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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왕자 정지룡(鄭芝龍), 동아시아 해양 실크로드의 전성기를 구축한 인물
  • 알렉세이정
  • 등록 2026-04-17 21:55:00

정지룡의 부친 정사표는 복건에 자리 잡고 남안현(南安縣)에 기거했다. 정지룡이 젊었을 때는 이단(李旦)이라는 상인 밑에 일을 했다. 이단(李旦)은 본래 동남아시아 해상에서 유명한 밀무역자인데 그와 그의 부하들 대부분은 복건성 출신이었다. 당시 유럽 세력이 서진을 하여 대항해시대를 열면서 아시아의 해상 세력들과 교역을 하고 싶어 했다. 특히 그 중에서 포르투갈이 가장 적극적이었는데 이단(李旦)은 포르투갈 뿐 아니라 뒤이어 들어온 스페인, 네덜란드와도 교역을 했다. 이들 유럽 국가들이 이단(李旦)과의 교역에서 남은 이문은 상당했다. 특히 명나라 조정에서는 일본, 서양세력과의 교역에 대해 꺼림칙하게 생각했지만 이에 대한 교역으로 세금의 상당 부분을 명나라 조정에 바쳤기 때문에 이러한 상업적인 교역에 대해 눈감아 주고 있었다. 

바다의 왕자 정지룡(鄭芝龍)의 해적단,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당시 유럽인들은 중국에 대한 사정을 잘 몰랐기 때문에 이단(李旦)이 내놓은 정보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단(李旦)은 중국인 특유의 화법, 부풀리기로 인한 공갈로 상당한 이득을 갈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 통역이 정지룡이었는데 정지룡은 남방 상인의 통역자로써는 대단한 능력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정지룡은 중국어, 광동어 뿐 아니라 일본어, 포르투갈어, 네덜란드어, 스페인어에도 능했고 류큐어, 당시 베트남어인 쯔어, 심지어는 조선어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능력이 좋은 정지룡의 언어 실력 수준은 물론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무역상이 심층적으로 전공 언어로 대화한 것도 아닌 이상 어느 정도 일상 대화 수준이거나 상업적인 거래에 있어 필요한 수준이었을 것이다. 


이는 그가 그들과의 대화에서 글 같은 것을 남겼으면 그 수준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그런 것은 남아있지 않았다. 본래 정지룡은 글을 쓰거나 읽을 줄 몰랐다는 이야기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정지룡은 어렸을 때부터 학문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해도 단지 힘만 좋았을 뿐 무예가 그다지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어쨌거나 당시 중국이든, 베트남이든, 일본이든 정지룡만큼 서양 언어를 할 수있는 사람이 몇 없었던 것은 분명한 팩트다. 정지룡은 어렸을 때부터 힘 하나는 끝내주게 좋았던 모양이다. 쌀 3~4 가마니를 한번에 들고 걷는가하면 언월도 두 자루를 양손에 들고 자유자재로 다루었다는 설이 있을 정도니 보통 장사는 아닌 셈이다. 여기저기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깡패짓도 하고 다녔고 특히 18세 때 자신의 계모와 성관계를 갖다가 들키자 마카오로 도망가서 지내기도 하였다. 


마침 마카오에는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자리 잡고 있었고 상인들도 제법 많았다. 아마도 정지룡은 이들 포르투갈 인들과 어울리면서 포르투갈어와 스페인어를 배웠던 것 같다. 그리고 몇몇 친구를 만들기도 했는데 그들 중 한 명은 후일 정지룡의 호위 무장이 되었다. 그러면서 정지룡은 이단(李旦)의 상단에 취직해서 일을 했는데 상단에서 행수 역할을 하면서 상당히 높은 고위직으로 승진하게 된다. 이 때 정지룡은 일본을 방문하게 되는데 일본에 체류할 때 히라도에서 마쓰라 씨의 하급 가신인 다가와 시치자에몬 (田川七左衛門)의 딸과 관계를 갖고 아들을 출산하게 된다. 그가 바로 정성공(鄭成功)이다. 결국 정성공은 어머니가 일본이고 아버지가 복건성 베트남 피가 섞인 화교로 두 피를 타고 태어난 셈이다. 1620년대 후반 청나라의 공격과 각 반란에 시달리던 명나라 조정은 정지룡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의 무장선단의 힘을 빌려 청나라와 반란 세력을 막겠다는 것이다. 1627년 명의 숭정제(崇禎帝)는 사신을 보내 정지룡에게 칙서를 내려 전 해역을 통제하는 도독으로 임명했다. 북쪽 만주의 청나라와 교전을 해야 하는 명나라로써 해상에서 이이제이(以夷制夷) 수법을 선택했던 것이다. 해적 소탕을 해적에게 맡긴 셈이다. 그러나 정지룡에게는 공을 세워 제대로 출사할 수 있는 기회였다. 명나라 조정의 관리가 되면서 동시에 자신의 경쟁자들을 물리치는 계기가 되었다. 정지룡은 상단을 이끌고 출전해 경쟁자 허심소의 상단을 제압했다. 살아남은 허심소의 부하들은 정지룡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정지룡 세력은 크게 확대되었다. 이로부터 정지룡은 중국 연안의 전 해상을 지배하는 왕이 되었다. 


1628년 청나라 조정은 정지룡에게 초무(招撫)라는 벼슬을 내려 자신들의 편으로 회율하려 했다. 정성공이 7살 되던 해 아버지 정지룡은 동생 정지아를 일본 히라도에 보내 아들 정성공을 복건성 본가로 데려 오도록 했다. 그때 정성공에겐 어머니 다가와가 다른 남자와 만나 낳은 배다른 동생이 있었다. 다가와는 본처를 두고 있는 정지룡에게 가지 않겠다고 하였고, 아들 정성공만 삼촌을 따라 가게 했다 어머니와의 이별은 정성공에겐 많은 상처를 남겼다고 한다. 정성공 관련 대만의 기록에는 정성공이 매일 밤 어머니가 있는 동쪽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정성공 집안은 아버지 정지룡 대부터 부가 왕후에 못지않아서 중국 복건(福建)에 명성이 널리 퍼져있었다. 정성공 대에 와서는 복건(福建), 절강(浙江), 그리고 광동(廣東)의 동해안을 제압해서 5천척의 정크를 거느린 해상왕국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정성공은 대만, 일본, 류큐(지금의 일본 오키나와), 필리핀, 베트남, 태국에 근거지를 폈다. 정성공의 정크선단은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 초기의 해외무역인 주인무역(朱印貿易)이라든가 중국 및 일본과 교역 루트를 찾아 돌아다닌 포르투갈, 네덜란드, 스페인의 3파전을 교묘하게 이용하며 동아시아 바다에서 해상왕국을 구축했다. 또 정성공의 해상왕국은 서몽골의 오이라트 정벌에 정신이 팔려있던 청나라 정권의 북방정책도 계산하여 이같은 세력을 만들 수 있었다. 정지룡의 부친 정사표는 복건에 자리 잡고 남안현(南安縣)에 기거했다. 정지룡이 젊었을 때는 이단(李旦)이라는 상인 밑에 일을 했다. 이단(李旦)은 본래 동남아시아 해상에서 유명한 밀무역자인데 그와 그의 부하들 대부분은 복건성 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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