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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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트족과 로마 문명이 만나는 카이사르의 브리타니아 정복기(Julius Caesar's invasions of Britain)를 <갈리아 전쟁기(Commentarii de Bello Gallico)> 뿐 아니라 각종 문서와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기의 브리타니아 정복 문서까지 혼용해서 보고 있는 중이다. 오늘날 영국으로 알려진 브리튼 섬은 고대 그리스가 지중해를 중심으로 패권을 형성하던 고전적 고대시기에 이미 주석의 산지로 그리스 세계에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의 지리학자 피테아스(Piteas)는 B.C 4세기에 브리튼 섬 연안을 탐험했다.

고대 프랑스 일대에 분포되어 있는 켈트계와 게르만계 민족들,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그보다 이전인 B.C 5세기 페니키아의 후예 카르타고 항해자 히밀코(Himilco)가 북유럽 해안지대를 탐험하면서 브리튼 섬은 이미 지중해를 비롯한 고전 고대 유럽 세계에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로마 시기에 들어서도 브리튼 섬은 로마인에게 여전히 바다 건너 세상 끝에 있는 미지의 섬이었고 심지어 몇몇 로마 기록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겨지기도 했을 정도였다. 로마인들은 피테아스의 모험과 항해를 이야기 형식으로 꾸며낸 이야기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다. 카이사르가 갈리아 일대를 정복하고 있을 때 브리튼 섬은 철기 시대 문화를 지니고 있었고 인구는 100만에서 400만 명 정도였으며 대부분 켈트족이 정착하고 있었다.
고고학 조사에 의하면 경제 활동은 크게 저지대와 고지대로 분류되어 있었다. 브리튼 섬 저지대의 동남부는 비옥한 토양으로 인해 농작의 발전이 가능했고 고대 교역로가 만들어져 있었다. 브리튼 섬의 경우 템스 강 역시 중요한 교역로였다. 한편 고지대는 글로스터에서 링컨을 이어주는 선을 기준으로 파스토랄(Pastoral) 방식의 목축이 가능한 지역이 곳곳에 흩어져 있을 뿐이었기 때문에 농작을 하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북쪽 고지대의 정착지는 주로 둔덕진 언덕에 요새화되어 있고 주변의 목축지를 이용하는 것이었지만, 남동부 저지대에서는 오피둠(Oppidum) 형태의 요새화된 대규모 정착지들이 생겨났다.
이들 저지대 읍락에서는 강줄기를 이용한 교역이 중요한 경제적 요소였다. 브리튼 섬은 이미 갈리아 나르보넨시스(Gallia Narbonensis)가 로마에 복속하기 이전부터 유럽 대륙과 교역로로 연결되어 있었고 오늘날의 브르타뉴 반도를 중심으로 한 아르모리카(Armorica) 지역을 거쳐 이탈리아 반도의 포도주가 도싯(Dorset)의 행기스트버리 헤드(Hengistbury Head)로 수입되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브리튼 섬에 대해 갈리아 북부의 벨가이 족이 건너와 정착하고 있었으며 정치권력 역시 갈리아의 영향 아래에 있어 수에시오네스 족의 왕이었던 디비키아쿠스에게 복종하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당시 브리튼 섬에서 통용되던 화폐들은 잡다하게 나타나는데 B.C 100년 무렵의 갈리아-벨가이 화폐나 B.C 150년 무렵의 갈리아 화폐 등이 켄트 지방을 중심으로 통용되고 있었다.
후대로 가면 도싯에서 서쪽으로 멀리 떨어진 남부 지방 연안까지 화폐가 사용되었고 이는 벨가이 족의 인구와 영향력이 그만큼 크게 성장했음을 의미하고 있다. 벨가이(Belgae) 족은 현재의 벨기에와 네덜란드, 프랑스의 일부를 합친 현 플랑드르 지역의 켈트족을 지칭하는 종족으로 이들은 브리튼 섬까지 그 영향을 행사하고 있었다. 벨가이 족은 물론 로마로부터 상당히 떨어져 있어 상인들이 왕래도 어려운 지역이었고 이들은 브리튼 섬의 웨섹스(Wessex), 요크셔(Yorkshire) 지역에 대거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 종족은 갈리아 전쟁을 계기로 역사에 나타났으며 그 이전에는 수에비 족으로 통칭되기도 했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Commentarii de Bello Gallico)>에 의하면 갈리아 전체를 갈리아, 아퀴타니아(Aquitania), 벨가이의 셋으로 분류하였고 언어, 관습, 제도가 서로 다르며 벨가이 족이 게르만 계통 종족들과 인접해 있는 이유로 인해 가장 호전적인 종족이라 기록했다.
벨가이(Belgae)는 현재의 플랑드르 지역의 켈트족 원주민들을 일컫는 라틴어이다. 벨가이는 로마로부터 멀리 북쪽에 떨어져 있어 상인의 왕래조차 뜸한 지역이었으며 갈리아 전쟁을 계기로 역사에 등장했다. 그리고 현재 벨기에(Belgium)의 국명이 이 종족의 명칭을 차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