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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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국민들은 오래전부터 팔라비 왕조의 압제를 두고 친미 정권이라는 이유만으로 팔레비를 지원하던 미국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팔레비 왕조의 독재와 부정부패는 더더욱 심해졌고 이에 대한 반발심리도 커지고 있었다. 1960년대부터 여러 차례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지만 그때마다 정권의 유혈진압이 일어나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실패로 끝났다. 그러한 와중에 이란 시아파의 최고 성직자인 대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는 팔레비 왕가 때문에 이란에서 추방되었다. 호메이니는 터키로 망명했지만 이후 프랑스 파리에 자리 잡아 이란 내 반(反) 팔레비 운동을 적극 지원했다.

1979년 1월 4일부터 7일까지 프랑스령 과들루프 섬에서 열린 과들루프 회담(Guadeloupe Conference) 당시의 모습,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따라서 1978년 엄청난 규모의 반정부 시위가 발발하였고 사태가 심각해지자 1979년 1월 16일 팔라비 2세는 휴양을 이유로 이란을 떠나 해외로 망명하게 된다. 이에 이란 혁명이 성공하고 샤푸르 바크티아르(Shapour Bakhtiar, 1914~1991)가 주도하던 과도정권이 수립되었으나 세력이 전무했고 팔레비 절대왕정에 반발했던 민주주의 세력과 외세에 결탁한 집권층들의 부패를 타도하려 하 민족주의 세력, 그리고 여기에 서구식 근대화 개혁 조치에 반대하는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 등 3개 정파들이 헤게모니 쟁탈전을 벌이면서 이란은 혼란의 극치를 달리게 된다.
이에 15년 동안 프랑스에서 망명생활을 했던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1979년 2월에 귀국하여 자신을 지지하는 대중들을 동원하게 되면서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호메이니가 주도하던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은 샤푸르 바크티아르 과도정권을 붕괴시켰다. 바크티아르는 호메이니와 차기 연합 정부 구성을 위한 협상을 벌였으니 호메이니가 바크티아르의 즉각적인 사퇴와 정권 이양을 요구하면서 연정 협상을 거부했고 결국 바크티아르는 프랑스로 망명했다. 호메이니는 1979년 3월 30~31일의 양일 동안의 국민투표에서 99.3%의 압도적인 결과로 인해 신권적 지배 체제인 이슬람 공화국을 수립하게 된다.
호메이니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들은 기존 팔레비 왕조가 추진했던 모든 서구식 제도, 관습, 그리고 온갖 서구적인 문화 및 인프라 등을 부정하고 과거 7~8세기의 이슬람 정통칼리프 시대로의 회귀라는 명분을 주장하면서 중동 세계의 맹주를 자처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서방 세계의 대표적인 상징이면서 국민적 원한 관계에 있던 미국에 대해 도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초기의 이란 신정정권과 미국과 관계는 원만한 편이었다. 그러했기에 미국 정부도 신정정권과 협상 가능성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혁명이 발생한 이후 군수 부품 공급 등을 통하여 관계를 정상화 할 생각도 하고 있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혁명 정부의 이란이나 미국은 서로 간의 현실을 이해하고 있었고 처음부터 맹목적으로 상호 미워하는 관계는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이란의 주변에는 잠재적 적국이자 사담 후세인이 이끄는 바트주의 이라크가 강국이었고, 공산주의의 맹주 소련 등은 여전히 위협적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제압해 줄 수 있는 미국의 힘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호메이니는 입국하기 직전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에게 친미, 반공주의 정부를 수립하고 석유도 계속 공급할 것이니 팔레비군을 제압해 달라고 요구하는 비밀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당시 카터 행정부와 이란 팔레비 왕조는 석유 파동 당시 유가 문제로 인해 사이가 벌어진 상황이었다.
게다가 당시만 해도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들은 반공주의의 선봉에 서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호메이니가 보낸 편지는 크게 영향을 받아 미국은 약속대로 팔레비 군을 통제시켰고, 팔레비의 군대는 호메이니가 귀국할 때까지 공식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내용을 담은 밀서는 기밀이 해제되어 2016년 BBC에 의해 공개되었다. 미국은 호메이니와 이란 이슬람 혁명 자체를 아예 암묵적으로 용인하고, 정권이 뒤집히게 놔두었으며 호메이니가 신정정권을 수립하는데 도움을 주게 된 셈이 되었다. 한편 미국은 호메이니 정권을 반공의 투사로 여겨 지지하기로 했으면 끝까지 믿고 지지해줬어야 했다. 호메이니는 정권을 장악하자마자 공산주의자들을 잔혹하게 탄압해 이라크로 밀어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미 카터 행정부는 신병 치료를 이유로 팔레비 전 국왕의 입국을 허가하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호메이니는 팔레비의 송환을 강경하게 요구했고 팔레비 왕의 지병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의사단 파견을 미국에 제의했으나 이미 이란 이슬람 혁명으로 실권하기 전, 프랑스 의료진으로부터 암으로 인한 말기 선고를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의사단 파견은 의미가 없었기에 미국은 이를 거부했다. 한편 호메이니는 정권을 잡은 직후부터 팔레비를 추종하던 왕당파는 물론이고 반 팔레비 운동을 같이 했던 민주주의 세력과 공산주의자들까지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당시 팔레비 왕가의 샤는 1979년 5월 궐석재판에서 본인과 본인의 일가족들인 레자 팔레비 전 왕세자, 파라 디바 전 왕후 등과 함께 사형을 선고받았다.
팔레비는 암 말기 환자였기 때문에 송환되더라도 사실상 오래 살지 못하고 어차피 죽을 운명이었다. 당시 팔레비를 송환했다면 미국은 굳이 이란과 적대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팔레비를 송환하게 된다면 미국 영향 하에 있던 독재자들을 이용해 먹기 힘들고, 그들 또한 언제든지 버려질 수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어서 그것도 선택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암 말기 환자인 팔레비의 미국 입국을 허용한 것 자체가 처음부터 실수였던 것이다. 이는 이란 시민들이 팔레비 체제를 얼마나 증오하고 있었는지 미국 정보부부터 전혀 파악하지 못해 벌어진 외교 참사였다.
이란 내 강경파의 분노를 촉발시켜 반미 태세로 완전히 돌아서게 된다. 지미 카터의 외교 참사가 현재까지 이란과 미국을 돌이킬 수 없는 관계로 만들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