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3.3 〈인간사회 폐악적 관행〉
저는 인간사회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하나의 관성을 문제 삼고자 합니다.
부당한 피해가 발생했을 때조차
교감 능력은 쉽게 작동하지 않으며,
역지사지의 노력 또한 빈번히 생략됩니다.
그 결과, 피해를 입은 존재는 위로받기보다
오히려 2차 가해에 노출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문제를 제기할 경우,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되며,
구조를 성찰하기보다
개인이 감내하지 못한 책임으로 전가되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현실의 다양한 사례에서도
이와 유사한 장면을 반복적으로 목격하게 됩니다.
정당한 문제 제기나 개선 요구에 대해
“싫으면 떠나라”는 식의 응답이 돌아오곤 합니다.
이 말은 표면적으로는 선택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책임을 회피하고
구조적 문제를 고착화하는 기능을 수행합니다.
더욱이 아이러니한 점은,
이러한 태도를 보이는 이들이
정작 공동체가 합당한 책임을 이행해야 할 순간에는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거나,
오히려 방해적 위치에 서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
정치, 경제, 사회, 학문 등 다양한 영역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피해를 발생시키는 구조는 유지되고,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는
과민하거나 부적응적인 것으로 치부됩니다.
그 사이에서 공익은 점차 약화되며,
약탈적 관행은 마치 자연스러운 질서처럼
관성화되어 갑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문명의 질을 가늠하는
기준에 대해 사유하게 됩니다.
가령, 어떤 외계 문명이 존재한다고 가정할 때,
그 문명의 수준은 단순한 기술력이 아니라
관계 규칙의 질과 그것을 실제로 이행하는 능력에 의해
평가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관계 규칙의 수준이 낮고
이행력이 부족한 약탈적 문명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는 선택이
오히려 합리적인 판단일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인간을 부정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가 현재 어떤 문명적 단계에 서 있는지를
되묻기 위함입니다.
피해를 감내하라는 관성을 반복할 것인지,
아니면 관계 규칙의 질과 책임 이행력을
지속적으로 높여가는 방향으로 전환할 것인지.
그 선택이 곧 문명의 성격을 규정하게 될 것입니다.
〈사상과 제도 속 부정, 부패, 비리〉
인간이 집단을 이루고 체계를 구성하는 순간,
어떠한 사상과 제도가 기반이 되더라도
부정과 부패, 비리가 완전히 사라지는 일은
사실상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이 문제는 특정 이념이나 구조의 결함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저는 그 근본 원인을
인간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찾고자 합니다.
인간은 이해관계와 욕망, 두려움, 인정 욕구,
그리고 자기합리화의 경향을 동시에 지닌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제도를 설계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본질적 특성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결과, 제도는 이상을 전제로 구축되지만,
그 운영은 인간의 취약성과 왜곡 가능성 위에서 이루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왜곡이 반복됨에도 불구하고,
그 본질을 직시하기보다
점차 관성적으로 관대해지는 태도가 형성된다는 점입니다.
작은 타협은 관행이 되고,
관행은 문화로 굳어지며,
결국 구조적 왜곡은 일상화됩니다.
따라서 체계의 완전성을 추구하는 것보다
더 본질적인 과제는
인간의 한계와 왜곡 가능성을 전제로 한 설계,
그리고 그 왜곡을 최소화하기 위한
지속적인 점검과 조율의 과정일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조율여백의 사유는 단순한 철학적 명제를 넘어
구조와 인간 사이의 간극을 인식하고,
그 간극을 줄이기 위한 실천적 방법론으로 기능할 수 있습니다.
즉, 완전한 통제를 지향하기보다
끊임없는 조율과 여백의 확보를 통해
왜곡의 총량을 줄여가는 접근이야말로
보다 현실적이며 지속 가능한 문명적 방향일 것입니다.
조율여백 이수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