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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제에 저항했던 우크라이나의 위대한 선조 보흐단 흐멜니츠키(Богдан Хмельницький)
  • 알렉세이정
  • 등록 2026-04-19 21:55:47

- 폴란드에 대한 저항의 아이콘인 인물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 가면 중심가에 보흐단 흐멜니츠키(Богдан Хмельницький)의 동상이 있다. 게다가 우크라이나 5흐리브냐의 모델이기도 하다. 그가 우크라이나 역사와 국민들에게 있어 위대한 인물로 추앙받는 이유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 대해 항전했던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보흐단 흐멜니츠키(Богдан Зиновiй Михайлович Хмельницький, 1595~1657)는 우크라이나의 코사크 인들의 지도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1648년부터 1657년까지 카자크 수장국의 수장을 역임했다. 흐멜니츠키는 카자크 가문에서 태어나 폴란드에서 교육을 받고 폴란드의 정규 카자크 부대에서 활약하게 된다. 1647년 12월에는 폴란드 출신 귀족과의 분쟁으로 인해 자신의 영지인 치히린(Chihirin)과 모든 주도권을 폴란드에게 넘어가자 흐멜니츠키는 비정규 카자크의 본거지였던 자포리자 카자크의 요새로 도주하게 된다. 이후 1648년 카자크의 최고 지도자인 헤트만으로 추대된 뒤부터 반란을 일으켰다. 

폴란드에 대한 저항의 아이콘인 인물, 우크라이나의 위대한 선조 보흐단 흐멜니츠키(Богдан Хмельницький),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이는 역사적으로 흐멜니츠키 봉기(1648년~1657년)로 기록되며 많은 사회적 모순점에 대한 저항을 야기 시켰다. 또한 그의 반란은 애초부터 카자크라고 하는 하급 병사 집단이 일으킨 것이기 때문에 농민, 도시민, 성직자들의 높은 지지를 받았다. 흐멜니츠키가 이끄는 군대는 1649년 8월 폴란드군과의 즈보리우(Zboriv) 전투에서 크림 타타르족을 지원하여 승리했고 같은 해 8월 17일에 체결된 즈보리우(Zboriv) 조약을 통해 자치권을 인정받게 된다. 이 조약은 사실상 흐멜니츠키가 독립적인 카자크 수장국을 수립하는 것을 허용하는 내용이었지만 당시 사회의 근간이던 농노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는 그가 봉기를 일으킨 명분 자체에 농민들에 대한 처우를 개선하는 것에 문제가 있었다. 흐멜니츠키는 그러한 기존의 모순적 제도들을 그대로 이어가려 했고 이러한 정책으로 인하여 차차 농민의 지지율이 떨어졌다. 이후 흐멜니츠키는 농노들을 단속하고 있던 우크라이나 인근의 대지주들에게 절대적 지지를 얻게 된다. 

농노제 철폐를 못한 것은 흐멜니츠키 봉기가 실패하는 큰 원인이 되었다. 게다가 폴란드 정부와 귀족들, 근처 동유럽 국가들의 지지 또한 얻지 못했다. 이는 사실 흐멜니츠키의 봉기가 동유럽 사회에 만연하여 가지고 있던 기득권의 위협이 될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흐멜니츠키의 봉기는 기존 농노제의 개혁이라는 것에서 모순이 생기게 되자 봉기의 동력을 잃기 시작했고 흐멜니츠키가 이끄는 군대는 1651년 6월에 일어난 베레스테츠코(Berestecko) 전투에서 크림 타타르족의 배신으로 인해 패배하고 만다. 이후 흐멜니츠키는 1652년 8월 폴란드 군의 침공하자 크리프이 리에서 전투에서 폴란드 군을 격퇴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크리프이 리 조약을 성사시켜 이를 통해 우크라이나 남부 지역의 영토를 접수하는 것을 인정받게 된다.

이 조약은 사실상 흐멜니츠키가 카자크 수장국의 영토를 확대하는 내용이었지만 서쪽에는 합스부르크 왕조와 더불어 오스만투르크 제국 등의 강대국들이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영토를 확보하지 못했다. 그리고 1653년 6월에 일어난 몰다비아 전투에서는 오스만투르크의 공격으로 인하여 크게 대패하고 서방을 지키는 군대의 수가 무력화되었다.  우크라이나 카자크들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오스만투르크 제국, 크림 칸국의 위협을 받고 있던 상황에서 동방 정교회 신자였던 흐멜니츠키는 같은 그리스 정교회를 신봉하고 있던 러시아 로마노프 차르국의 지지를 요청했다. 1654년 1월 페레야슬라프 조약을 통해 우크라이나 카자크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러시아 로마노프의 차르로 있던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러시아 군대를 끌어들여 보호 받으려 했다. 흐멜니츠키는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의 지원을 받으면서 우크라이나의 대부분 지역을 수복하였지만 이는 곧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오랜 지배를 받게 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는 상황으로 몰리게 된다. 1654년 러시아 차르국이 폴란드를 상대로 한 전쟁에 참전하면서 러시아-폴란드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그리고 1655년에는 스웨덴이 폴란드를 상대로 한 제2차 북방 전쟁에 참전하면서 폴란드는 큰 타격을 입게 되었고 이는 폴란드의 중세 정권이 붕괴되는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1657년 흐멜니츠키가 사망하면서 흐멜니츠키 봉기도 끝나게 된다. 이 전쟁을 계기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쇠퇴하게 되었고 러시아 로마노프 차르국이 세력을 확장하게 된다. 또한 카자크에 대한 폴란드의 영향력이 소멸되면서 카자크 수장국은 잠시 독립을 맞았지만 흐멜니츠키 사후 30년 뒤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에 신속하게 된다. 보흐단 흐멜니츠키는 이러한 코사크인들의 불만을 대변하여 봉기를 일으켰지만 제도는 기존 동유럽 중근세 제도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는 흐멜니츠키가 민중과 농민들에게서 변심했다라기 보다는 동유럽 중근세의 시스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거기에 쓸려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봉기가 사회적 시스템을 흔들 수 있는 중요한 요소였지만 약 1,000년 동안 이어온 신분 계급의 고착화는 변경하기에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코사크 인들과 마찬가지로 흐멜니츠키 또한 글자 하나를 읽지 못한 문맹의 상태였다.

특히 지도자의 문맹은 당장의 혁명에서 성공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라를 경영하는데 있어 어떠한 선택이 민중과 농민을 위하는 것인지 판단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러한 문맹과 더불어 1,000년을 이어온 사회적 시스템에 변화를 꾀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따라서 흐멜니츠키의 실패는 그 당시 사회성으로 볼 때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던듯 싶다. 그러나 흐멜니츠키의 봉기는 또 다른 농민 반란을 불러왔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서 푸가초프의 난과 스텐카 라진의 난이 그것이다. 그러한 봉기들이 이어지자 동유럽 근세사는 조금씩 변화의 가능성을 열게 되었고 결국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창출하게 된다. 결국 흐멜니츠키의 봉기는 볼셰비키 혁명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농민 개혁의 신호탄이 되었고 계층 간의 갈등이 조금씩 좁혀져 범근대적 사회 요소를 형성하였다는 것에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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