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3238185&PAGE_CD=N0006&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utm_campaign=naver_news&CMPT_CD=E0033M빨치산의 태평소 소리 좋아했던 미군, 국악의 전도사가 되다[이희용의 월드코리안 12] 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민족·국제 이희용(hoprave)▲가야금 타는 해의만만년의 해...
오늘날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팔레스타인 지방에 있던 토종 유태인들은 지속적인 대규모 이주에도 불구하고 1,0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슬람의 지배를 받으며 점차 동화되었다. 특히 토종 혈통보다는 종교와 언어가 정체성을 규정하는 아랍인의 특성으로 볼 때 이교도에 대한 직간접적인 꾸준한 개종의 시도는 유태인들을 점차 아랍인으로 바꾸게 만들었다. 대표적인 방식으로 이슬람의 율법인 샤리아에 따라 남성 무슬림이 타종교 여성과 결혼하는 것은 막지 않지만, 여성 무슬림이 타종교 남성과 결혼하여 개종하는 상황은 금지되었다. 유태인처럼 모계 세습이 없는 특성상 이슬람교도가 타종교인들을 흡수하게 되니 자연적으로 무슬림들에 계속 증가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슬람 제국 지즈야라는 세금제도의 특성상 일단 세금을 더 내면서 유태교를 믿는 것보다 그냥 세금 내지 않고 이슬람교를 믿는게 편하다고 판단한 토종 혈통 유태인들이 늘어나면서 무슬림이면서 스스로를 아랍인으로 판단하는 자들이 많아지게 된다.

알 자지라(Al Jazeera)에서 제작한 인포그래픽으로 요르단 강 서안 지구(West Bank)에 위치한 이스라엘 정착촌인 모디인 일리트(Modi'in Illit), 출처 : Al Jazeera
그 결과로 인해 점점 팔레스타인 본토의 유태인들은 아랍화되면서 동화되는 추세를 보였고, 유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이들은 극히 소수가 되었다. 1920년대에 팔레스타인 인구 조사에서 현 이스라엘 지역의 토종 유태인의 수는 2~3%에 불과했며 이들의 언어는 히브리어보다 아랍어를 사용했다. 반면 십자군 전쟁의 영향이 짙게 남아 있었던 지역인 만큼 주로 동방 카톨릭 교회나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당시 강제 이주 당했던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에 속한 정교회 인구는 오히려 거의 30~40%에 가까울 만큼 그 영향력이 강력했다. 참고로 20세기 초부터 팔레스타인 기독교인들 중 대다수가 칠레 등 남미 대륙으로 이민을 가는 비중이 높았다고 전해진다. 물론 무슬림들도 상당수 남미로 이민을 갔지만 기독교인들에 비해 비율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더불어 이스라엘이 건국된 이후에는 이민이 가속화 되어서 현재는 기독교인들의 수가 3%에 못미치는 수준에 있다. 팔레스타인 토종 유태인들 내에서도 아랍어와 이에 영향을 받은 히브리 제어들이 언어로 통용되었다.
이후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통치를 받게 되었고 팔레스타인 지방의 일개 호족에 불과했던 자히르 알 우마르(Zāhir ʾĀl ʿUmar, 1689~1775)라는 인물이 전격 등장한다. 그는 종교를 초월하여 팔레스타인이든 토종 유태인이든, 그들의 민생과 복지를 챙겼으며, 따라서 민중들 역시 한 마음으로 그를 지원했다. 그는 갈릴리 지방과 아크레를 중심으로 가자에서 시돈에 이르는 레반트 해안을 지배한 지배한 전형적인 팔레스타인 지도자였다. 그의 부친은 레바논을 지배한 아미르인 파크르 앗 딘 2세(Fakhr al-Din II, 1572~1635)의 신하였으며 오스만투르크와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던 인물이었다. 그의 부친은 파크르 앗 딘 2세가 이탈리아 토스카나 공국으로 망명할 때까지 그를 섬겼다가 그가 망명한 후, 시돈에서 가자에 이르는 지중해 해안 지대를 지배하는 지배자가 된다. 그리고 자히르가 그의 부친의 뒤를 이어 이 지역을 상속받게 된 것이다. 자히르는 종교 정책에 있어 현지의 비주류 종교들에 대해 관용을 유지했던 인물이다. 1742년 갈릴리의 인구 증대를 위해 자히르는 시리아 일대의 토종 유태인들을 초청하여 그들이 신성하게 여기던 도시인 티베리아스에 재정착하게 하였다.
그는 이 지역의 토후로 팔레스타인과 토종 유태인들을 평화롭게 결속시켰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현재 분쟁이 발생하고 있을 때, 아쉬케나지 유태인이나 시오니스트들, 투르크 혼종 하자리안 유태인들과 달리 토종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과의 공존을 호소하면서 내세웠던 인물이 자히르 알 우마르(Zāhir ʾĀl ʿUmar, 1689~1775)였던 것이다. 그는 팔레스타인과 토종 유태인 간 평화로운 공존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공존은 오래가지 못했다. 1775년 자히르는 근대화를 발동한 오스만 군의 우월한 군사력 앞에 토벌되어 전사하고 말았다. 다만 그가 주창한 오스만투르크에게서 팔레스타인의 분리독립은 북부 갈릴리 지방과 해안 지방에 그쳤고 서안 지구인 예루살렘과 나블루스 일대는 여전히 오스만투르크 제국에 충성하는 다른 아랍계와 투르크계 호족들이 다스렸다는 점에서 완전하진 않았다. 이는 원래 팔레스타인 자체가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일부였고 이 시기에 팔레스타인은 민족주의라는 거창한 이데올로기가 존재하지 않았었다.
오스만투르크가 지배했던 1785년 당시 팔레스타인의 인구는 약 20만 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미국 프린스턴 대학 교수 버나드 루이스(Bernard Lewis, 1916~2018)의 연구 <The Arabs in History>에 근거하면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이 지역을 정복했던 초기에는 대략 30만 명의 인구가 존재했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서술했다. 18-19세기 제자르 파샤, 술레이만 파샤, 압둘라 파샤 등 아크레에 기반한 이집트 계통의 맘루크 정권이 자치적으로 통치하였고 이로 인해 팔레스타인 지방에도 일종의 공동체와 같은 의식이 생겨나게 된다. 그리고 이는 기존에 예루살렘 지역에서 고립적이면서 산발적으로 오스만에 저항하여 일어나던 소규모 반란들이 1834년에 발생한 팔레스타인 농민반란 때, 전 지역적이며 종교와 계급을 뛰어넘는 반란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으로 그 공동체가 더 강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근대화된 이집트 군에게 농민 반란군은 적수가 되지 못했다.
당시 2만여 주민들이 학살 혹은 포로가 되고 기존 지배 계급이 붕괴하는 피해를 입었다. 이로써 조금씩 공동체를 인식하고 있던 팔레스타인 민족주의는 다시 침체기를 맞이한다. 결론적으로 팔레스타인 민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태동은 다른 민족과 뚜렷이 구별되는 '팔레스타인 민족'이라는 배타적 정체성보다는 역내에 거주하는 아랍 주민들의 지역 공동체 형성과 그에 대한 충성심의 증가, 그리고 반(反) 오스만주의에서 형성된 자주성의 발현 등으로 보는 것이 옳다. 이러한 팔레스타인 민족주의는 유럽 제국주의가 뿌린 아쉬케나지 유태인들 및 시오니스트들이 팔레스타인 땅에 당도할 때까지 침체되었고 정치적 구심점이 부족한 상황에서 토종 유태인이 아닌 유럽발 유태계 정착민들과 대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