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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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반엔 전 국토에 천주교 신도가 450,000명으로 늘자 유교적 가치관을 지닌 지배층에겐 독이 되었고, 이들은 천주교도들을 '역도'로 몰아 탄압하기 시작했다. 1847년 2월 26일, 프랑스는 베트남이 선교사를 박해하는 것을 구실로 다낭 항구에서 무력시위를 하면서 사형 선고를 받은 프랑스 선교사 5인의 석방을 요구한다. 당시 베트남의 황제였던 소치제(紹治)는 프랑스의 요청을 받아들여서 선교사들을 석방하라고 명령하였고, 프랑스 함대는 3월 16일 다낭을 떠났다.

베트남 하노이의 성 요셉 성당, 출처 : 필자의 직접 촬영
그러나 4월 15일 프랑스 함대는 다시 선교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다낭에 정박 중이던 베트남 함대 5척을 격파시켰다. 그 결과 베트남은 사망자 40여 명, 부상자 90여 명, 실종 1000여 명의 피해를 입었다. 소치제는 이미 약속대로 선교사들을 석방한 상태였기 때문에 매우 격노하였으나, 군사적인 힘에서 밀려 대책이 없었다. 그 해 11월에 소치제는 아들 사덕제(嗣德)에게 모든 외국인을 사형에 처하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이후 사덕제도 소치제의 정책을 계승하여 쇄국적인 태도를 유지하였다. 그 과정에서 1840년부터 20년간 순교당한 유럽인 선교사가 25명, 베트남인 사제가 300명이며 신도는 2만명이었다. 이들이 살던 마을도 역도의 마을이라 하며 파괴됐다. 이때 선교사들을 잔혹하게 처형했는데 프랑스 선교사인 조셉 마르찬트는 살을 집게로 뜯겨져 죽는 능지형에 처해지고 피에르 보리는 참수되었으며 장 찰스 코나이는 참수되고 시신이 토막나는 잔혹한 형벌에 처해진다.
하지만 해당 시기의 프랑스는 나폴레옹 3세가 집권하면서 그 동안의 정국 혼란에서 어느정도 벗어났을 시점이었고 또한 나폴레옹 3세는 그동안 프랑스 확장의 걸림돌이던 영국과 아예 친하게 지내는 쪽으로 노선을 틀어, 뒷탈의 여지를 없앤 뒤 안정적으로 해외 식민지 확보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런 와중에 위와 같은 만행이 프랑스 정부와 천주교 교단에 생생히 전해져 전 프랑스 내에 베트남을 규탄하는 여론이 휩싸였고, 이는 본격적인 베트남 침략의 빌미가 되었다.
분노한 프랑스는 1858년부터 군사 침략을 개시하며 전쟁이 벌어졌고, 결국 황제는 판타인잔(潘淸簡) 등을 사이공에 파견해 프랑스, 스페인과 베트남 사이에 제1차 사이공 조약(1862년 6월 5일)이 맺으며 항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