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욕망 일반과 인간의 욕망에 대해: 욕망은 억제해야만 하는가?
욕망에 대한 근대의 긍정적 관점
인간적 욕망과 인정욕구
헤겔의 인정투쟁
왜 오늘 날 인정투쟁이 유효한가?
권리 인정과 가치 인정, 그리고 연대
1. 오늘 우리는 욕망에 대해, 그것도 특별히 인정 욕구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욕망 혹은 욕구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을 것입니다. 당장 배가 고플 때 먹고 싶다는 식욕, 이성과 짝짓기나 혹은 쾌락을 추구하려는 성욕, 그리고 자기 것을 지키고 더 가지려는 물질에 대한 욕구(소유욕/탐욕) 등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런 욕망을 이야기하다 보면 너무 간단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 다들 욕망하는데 왜 그게 문제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말하지 않아도 잘 안다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그럴까요? 내가 원하는 것이 과연 나의 욕망이고 나는 그 욕망을 잘 알고 있을까요? 여러분들은 지금 무엇을 욕망하고 있나요? 그 욕망이 참으로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나요? 둘째, 이런 욕망은 자연스런 것이기 때문에 동물이나 인간이나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동물과 인간 모두 자연적 욕망이란 면에서 차이가 없을까요? 셋째, 이런 욕망이 파멸로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욕망은 항상 억압과 금기의 대상이었지요. 과유불급(過猶不及). 과연 욕망은 그렇게 파괴적이기만 할까요?
2. 먼저 욕망이 자연적이기 때문에 동물이나 인간이 별로 차이가 없다는 생각을 한 번 보지요. 사실 욕망의 근원은 생명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생명이 있기 때문에, 그 생명을 지키려는 데서 욕망이 나오지요. 그 생명을 유지해야하기 때문에, 먹어야 하는 식욕이 있고, 그런 식욕을 좀 더 유리하게 하기 위해 자기만의 영역이나 소유를 유지하려고 하지요. 이런 욕망은 물질 욕이나 소유욕으로 나타납니다. 다음으로 그 생명의 전승, 세대 간 재생산을 위해 동물들은 짝짓기를 하지요. 사실 이렇게 본다면 동물이나 인간이 모두 별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은 특별히 인간적입니다. 우리가 '인간적'이란 표현을 쓸 때는 식물이나 동물들 다른 생명체들과 다르게 특별히 인간적 특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3. 인간의 식욕은 단순히 결핍을 채우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자는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서는 잔인하게 사냥을 해도, 일단 포식하면 곁에 영양이 있어도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식욕은 단순히 허기를 채우는 것을 넘어서 끊임없이 맛있는 것을 찾습니다. 로마의 귀족들은 먹은 것을 게워 놓고 다시 먹는 것을 즐겨 했다고 합니다. 자기 것을 지키려는 소유욕은 동물들에게도 나타나지만 인간적인 소유욕은 한도가 없습니다. 때문에 인간 사회에서는 이런 끝없는 소유욕으로 인해 갈등과 투쟁이 일어나고 사회적 불평등이 일반화되고 있습니다. 이런 불평등은 문명의 발전과도 크게 상관이 없는 듯합니다. 불평등이 부도덕하고 부정의하다고 비난하면서도 여전히 심화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불평등 지수는 세계 최고!] 이런 점에서 인간의 소유욕은 동물의 본능적인 소유욕을 넘어서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성욕과 관련해서도 인간과 동물의 본능적 욕구는 질적으로 다른 차이가 있습니다. 동물들의 성욕은 일정한 발정기가 있고, 그 목적은 세대의 재생산에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성욕은 그런 본능적이고 직접적인 욕구를 넘어서 쾌락 자체를 추구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늘 날 인간의 성욕에서 세대 재생산이 차지하는 비율은 점점 줄어들고 있지요. 이런 몇 가지 측면에서 보아도 자연적 욕구에서 조차 인간의 욕망과 동물의 욕망 간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욕망에서 조차 굳이 '인간적' 욕망이란 표현을 쓰려고 하는 것입니다.
4. ‘인간적 욕망’이란 표현을 쓸 때 우리는 인간의 욕망의 다양성과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과도한 욕망이 파멸의 원인이 되는 경우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욕망을 단순히 부정적이거나 억압의 대상으로만 보는 것이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불교의 삼독인 탐(貪) 진(瞋) 치(癡) 가운데 첫 번째가 탐욕으로서의 욕망입니다. 플라톤의 인간관에서도 배에 해당하는 부분이 욕망을 담당합니다. 하지만 불교나 플라톤이 아니더라도 동서양의 종교나 철학에서 욕망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는 아주 드믑니다. 그래서 욕망의 덕은 절제이고, 끊임없이 억압의 대상입니다.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 나오는 신화에 보면 욕망은 이성이 휘두르는 채찍에 의해 훈육당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플라톤이 『국가』에서 '여성공유제'를 주장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부인을 공유하고, 자녀를 공동으로 양육하자는 것인데, 사실 이런 주장은 재산공유제를 주장한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보다 훨씬 과격한 주장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플라톤이 이런 주장을 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가 보기에 국가를 타락시키는 사적 욕구는 남녀의 잠자리에서 나오고, 내 새끼와 내 마누라를 지키려는 [사적인] 욕구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여성 공유제’는 이런 사적 욕망을 원천적으로 막아 국가를 지키려는 플라톤의 고육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대에 모든 욕구는 타락의 원인이자 억압의 대상일 뿐입니다. 드물게 양생 론을 주장하는 도가 계열이 이런 욕망의 긍정성을 이해했지만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5. 고대와 근대의 차이는 어쩌면 욕망에 대한 부정성과 긍정성의 차이로 보아도 좋을 듯합니다.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는 욕망을 부정적으로만 대하지 않습니다. 그는 도덕적 선의보다는 ‘사적인 이기심’이 사회적 생산력을 끌어 올리고 사회 전체의 이익을 도모한다고 봅니다. 모든 경제 행위는 나의 욕망을 실현하는 데서 옵니다. 하지만 이런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타자의 욕망을 이해해야 하고, 이렇게 욕망들 간에 전면적으로 의존됩니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움직이는 시장의 원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적인 이기심은 이런 시장을 움직이는 중요한 동력이 되는 것이지요. 욕망은 이제 부정적 대상이 아니라 긍정적 원리가 됩니다. 소유에 대한 욕구에 기초해서 노동을 하게 되고, 그 노동의 객관적 산물이 재산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로크와 같은 자연법론 자들은 재산을 욕망하는 나의 의지의 표현이자 확장으로 보기도 하는 것입니다. 19세기 후반에 가서 무의식의 본질이 욕망임을 드러내면서, 20세기에 들어오면 이런 욕망이 전면적으로 해방됩니다. 아무튼 동물과 공유하는 것 같은 자연적 욕구에서도 인간의 욕망은 특별합니다. 우리는 그 중에서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욕구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사실 이런 욕구는 앞서 이야기한 다른 욕구들과 달리 유다르게 인간과 인간이 사는 사회에서 드러나는 욕구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인정욕구'입니다.
6. 이 '인정욕구'를 설명하기 위해 예를 들어볼게요. 얼마 전 중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인터넷 뉴스에 뜬 적이 있습니다. 절벽에서 위급한 상태에서 재난 구조를 받던 한 청년이 막상 구조대가 다가오니까 제일 먼저 부탁한 일이 있습니다. 당장의 자기 목숨보다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에 올릴 사진을 찍어줄 것을 부탁한 것입니다. 그에게는 당장의 목숨 이상으로 자기가 무엇을 했다는 것을 남들이 알아주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겠지요. 요즘 장안의 히트작인 <국제시장>에서도 주인공 덕수는 마지막에 자신의 힘들었던 삶을 돌이키면서 아버지의 인정을 구한다. “아버지! 저 이만하면 약속 잘 지켰지예? 저 진짜 힘들었거든요!” 아버지의 인정이 그의 삶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보루인 것이다. 인간은 이미지에 목을 매는 존재입니다. 제품 자체보다 그 브랜드를 더 따질 때 자신이 어떤 브랜드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타인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다는 것이지요. 이런 브랜드에 대한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정은 동물적인 자연적 욕구나 과잉 욕구를 넘어서 인간들 사이의 관계에서 비롯된 욕구입니다. 자의식을 가진 인간은 자기 자신을 -자신의 지식, 자신의 가치, 자신의 언어, 자신의 능력, 자신의 업적 등- 타자로부터 인정을 받고자 합니다.
7. 여러분들도 어린 시절에 좋은 성적을 받으면 제일 먼저 부모님에게로 달려가 '나 백점 받았어'라고 자랑하고 인정을 받고 싶어 한 경험들이 있었을 겁니다. 성장하는 것은 이런 자신의 인정을 서서히 확장시켜 나가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따라서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인정에 대한 욕구는 자신의 존재와 생명 이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닙니다. 공자가 말년에 한 말이 있습니다. 人不知而不溫이면 不亦君子乎아.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니 이 또한 군자 아닌가?” 나는 공자의 이런 말을 볼 때 성인인 공자도 인정욕구에 많이 시달렸다고 생각합니다. 식솔과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자신의 경륜을 펴려고 천하를 주유할 때 공자 역시 수많은 푸대접과 굴욕을 받았을 겁니다. 경륜을 편다는 것은 곧 군주의 인정을 받는 일이니까요. 공자도 그런 군주들로부터 수없이 문전 박대를 당하면서 성숙해진 것이라 볼 수 있지요. 그래서 더는 이제 타인들로부터의 인정에 매달리지 않게 되고, 그들의 거친 말조차 거슬리지 않게 되면서(耳順) 비로소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니 이 또한 군자 아닌가?”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궁극에 가서는 내가 나를 인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만큼 ‘인정욕구’는 자아와 인격의 성장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겠지요.
8. 이쯤에서 ‘인정욕구’를 철학의 중요한 주제로 삼은 독일 철학자 헤겔(1770-1831)의 분석을 한 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의 분석틀은 오늘 날 ‘인정’ 개념에 관한 많은 논의의 초석이 되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중요합니다. 그에 따르면 자립적 의식을 가진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타인에 의해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타인 역시 똑 같이 인정을 받고자 합니다. 이런 인정은 자신의 자유를 확장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인정을 받으려는 나의 노력은 동시에 타인의 노력과 충돌할 여지를 안고 있습니다. 여기서 헤겔은 두 자립적 의식의 관계가 나와 너의 상호 인정으로 정상화될 수 없는, 일종의 투쟁관계이자 권력 관계로 발전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모든 싸움과 투쟁이 그렇듯 결국은 목숨을 건 생사 투쟁이 됩니다. 상대방을 죽여야 내가 사는 게 싸움의 본질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상대방이 죽으면 누구한테 인정을 받을 수가 있을까요? 결국 죽도록 싸우고 죽을 만큼 싸우지만 죽고 나면 처음 가졌던 타인의 인정이라는 싸움의 의미가 사라집니다. 그래서 목숨만은 보존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 투쟁에서 자연적 생명을 내던지고 자신의 위신과 자유를 지키려는 자가 승자가 되고, 자유를 포기하는 대신 생명을 부지하려는 자는 패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인정투쟁을 통해 주인-노예라는 수직적 권력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자립적 인간들 사이의 인정이 투쟁으로 이어지고 권력 관계를 만든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회의 모든 권력관계와 불평등 관계의 밑바탕에는 이런 인정에 대한 욕구가 깔려 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인정투쟁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9. 노예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주인의 명령 하에 고된 노동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인은 승리의 대가로 노예의 노동의 산물을 향유하게 됩니다. 그런데 노예가 하는 일이 만만치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한 가지 예입니다. 이 예를 통해 다른 종류의 노동에도 확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단 노동의 대상이 저항을 합니다. 농사를 지어도 그게 마음대로 되지가 않지요. 토질을 알아야 되고, 어떤 작물이 그 토질에 잘 맞는지를 알아야지요. 다시 말해 물성(物性)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농사를 지을 수가 없지요. 또 농사를 시작할 때도 때와 기후 조건 등을 잘 알아야 하지요. 모내기를 잘 해야 하고, 여름에 가뭄이 들면 적절히 물을 끌어와 용수해야 하는 일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병충해의 피해를 입지 않도록 끊임없이 신경을 써야 할 겁니다. 열심히 농사를 지어서 가을에 추수를 하려고 하니까 웬걸 태풍이 몰아쳐 하루아침에 애써 가꾸어 놓은 것을 날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숱한 고생을 하면서 수확을 할 때 보람도 느낄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니라 주인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 처지의 노예에게 수확물은 다시 주인의 인정을 받아야 하는 단계가 남아 있습니다. 수확물에 대한 주인의 인정은 노예의 노동에 대한 최종적인 승인 절차라고 할 수가 있을 겁니다. 이렇게 노예가 주인을 위해 일하는 과정은 대상의 저항과 주인의 위협과 공포라는 이중적 저항을 거치면서 이루어지는 고된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노예는 그만큼 자신의 지혜를 일깨우고 자신의 역량을 알아가게 됩니다. [노예의 노동은 처음에는 주인의 강요에 의해 수동적으로 이루어졌지만, 노동하는 과정에서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노예의 잠재 능력을 일깨우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반면 주인은 인정투쟁에서 승리한 탓으로 노예의 노동의 결실을 향유할 수 있습니다. 승자는 패자의 생존권을 장악하고 그를 노예로 부릴 수 있지요. 주인은 그러므로 더 이상 자연을 상대로 직접적인 대결을 하고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주인은 노예를 매개로 자연과 상대하며 노예의 노동의 결실을 향유만 하면 되는 것이지요.]
10. 헤겔의 인정 투쟁에서 우리는 아주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처음에 주인과 노예라는 불평등한 관계가 영구화되는 것이 아니라 전도될 수 있다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노예의 노동과 주인의 쾌락의 향유가 갖는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적어도 헤겔에게 노동은 타율적으로 강제된 고통스러운 행위만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첫째 노동은 무엇보다 ‘저지된 욕구’입니다. 노동하는 노예는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할 수 없습니다. 노예는 늘 자신의 욕망을 다른 목적을 위해 억제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노예는 참고 유예하는 법을 아는 것이지요. 이런 ‘저지된 욕구’가 금욕적이거나 부정적인 의미만 갖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의 욕망을 유예한다는 것은 미래를 위해 기획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둘째 노동은 대상의 저항을 경험하면서 대상의 물성과 물리를 깨달아 나가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물성과 물리를 깨달아 가는 것이 곧 자신의 잠재된 능력과 역량을 깨달아 나가는 것이기도 하지요. 반면 노동하지 않는 주인의 경우는 자신의 향유와 삶을 노예에게 의존을 하다 보니 오히려 자립적 존재에서 의존적 존재로 전도되는 수가 있지요. 그래서 헤겔이 인정투쟁에서 제시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의 결론은 노예가 오히려 주인이 되고, 반면 주인은 노예로 전락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노예의 노예가 주인이고, 주인의 주인이 노예라는 것이지요. 즉 불평등한 인간관계가 노예의 노동을 통해 반전되고 있습니다. 물론 오늘 날 자본주의 현실에서 헤겔이 말하는 노동이 액면 그대로 긍정적으로 이해되기는 어렵지요. 앞서 이야기한 비정규직의 불안한 고용과 그에 따른 인격 모독과 무시, 그리고 마르크스가 비판한 것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파편화되고 단편적인 노동은 노동자가 자신이 하는 일의 긍정성을 찾기가 힘든 경우가 많지요.
11.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머리가 빠른 사람은 ‘인정투쟁’이 단순히 불평등한 주인-노예의 관계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했을 겁니다. 그렇지요. ‘인정투쟁’의 의미는 첫째, 인간들 사이의 관계에서 ‘인정욕구’가 갖는 중요성을 보여준다는 점에 있습니다. 앞서도 잠시 이야기 했지만 인정 욕구는 사회적 관계를 중시하는 인간에게 유별난 욕구입니다. 물론 동물에게도 이런 욕구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가령 집에서 키우는 애완동물을 보면 끊임없이 주인에게 사랑을 받고 인정을 받으려고 합니다. 주인과의 교감의 정도가 높아지면 더욱 이런 주인의 인정에 반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관계 속의 존재는 타자의 인정이 자신의 생명과 존재를 확인하는 중요한 계기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인정이 타자와의 관계, 좀 더 확장한다면 사회적 관계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할 때 이 인정은 다른 어떤 존재들보다도 인간에게 중요한 계기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인간은 이런 인정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사회성을 학습하기도 합니다.
12. 사회학자 미드(Mead)는 자아의 정체성과 도덕성이 성장하는 데 이런 ‘자기와 타자의 인정 관계’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에 의하면 자아 안에서 또 다른 자아와의 갈등과 인정관계가 성립합니다. 주격 ‘나’와 목적격 ‘나’의 관계, 혹은 주체로서의 ‘나’(I)와 객체로서의 ‘나’(Me)의 관계가 그런 인정관계입니다. 자아는 자기 안에서의 이런 인정관계와 갈등을 통해 자아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기 위해 부단히 자신을 째찍질 하기도 합니다. 내가 누구인가, 나는 왜 이렇게 행동하고 그 의미가 무엇인가 등은 끊임없이 다른 나의 인정을 요구합니다. 이 때 다른 나는 사회적 자아라고 할 수 있지요. 이런 자아는 성장하는 과정에서 일차적으로 부모가 맡고, 유치원에서부터는 학교의 선생님이 맡는 경우가 일반적일 것입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경우에서도 보듯, 가부장적 사회에서는 아버지의 인정이 아이의 성장과 인격, 그리고 정체성 형성에 큰 역할을 합니다. 또 우리나라처럼 성적 지상주의와 경쟁이 치열한 입시제도 하에서는 학교의 선생의 인정이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학교를 졸업해서 사회생활을 할 때도 경쟁이 치열할수록 사람들은 타인의 인정 혹은 사회적 인정을 끊임없이 확인합니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주격 ‘나’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인정하는 목적격 ‘나’는 사회적 타자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미드는 이런 타자를 ‘일반화된 타자’라는 개념으로 표현합니다. 자아는 이런 일반화된 타자와 갈등 관계를 겪고 인정을 받으면서 성장하는 것이라고 하겠지요. 이 때 이 ‘일반화된 타자’는 사회의 도덕률과 관습을 자아에게 내면화시켜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또는 사회적 경쟁 속에서 생존할 수 있도록 지배 이데올로기를 학습시키는 역할도 할 것입니다. 타자의 인정은 한편으로 나를 성장시켜주는 역할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사회의 지배적 욕구에 순응하는 존재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타자의 인정욕구가 갖는 이중적이고 이율배반적인 측면일 것입니다.
13. 둘째, 이런 ‘인정욕구’가 비대칭적이고 수직적인 인간관계를 만들 수 있습니다. 미드의 이야기를 좀 더 발전시켜 보지요. 주격 ‘나’가 취약한 경우에는 목적격 ‘나’의 역할이나 지배력이 클 수밖에 없지요, 주격 ‘나’는 끊임없이 목적격 ‘나’의 관심과 사랑을 구하고, 또 인정을 구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자아가 성장하면 어느 순간 양자의 분리가 일어나고 또 역전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개성이 강한 주체는 일반화된 타자의 지배를 극복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여전히 자아의 정체성이 성장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주격 ‘나’와 목적격 ‘나’의 관계는 비대칭적이고 수직적인 관계에 머무를 수밖에 없겠지요. 현실을 둘러보면 사회적 구조 안에서 불평등한 관계로 진행되는 경우가 훨씬 많지요. 일단 가족 내에서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도 대등한 관계라기보다는 수직적이고 비대칭적인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부장적인 가족 관계에서 부모는 일방적으로 자녀들에게 명령하고 금지하는 경우가 더 많지 않을까요? 자녀들은 부모를 어려워하면서도 부모의 인정을 받으려고 애를 쓰고 그것이 미치지 못할 경우 힘들어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도 가족들 간에는 사랑이 밑바탕에 있어서 심하게 질책하거나 무시하는 경우는 드물겠지요. 여기 계신 분들 스스로 자녀와의 관계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수긍이 갈 수 있을 겁니다.
14. 인정이 자아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반면, 불평등한 고용 관계나 수직적인 지시가 일상화된 비대칭적 관계 속에서 무시나 모욕을 받는 경우에는 자아의 정체성을 파괴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IMF 이후 신자유주의의 정신이 일반화되면서 고용이 대거 불안해지고 비정규직이 양산되면서 고용주와 단기 비정규직간의 관계, 대기업 안에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관계에서 드러난 불평등 관계로 인해 인격적인 무시와 모욕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지요. 흔히 한국사회에서 거론되는 ‘갑-을 관계’나 ‘갑 질’이 다 이런 사정을 반영하고 있을 겁니다. 얼마 전 강남의 모 아파트에서 경비원이 분신자살을 시도한 사건이 있었지요. 입주민이 상시로 경비원을 인격적으로 모독한 것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입주자 대표 회에서 직접 고용한 것도 아니고 용역업체에서 파견 나온 경비원들의 지위는 대단히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입주민이 어떤 비인격적인 주문을 해도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는 인간이자 직업인으로서 정상적인 인정과 대우를 받지 못한 것에 분노를 느끼고 그것을 안타깝게도 분신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런 인격적인 무시는 한 사람의 생명을 파괴할 만큼 치명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날 이런 경우를 비정규직 노동자나 감정 노동자 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목도할 수 있습니다. 인격에 대한 무시와 모독은 물리적인 폭력 이상으로 한 인간의 인격을 파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나 주격 ‘나’의 주체성이 약한 한국인들에게 인격적인 무시와 모욕은 더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15. 이처럼 인격적인 무시와 모욕은 한편으로 피 억압적 자아를 파괴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분노와 저항을 유발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분노와 저항은 훼손된 인격과 권리를 회복하고 인정받으려는 운동의 밑거름이 되기도 합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제 3세대 학자인 호네트의 ‘인정투쟁’의 개념은 현대 사회에서 ‘권리에 대한 인정’이 중요함을 일깨웁니다. 그는 헤겔과 미드의 이론을 발전시켜 ‘인정투쟁’을 오늘 날 규범적 사회이론의 중요한 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귄리에 대한 인정은 경제적인 문제 이상으로 인간의 자존심과 인격적 존엄과 관련이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런 기본적 권리가 유린되고 무시되는 경우를 우리는 너무 많이 보고 있습니다. 특히 사회적 약자의 경우에 이런 권리 침해가 더욱 많이 벌어지고 있지요. 학생으로서의 권리, 여자로서의 권리, 장애인으로서의 권리, 성적 소수자로서의 권리, 노동자로서의 권리, 소비자로서의 권리 등 사회의 각 부문에서 우리는 수많은 주권자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만큼 주권자로서의 우리 권리가 훼손되고 박탈당하는 경험도 겪을 것입니다. 인정 개념은 여기서 이런 우리 자신의 권리를 자각하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16. 앞서 지적했지만, 주격 ‘나’의 주체성이 약한 우리 문화의 특성상 무시나 모욕이 한 개인의 영혼에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아파트 관리 노동자는 그로 인해 분신자살까지 했습니다. 당연히 분노가 치밀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이마저 쉽지가 않습니다. 사회적 스트레스의 강도가 높다 보니 이런 현상들이 일반화하는 경향도 없지 않습니다. 이런 처사를 접할 때 우리는 당연히 분노가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하지 못하는 것은 자아의 주체성 결여와 연관이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권리 침해와 관련해서 분노할 때 종종 개인의 모든 삶이 흔들리는 경우가 있을 겁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말도 있듯, 우리 사회는 이런 문제들을 개인적 부담으로 밀어 넣는 경우가 많습니다. 권리는 개인의 사적인 이익의 문제가 아닌, 그가 속한 사회적 주체로서의 보편적 권리와 상관이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이런 귄리가 훼손돼서 그것을 보호하고 복원시키려고 하다 보면 그 순간 완전히 외톨이로, 고립된 개체로 환원되는 경우를 볼 수가 있을 겁니다. 인정 개념은 이런 순간에서도 큰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훼손된 가치에 대한 인정이고, 그것을 복원시키기 위한 가치 연대에서 인정 투쟁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습니다. 가령 소비자 권리의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한 두 사람의 소비자가 거대한 기업을 상대로 불이익이나 권리를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것을 항의하기란 어려울 것입니다. 이 때 같은 문제의식 혹은 가치를 공유하는 일군의 소비자들이 연대할 경우 그만큼 권리 회복이 쉬워질 것입니다. 일종의 가치 인정에 따른 연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가치 연대는 환경 운동이나 소수자 권리 인정 운동, 장애인 연대 운동 등 가치의 세분화가 이루어지는 만큼 얼마든지 확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동일한 가치를 공유하고 그것을 인정받으려는 것이 하나의 사회운동으로까지 발전하는 경우입니다. 이런 면에서 ‘인정투쟁’은 경제적 이익을 둘러싼 계급투쟁이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른 권력투쟁의 단순한 도식을 넘어서 무시된 권리나 훼손된 가치를 중심으로 다양하게 확장될 수 있는 것입니다.
17. 이제 이 강의를 마무리하면서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져보지요. “왜 우리는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가?” 인정은 우리가 이 사회 속에서 타인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존재 이유’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그것이 무시되고 모욕될 때 우리는 분노하고 저항하고 투쟁하게 됩니다. 결국 나도 인정하고 너도 인정하는 사회, 상호 인정하는 사회는 이런 갈등을 넘어서 공존하는 사회, 더불어 사는 좋은 사회를 만들어가는 작업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