리하기는 어렵다. 단지 백월이라 불리던 민족들의 이합집산 속에서 현 베트남의 중심 민족인 킨(Kinh)족이 출현했고 이에 대한 역사는 남월(南越)에서 시작했다 보여 진다. 이들 베트남 인들이 북방에서 도래했으며 남방에 정착했고 백월족으로써 상당히 넓은 지역에 분포한 근거를 보면 당시 고대 베트남인들이 사용하는 언어들을 파악할 수 있다.
이들 고대 킨족들의 언어들을 보면 6개로 세분된 성조가 있다고 해서 이를 시노-티베트(Sino-Tibet)어로 분류하기도 하고, 각종 토착 어휘나 어순, 혹은 꾸미는 말이 명사의 뒤로 가는 배열로 보면 주변의 캄보디아어와 유사하다고 하여 몬-크메르(Mon-Khmer)어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주장도 완전한 설명은 되지 못한다. 단지 몬-크메르어 역시 티베트로부터 기원한 만큼 시노-티베트어가 되었든 몬-크메르어가 되었든 언어들의 시원들을 놓고 볼 때, 베트남인이 북쪽의 중국 대륙으로부터 이동해 온 민족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고고학적으로 볼 때 반랑은 B.C 3세기까지 청동기 문화를 발전시키면서 북부 베트남에 존속했고, 이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은 동고(銅鼓)이다. 그러나 아무리 정교한 유물들을 남겼다 해도 반랑이 체계적인 국가 형태를 가졌다고 하는 근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반랑 왕국의 중심지가 어디인지도 모호하며, 단지 부족 국가의 연합체적 성격을 지녔던 것 같다. 반랑이라는 어원의 뜻이 이 연합체의 수장인 훙 브엉의 직접 지배 영토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고, 전체 영도자인 훙 브엉의 지배권이 미치는 범위를 의미할 수도 있다. 이러한 한 나라의 수도 이름이 국가 이름이기도 한 것은 동남아시아에서 매우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훙 브엉 이하 왕자 및 공주 등의 왕족은 각각 꽌랑(Quan lang, 官郞), 미 느엉(My nuong, 媚娘)이라 불리었고 그 아래로는 락 허우(Lac hau, 雒侯), 락 뜨엉(Lac tuong, 雒將) 또는 훙 뜨엉(Hung tuong, 雄將) 등이 있었다고 한다. 락 허우 이하는 각지의 토착 지배자들로서, 수리 관개 시설 통제를 통해 인민을 지배하는 존재였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