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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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점령군이 항복하고 모스크바가 해방되자, 키예프 국민군 총사령관 포자르스키(Позалский) 공작은 이듬해인 1613년에 새 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젬스키소보르를 소집했다. 그 동안 내란의 상처를 치유하고 차르를 선출하여 정통성 있는 정부를 세우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회의에는 성직자 · 귀족 · 사족 · 도시민의 대표들과 약간의 농민대표가 참가했다. 먼저 슬라브 족이 아닌 외국인은 일단 차르 후보에서 배제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러한 차르 후보를 두고 오랜 회의와 토론 끝에 미하일 로마노프가 차르로써 강력한 후보로 대두되었다. 이 회의는 러시아 역사상 모든 자유 계급의 대표가 처음 참석한 것으로 평가된다.

중세 러시아의 야외 국회, 젬스키소보르(Земский Собор),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로마노프 가문은 당시 슬라브인에게 인기 있는 가문이었다. 로마노프 가문이 인기 있었던 이유는 이반 뇌제의 훌륭한 황후로 알려진 아나스타시아(Анастасия)가 로마노프 가문 출신이었고 차르 선출 당시 폴란드에 포로로 붙잡혀 있던 미하일 1세의 부친인 필라레트(Филарет)도 슬라브인들에게 선정을 베풀었기 때문에 모든 시민의 계층에게 두루 신망을 얻고 있었다. 더구나 미하일 1세가 당시 1세의 어린 나이였다는 것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최악의 러시아 동란으로 인해 폴란드인이나 차르를 사칭하는 자들을 섬기거나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러시아 정교회 총주교 게르모겐(Гермоген)이 천거했다는 것도 신망을 높이는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과연 위와 같은 부분이 전체적으로 슬라브인들을 통치하는데 인정을 받을 수 있는 부분인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요소들이 많다. 가령, 동란이나 식민 지배의 통치 하에서 갓 독립했던 슬라브인이 쇠퇴한 모스크바 대공국의 이름만 차르였던 그 후계를 이전 모스크바 대공국의 차르와 같은 혈통, 혹은 단순한 민중들에게 선정을 베풀었던 부분, 그리고 국난을 막 벗어나 전체 시민들을 안정시킬 수 있는 중요한 시기였다. 러시아 역사상 모든 자유 계급(Все Бесплатные Занятия)의 대표가 처음 참석한 것으로 평가되는 이 국민 의회는, 로마노프 집안의 17세 소년인 미하일 로마노프를 차르에 선출하여 로마노프 왕조를 출발시켰다. 미하일 로마노프는 이반 Ⅳ세의 첫 번째 왕후의 오빠인 로만 로마노프의 손자이다.
그는 최고 통치자가 되기에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의 즉위와 더불어 그동안 폴란드에 인질로 잡혀 있던 부친 필라레트 로마노프가 돌아와 1613~1633년의 기간에 공동 차르로 선언되었다. 로마노프 왕조는 이처럼 모스크바 국민군과 그리고 비교적 광범위한 계층의 이익을 대표한 국민 의회에 의해 탄생되었다. 그러나 그 통치자들은 국민과의 협조를 통한 통치보다는 모스크바 대공국 때 굳어진 전제 정치에 의존했다. 미하일 1세의 17세라는 어린 나이의 즉위는 분명 납득하기 어려운 선택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귀족들로써는 가장 중요한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로마노프 가문은 위와 같은 이유들 말고도 슬라브인들을 대대로 수호했던 가문이었다는 것이고 폴란드나 스웨덴 같은 강대국의 위협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미하일의 즉위 때부터 약 10년 동안 왕조의 기반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젬스키소보르는 해마다 개최되었다. 그러나 왕조 초기의 문제가 어느 정도 안정 되자 차르는 젬스키소보르를 멀리하기 시작했고, 1670년대 이후에는 거의 소집하지 않았다. 일정한 선출 방식이 마련된 예도 전혀 없었고, 소집될 때마다 구성원의 사회적 성격도 달라졌다. 중앙 보야르(Бояал)들이나 지방 도브랸(Довляан) 귀족들도 관료 기구로의 충원을 더 희망했고 대의 기구의 발전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로써 러시아는 전제정치로 치닫게 되는데, Василий Ключевский (바실리 크류체브스끼)는 저서 <Курс Русской Истории>를 통해 언급하기를 "로마노프 왕조의 초기 지도자들이 젬스키소보르를 발전시켜 나가고, 그 왕조 탄생의 토대로 자리 잡았던 시민과의 협력을 중시했더라면 러시아의 역사와 세계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 이라고 젬스키소보르와 차르의 원활하지 못한 Коммуникация (소통, 대화)를 아쉬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