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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가 파나마 운하를 노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 1편 : 파나마 운하의 역사
  • 알렉세이정
  • 등록 2026-04-19 21:40:11

19세기 말, 미국은 중남미 지역으로의 세력 확장과 더불어 파나마의 전략적인 위치를 고려해 파나마 운하를 착공하려 하였다. 해당 시기는 대서양에서 태평양에 이르는 아메리카 대륙의 영토들을 대량으로 확보했던 시기였고 이 영토의 활용도를 구상하던 중, 해군을 비롯한 바다를 통한 무력 투사가 어려웠고, 물류도 쉽지 않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당시 미국은 남아메리카 끝 푸에고 섬의 마젤란 해협을 돌아 바다를 통한 물류의 비효율적인 부분을 타개해야 한다는 고민에 쌓여 있었던 시기였다. 그래서 남북아메리카를 연결하는 고리가 가장 짧은 부분이 어디인지를 탐사한 결과 파나마 일대가 가장 적당하다는 것을 파악했다. 따라서 미국은 1903년 1월 22일, 당시 파나마를 영유하고 있던 콜롬비아 측에 1,000만 달러를 즉시 제공하고 연간 25만 달러 씩 제공하는 조건으로 파나마 운하 지대와 주변 8km 지역에 100년간 조차지를 세우고 미국에 양도한다는 내용의 헤이-헤란 조약을 맺게 된다. 미국 상원은 이를 비준했지만 콜롬비아 상원은 더 나은 조건을 모색하기 위해 이를 거부했다. 문제는 계약 조건이 운하를 건설하고 그 외의 조차지를 삼는 것에 대한 비용이 너무 적다는 이유에서였다. 

파나마 운하,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따라서 콜롬비아 상원은 이를 비준하지 않고 더 많은 금액을 요구하자 미국은 이를 즉각 계약하지 않고 결국은 무산되었다. 그러자 미국은 파나마의 분리주의 세력에게 접근했다. 당시 분리주의 세력을 이끌었던 지도자는 마누엘 아마도르 게레로(Maunel Amador Guerrero)로 70세가 다된 노구의 몸을 이끌고 대를 이어 독립투쟁을 이끌고 있었다. 본래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던 파나마는 19세기 콜롬비아가 시몬 볼리바르의 독립 운동으로 인해 독립을 쟁취하면서 그란 콜롬비아 가맹국인 콜롬비아의 주(州)로 함께 독립하였다. 그러나 콜롬비아 육지 본토와 붙어 있으면서도 깊은 정글에 격리된 지역적 특성을 가진 다리엔 갭(Darién Gap)은 파나마와 콜롬비아 정부의 그다지 깊지 않은 유대감을 갖지 않은 대표적인 곳이기도 하다. 게다가 콜롬비아 본국 정부에게 식민지 같이 착취당하고 있었기에 종종 콜롬비아 정부에 저항해 다리엔 갭 정글 지역을 중심으로 분리 독립 운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독립 투쟁은 대부분 콜롬비아군에 의해 무력으로 진압당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이 마누엘 게레로에게 접근한 것이다.

당시 미국은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가 집권하던 시기로 큰 막대 정책(Big-stick diplomacy)을 앞세워 미국의 국익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루즈벨트는 미 해군을 파견시켜서 압력을 행사하면서 마누엘 게레로의 파나마 분리주의 반군을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이와 같은 압박을 견디지 못한 콜롬비아는 1903년 11월 3일 파나마의 독립을 승인했다. 콜롬비아군은 파나마에 개입을 하려했으나 미 해군은 카리브 해 북쪽 카르타헤나 항구에 들어가 이를 적극 방해했다. 결국 파나마는 미국의 도움을 받아 독립에 성공한다. 그리고 마누엘 게레로는 대통령에 당선이 되어 파나마 초대 대통령이 된다. 파나마가 독립한 이후인 1903년 11월 18일, 헤이-뷔노 바리야 조약(Hay–Bunau-Varilla Treaty)이 미국과 파나마 양국 간에 체결되면서 본격적으로 운하 건설이 합의되었다. 이 조약으로 미국은 1,000만 달러의 차관을 파나마 측에 제공하고 파나마 운하를 무기한 임대했다. 그러나 미국은 파나마 운하를 건설하면서 각종 어려움에 시달리게 된다. 그 어려움이 가장 큰 것은 바로 "모기"였다. 파나마 지역은 예나 지금이나 말라리아 창궐지역으로 악명 높은  곳이다. 운하를 파면서 구덩이까지 파게 되자 거기 찬 물에 모기들이 자라 모기가 더 많이 늘어 말라리아와 황열병에 시달리는 환자들이 넘쳐나게 된다.

그 사이 미국은 말라리아에 대한 대처를 연구하기 시작하여그 매개체가 모기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된다. 그 전에는 답이 없었던 말라리아의 매개체가 파나마 운하 건설로 인해 무엇인지 밝혀진 것이다. 미국 육군 공병대가 공사를 맡은 가운데, 의무 지원을 총괄한 육군 군의소장 윌리엄 크로포드 고르거스(William C. Gorgas, 1854~1920) 장군이 말라리아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공사 지역마다 신선한 물을 공급할 시설을 건설하고, 공사 지역 내의 건물이란 건물은 살충제로 가득 채웠으며 모기의 서식지가 될 연못이나 웅덩이마다 석유를 부어서 모기의 번식을 원천봉쇄했다. 이렇게 말라리아 문제를 해결한 고르거스는 당시에는 생소하게 여겨지던 전기까지 끌어와 운하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하여 1914년 8월 15일에 완공되었다. 이러한 파나마 운하의 건설이 이루어지는 동안, 6,000명에 가까운 사망자를 냈고, 이 운하 개통공사 과정에 총 28,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공사 중에 사고보다는 말라리아와 황열병으로 인한 사망자가 반 이상을 차지했다. 이처럼 엄청난 희생의 댓가로 건설된 파나마 운하를 미국은 아주 유용하게 사용했다. 

미국인들은 파나마 운하가 건설되고 8km 이내의 조차지까지 생성되자 많은 수의 사람들이 이주하기도 했으며, 이들을 위한 인프라가 많이 세워졌다. 파나마 운하에는 미국 남부 사령부(USSOUTHCOM)가 설치되기도 하여 미국의 군사적 요충지로도 사용되었다. 이처럼 파나마는 미국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면서 미국에게 있어 절대로 잃어서는 안 되는 곳으로 부상했다. 파나마 운하로 인한 미국의 성공이 가시화 되자 돌연 파나마 내에서는 파나마 운하 지대를 반환 받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더불어 파나마 운하 지대에 거주하던 파나마인들도 조차지가 파나마로 되돌려지길 원했다. 이러한 이유는 파나마 국기가 파나마 운하 내에서 게양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말이 조차지이지 사실상 미국령이나 다름 없었다. 게다가 파나마 운하에서 근무하던 노동자들은 "골드 롤"과 "실버 롤"로 분류되었는데, 골드 롤은 미국인 노동자들이었고, 실버 롤은 비(非) 미국인 노동자들로 엄청난 차별을 받았다. 실버 롤 노동자들은 급여, 주택, 교육 측면에서 극심한 차별을 받으면서 미국의 지배 하에 살 바에야 파나마로의 귀속이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결국 1959년 11월 3일 파나마 독립 기념일에 맞춰 파나마인들이 파나마 운하 지역으로 몰려가 반미 시위를 했고 이를 미군이 경찰과 군대를 동원해 진압했고 시위대 2명을 체포했으며, 9명이 사망하자 이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자 유혈 사태는 격화되었고, 1962년 10월 15일 쿠바 미사일 위기까지 터지자 존 F. 케네디는 파나마에도 소련의 공산주의 세력이 들어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된다. 결국 1963년에는 존 F. 케네디가 파나마 운하에서 파나마 국기와 성조기를 둘 다 게양할 수 있게 허가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가 불러온 미국의 다급한 조치였기에 존 F. 케네디가 사망하면서 다시 문제가 불거졌다. 파나마 운하 지대 주지사인 로버트 존 플레밍(Robert John Fleming, 1907~1984)은 미국과 파나마, 양측 국기를 더 이상 게양하지 말라는 방침을 내렸다. 이에 미국인들은 성조기를 게양할 수 없다는 것에 반발했으며 이 방침을 무시하고 파나마 운하 지대의 발보아 고등학교에 성조기를 단독으로 게양하자, 파나마인 학생들이 몰려가 파나마 국기를 게양하겠다고 요구했다.

그러자 이는 당연히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유혈 충돌이 발생한다. 이 과정에서 파나마 국기가 찢어지고 사고가 발생했고 이는 1964년 1월 9일 시위로 확대되었다. 이 시위는 급격히 유혈 충돌로 벌어졌고 이 시위는 1959년 사건과 다르게 심각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미국 기업의 공장들은 거의 폭도들의 화재로 전소되었고, 5,000명 정도의 시위대들은 미국인들을 상대로 한 총격전도 마다하지 않았다. 결국 28명이 사망했고, 324명이 부상당했다. 이 사건은 파나마 시민의 인권을 존중하지 않은 미국에 대해 중국과 소련, 쿠바 같은 공산주의 국가는 물론, 영국과 프랑스 같은 전통적인 나토 소속 우방국들과 베네수엘라, 브라질과 같은 라틴아메리카의 친미 국가들도 모두 미국을 비난했다. 파나마 정부도 미국을 강력하게 비난한 것은 물론이고 1964년 1월 10일 마침내 미국과 단교하게 된다. 마르코 아우렐리우스 로블레스(Marco Aurelio Robles, 1905~1990) 대통령은 소련과 동맹을 맺겠다는 당시 미국이 아주 경악할만한 발표를 하게 된다. 물론 로블레스 대통령은 1968년 쿠데타로 축출되어 소련과의 동맹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파나마 운하 지역을 둔 분쟁은 지속적으로 일어난다. 결국 당시 미국 대통령인 지미 카터는 파나마 운하의 반환을 결정하게 되고, 1977년 9월 7일 토리호스-카터 조약(Torrijos-Carter Treaty)을 맺게 된다. 이 조약은 당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 오마르 토리호스 전 파나마 대통령은 파나마 운하 통과 선박 규제와 운하 관리, 운영, 개선, 보호, 방어 등 미국 정부가 장악하고 있던 운하 관리권을 파나마 정부에 완전히 넘겨주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결국 이를 문제 삼은 것은 48년이 지난 도날드 트럼프가 토리호스-카터 조약(Torrijos-Carter Treaty)을 무시하고 파나마 운하에 대해 재획득을 하겠다고 나서게 된 것이다. 1979년 10월 1일 파나마 운하를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을 파나마 측에 반환했으며 파나마인들은 운하 자체를 반환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고, 1999년 12월 14일 파나마 운하 반환 협정을 맺고 그해 12월 31일 파나마 운하를 반환했다. 결국 1914년에 완공된 이후 85년 만에 미국에서 파나마로 운하가 완전히 넘어갔다. 권한 이양 행사 당시 미국 정부의 고위 공직자는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는 미국이 파나마 운하에 가진 미련을 드러내기도 했었다. 결국 이는 트럼프가 재소유권을 주장하면서 26년 만에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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