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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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노프 왕조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 속에 있지만, 모스크바 귀족 가문 중의 하나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 그러나『러시아연대기』에 따르면 로마노프 가문의 선조는 ‘코빌라(암말)’ 라는 별칭을 가진 안드레이 이바노비치(Андрей Иванович)이다. 그는 1347년 벨리키 블라디미르 및 모스크바 공후였던 시메온 이바노비치 고르디(Симеон Иванович Гордй)를 위해 봉직한 인물이었다.

어린 소년인 미하일 로마노프에게 차르의 관을 바치는 모스크바 총대주교, 출처 : 미하일 고르킨(Михаил Горкин) 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박물관에서 필자의 직접 촬영
그의 후손인 표트르 니키티치 자하린(Пётр Никитич Захартн), 차르 미하일 표도로비치(Михаил Пётровч)의 부친인 총주교 필라레트(Фиарет)는 이를 기리기 위해 그들의 이름과 부칭에서 ‘로마노프(Романов)’라는 성(姓)을 정한 것에서 로마노프 가문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로마노프 가문이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6세기 류리크 왕조의 인척이 되면서부터이다.
1547년 로만 유리예비치의 딸 아나스타시야 로마노브나 자하리나(Романовна Захарина)가 이반 4세의 왕후가 된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류리크 왕조가 절멸하고 왕위계승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로마노프 가문은 왕권 경쟁의 후보로서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1613년 필라레트의 아들 미하일 표트르비치 로마노프가 새로운 왕으로 선출됨으로써 로마노프 왕조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로마노프 왕조의 통치는 근본적으로 전제군주제의 기틀 안에서 이루어졌다. 섭정이나 측근 정치에 의존하는 시기도 있었고, 재능 있는 인물들이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했으나 궁극적으로 모든 국가 사안은 군주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최종적으로 결정되었다. 따라서 군주 개인의 성향과 능력에 따라 국가 발전의 행로가 결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제정이 가지는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모든 계층의 구성원들이 ‘아버지 차르’의 권위주의적 지배에 의지하는 가부장적 국가형태가 조성되었다.
전제정치와 함께 로마노프 왕조의 정치 체제를 지탱한 것은 관료제였다. 거대한 국가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군주를 위해 복무할 관료들의 참여가 불가피했다. 전제정의 행정실무를 담당한 관료들은 대부분 귀족 계층이었다. 이들 귀족 관료들의 부패와 피지배 계층과의 갈등은 원활한 국가 통치를 저해하는 주된 원인이었다. 따라서 개혁의 시기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행정의 비효율성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들이 이어졌다. 왕조의 영토가 확장됨에 따라 중앙과 지방을 아우르는 효율적인 관료제 확립은 국가 발전의 필수적 요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