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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의 자유선거와 왕을 선거로 뽑는 제도, 오늘날 입헌군주제의 시작
  • 알렉세이정
  • 등록 2026-04-23 01:39:53

- 입헌군주제는 영국이 아니라 폴란드가 시초였다. 

왕위 계승이 세습제였던 야기에우워 왕조의 마지막 왕인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가 1572년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서거해 왕위가 공석인 상태였다. 귀족들은 공석인 왕의 자리를 두고 어떠한 방식으로, 그리고 누구를 새로운 공화국의 통치자로 내세울지를 의논한 끝에 의회에서 ‘자유선거(Wolna elekcja)’로 왕을 선출하기로 결정했다. 국왕 선출을 위한 선거에는 귀족의 일부, 대 귀족들만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귀족 모두가 참여할 수 있었다. 새로운 왕이 선출되기 이전까지 공위 섭정 기간 동안은 그니에즈노(Gniezno)의 대주교인 야쿠프 우찬스키(Jakub Uchanski)가 섭정했다. 

The first Polish royal election, of Henry III of France in 1573 (1889 Painting by Jan Matejko)

선거왕제 동안 귀족들은 새로 선출된 왕의 권한을 제한하는 통치 계약 조항을 제정하여 정치적 행동을 구속하기도 했다. 이 시기는 귀족들에게 많은 권한이 주어졌기 때문에 ‘황금의 자유’ 또는 ‘귀족 민주주의 시대’라고 부른다. 자유선거는 바르샤바 외곽 볼라에서 치러졌다. 이 때부터 크라코프 중심의 정치가 바르샤바 중심으로 바뀌었으며 야기에우워 왕조를 승계하는 새로운 선거왕제 또는 선거 군주제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당시 유럽 여러 나라의 통치자들과 대공들은 폴란드의 왕위에 오르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후보로는 프랑스 발루아 가문의 앙리, 러시아의 이반 4세, 오스트리아 대공 에른스트 그리고 스웨덴 왕 요한 3세로 폴란드 귀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1573년 프랑스의 앙리 왕자인 헨리크 발레지(Henrik Balezi)가 선거왕제의 첫 번째 선거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는 당시 프랑스보다 발전했던 폴란드 문화와 관습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국정을 보며 통치하기보다는 유흥으로 재정을 악화시키기도 했다. 

이후 프랑스의 왕인 카를 9세의 서거 소식을 듣고 왕위에 오르기 위해 프랑스로 도주함으로써 134일 간의 짧은 폴란드 첫 선거왕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뒤를 이어 헝가리의 스테판 바토리(Stepan Batory)가 안나 야기엘론카(Anna Jyagielonca)와 결혼하면서 국정을 돌보는 실질적인 첫 선거 왕이 되었다. 이후 왕이 서거하면 의회에서는 자유선거를 통해 새로운 왕을 선출하였으며, 이는 1791년 5.3헌법이 만들어짐과 동시에 폐지되었다.

귀족들의 권력이 강화되면서 왕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던 국왕 중심의 정치 체계에 변화가 왔다. 이들은 슐라흐타, 귀족들로 구성된 의회를 통해 정책이 결정되는 귀족 민주주의가 시작된 것이다. 국왕 또한 세습에 의한 계승이 아닌 귀족들의 선거에 의해 선출되는 구조였다. 당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절대 군주제의 중앙 집권적인 정치를 펼치고 있었다. 하지만 폴란드-리투아니아 공화국은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합쳐져 만들어진 연방 국가이면서 귀족 민주주의가 행해지고 종교적 관용까지 베풀어 주는 주변 국가들과 다른 정치 체계를 가지게 되었다. 

중앙의 의회는 국왕, 원로원인 상원과 하원으로 구성되며, 각 지방은 세이미크(Seimik), 지방 의회가 설치되어 중앙 의회에 참가할 의원들을 선출했다. 당시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폴란드 왕국과는 별개로 군대, 국고, 관직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자유선거를 통해 왕으로 선출된 국왕은 폴란드 정치 체제의 근간이 된 <헨리크 조항(Henrician Articles)>과 <파크타 콘벤타(Pacta conventa)>에 서명해야 했다. 이와 같은 폴란드의 자유선거는 오늘날의 입헌군주제의 효시라고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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