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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근현대 시기 프로이센 정부와 유태인, 아쉬케나지
  • 알렉세이정
  • 등록 2026-04-16 21:26:23

프로이센 정부는 유태인들에게 수공업을 권장했으나 유태인들은 이전부터 종사하던 무역업이나 금융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금융 계통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유태인 고리대금업자에 대한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프로이센 왕국 시절에 생겨났다고도 볼 수 있다. 과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서 행상을 하던 유태인들은 프로이센 왕국에서 대거 은행업이나 주식 시장으로 진출하였는데 1882년 기준 프로이센의 금융업, 주식매매 등에 종사자 중 1/5 가량이 유태인이었다. 1880년대 기준으로 프로이센 대학생의 1/10이 유태인이기도 했다.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은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었으며 자신이 유태인임을 나타내는 특수한 복장의 착용 및 특수한 세금을 부과 받는 것 등의 차별 대우에 노출되어 있었지만 계몽주의의 확대와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프로이센과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의 유태인들 중 상당수는 주류 사회에 동화되었다. 



영국 화가 솔로몬 알렉산더 하트(Solomon Alexander Hart)가 1850년에 그린 〈이탈리아 리보르노 시나고그에서의 율법의 기쁨 축제(The Feast of the Rejoicing of the Law at the Synagogue in Leghorn, Italy)〉, 출처 : My Jewish Learning


이전까지는 아라비아 인들처럼 부계명을 사용하던 유태인들이 이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성씨를 쓰기 시작한 것이 대표적으로 그 권익이 발전된 사례다. 폴란드 분할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프로이센 영토의 유태인들은 상당수가 도시 부르주아들로 성장해 나갔으나 러시아 제국 영토 내 우크라이나 일대 유태인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산업 발전이 지체되었기 때문에 부르주아로 성장하는 속도가 다소 늦어졌다. 물론 폴리트(Polit)의 유태인 소작농들은 새로운 황무지를 개간하고 정착한다는 조건 하에서 현지 폴란드 인, 우크라이나 인 농노들보다 훨씬 지대 부담이 적은 편이었으나 대규모의 유태인 포그롬이 활발해진 이후 사정이 변하였다. 근대 동유럽 농촌 지역에 거주하던 지주들은 도시에 있는 유태인 부르주아들이 자신들의 권위를 위협한다고 의심했으며 라트비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의 농노들은 유태인들이 독일인, 폴란드 인의 앞잡이라 여기며 증오했다고 한다. 


산업혁명 시대가 되자 농촌 인구가 도시에 빈민으로 유입되면서 민족주의의 성장과 더불어 반유태주의가 성장하기 시작했다. 19세기 초반에는 동유럽 유태인의 상당수가 보드카 양조 산업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유태인들은 지역 사회 알코올 중독과 관련한 폐단의 원인으로 몰리곤 했다. 19세기 말 키시네프 포그롬을 계기로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출신의 유태인 상당수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을 떠나 해외로 이민했지만 러시아 출신 유태인들은 유럽의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고 싶어도 현지 토착 유태인들의 차별로 고초를 겪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키시네프 포그롬 이후 영국으로 이민한 유태인들의 사례를 들 수 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출신의 유태인 이민자들은 기존에 이미 영국 사회에 자리 잡고 있던 유태인들에게 빈민들로 멸시와 차별을 받았다. 


당시 영국 정부는 러시아에서 이주해 온 유태인들을 처리하기 어려운 존재로 여기고 영국령 우간다 계획 등을 세우기도 했는데 여기에는 비(非) 러시아 출신 유태인들의 주장들이 다소 반영되었다. 프로이센이나 프랑스 등에서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심지어 현대 아슈케나지 유태인 사회에서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및 소련 출신, 이른바 동부 유태인들과 서유럽의 아슈케나지 유태인 사이의 갈등은 적지는 않은 편이다. 1970년대 소련의 유태인 이민 허용이나 소련 붕괴 이후 새로 미국이나 이스라엘로 이민한 아슈케나지 유태인들은 모두 부유할 것이라는 편견과 다르게 상당수가 빈곤층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이유에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 러시아 제국 출신 유태인들은 비교적 동유럽 출신 유태인에 대한 차별이 많지 않았던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데, 이들은 오늘날 미국 유태인들의 직계 기원에 해당된다. 


한편 이렇게 이주한 유태인들 중 빈민들이 많았기 때문에 범죄에 빠르게 유혹되어 유테인 마피아나 폴란드 마피아 중에 아슈케나지 유태인 출신들이 많다. 벨라루스나 우크라이나 출신 유태인들은 해당 지역의 벨라루스 인과 우크라이나인 민족주의자들의 반목이 심했던 편이었고 당시 미국으로 이주한 동유럽 유태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동유럽에서 찾는 것을 거부했다. 서유럽은 상황이 비교적 나았던 편이었지만 유럽 내 자유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프랑스에서마저 20세기 초반 사회 전체를 뒤흔들었던 드레퓌스 사건이 발생하면서 아쉬케나지 유태인들 사이에서는 시오니즘이라는 사상이 크게 유행하게 된다. 1930년 초반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의 수효는 대략 1,500만 명 정도로 추정되었으며 이 중 900만여 명 가량은 유럽에 거주하고 있었다. 폴란드 제2 공화국에는 330만여 명, 소련에는 300만여 명, 헝가리와 루마니아에는 120만여 명, 독일에 52만여 명, 오스트리아에는 18만여 명의 유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치 독일에 의해 자행된 홀로코스트는 이 900만 명의 유태인들 가운데 약 600만 명의 학살당했으며 그 중에서도 세계에서 가장 유태인들이 밀집해 있던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우크라이나 일대에서의 피해가 매우 심각했다.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에서는 전체 유태인들 중 90~91%가 학살되어 거의 멸절되다시피 했다. 홀로코스트 이후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의 중심지는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동되었으며 현재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의 숫자는 약 1,00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 가운데 미국에 거주하는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이 대략 500만 정도이며 이스라엘 본토에 거주하는 아쉬케나지 계통 혈통들이 300만 정도에 이른다. 나머지 국가에 거주하는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을 도합한 것이 200만 정도로 계산된다. 홀로코스트로 인하여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의 문화는 거의 멸절되었는데 특히 약 500만 명의 화자를 가지고 있던 이디시어는 사실상 사어가 되었다. 


다행히 문헌이나 음성 자료들이 상당히 많이 남아 있어서 보존은 가능하다고 한다.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을 판가름하는 구분은 일반적으로 서유럽에 거주한다는 배경 하에 유태교 신앙을 하고 있는지의 유무여부였다. 하지만 19세기에 민족주의가 전파되면서 상황이 복잡하게 전개되는데 폴란드 등의 동유럽은 근대까지 민족이라는 개념이 희소했기 때문에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 같은 민족이라는 소위 언어 민족주의가 당시의 주류 사상이었다. 그러한 결과로 인해 아쉬케나지 유태인 사이에서도 이디시어 구사 여부가 중요한 기준으로 자리 잡게 된다. 19세기 후반 혈연적 민족주의가 정착한 이후에는 종교를 공유하는 문화적 민족 개념이었던 아쉬케나지 유태인 역시 혈연적 민족으로 변모하였는데 이들은 이스라엘 토속 유태인과의 혈연적 민족도 아니었을 뿐더러 오랜 통혼으로 인하여 외양으로 아쉬케나지 유태인을 다른 현지 유럽인들과 구분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고 나치 독일은 뉘른베르크 법을 통하여 4대 조상 기준으로 50% 이상 유태인의 혈통으로 나타나면 유태인으로 분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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