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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네오나치, 반데라주의자(Бандеровцы)들 이야기
  • 알렉세이정
  • 등록 2026-04-23 01:51:59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가장 핵심적 문제 중 하나는 우크라이나의 새로운 정치 생활에서 '우크라이나 네오나치', '파시스트', 그리고 이른바 '반데라주의자들(Бандеровцы)'라고 불리는 이들이 사실상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2014년 3월 18일 전격적으로 크림 반도를 합병한 러시아가 당시 크림 반도와 돈바스 지역을 장악하는 이유로 내세운 것이 다름 아닌 "네오나치와 파시스트의 청년들로부터 러시아계 주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이었다. 게다가 유로마이단의 쿠데타를 주도한 우크라이나 포로셴코 과도정부와 이들을 지지해온 미국과 서방은 이를 크레믈린 선동가들이 지어낸 거짓말로 치부했다. 그들이 내세운 이유는 나치를 뿌리까지 찾아내 전범 재판에 회부해 거의 사라지고 없는데 무슨 나치의 세력이 아직 남아있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조프 대대나 프라비 섹토르는 러시아가 만들어낸 환상이며 실제하지 않는다며 자신들을 향한 비난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 또는 부속 부대가 소련 점령지에서 민간인을 학살하는 장면, 출처 : Lombardia Beni Culturali

실제로 2014년 유로마이단을 움직인 이데올로기는 러시아를 등에 업은 부패한 정치인과 과도한 러시아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민중들의 움직임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이데올로기에서 민족주의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다. 야누코비치 정권을 뒤엎은 쿠데타에 참가했던 모든 '애국', '친서방' 세력들을 볼 때 1930~40년대 우크라이나의 반란을 주도하고 나치와 연합해 소련을 공격하면서 다수의 유태인과 폴란드인, 러시아인을 학살한 반데라와 그의 추종자들은 대를 이어 뒷골목 후계자들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90년대 구소련 국가들의 경제 암혹기를 타고 재탄생했다. 이와 같은 극우 민족주의, '반데라주의'가 포스트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역사와 정치 생활에 미친 영향은 실로 대단했다. 그동안 90년대 최악의 경제암혹기와 더불어 2000년대 지도자들의 부정부패로 인한 오렌지 혁명으로 점철된 혼란한 사회, 2010년대의 유로마이단 사태와 돈바스 전쟁, 크림반도 합병 등으로 이어지는 정치, 역사, 사회적 혼란까지 더해져 이를 극우 민족주의적으로 타파해 보려는 극단적인 저항적인 움직임으로 표출되었다. 

우크라이나는 정치적으로 볼 때, 이미 수년 동안 폴란드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국토의 서부와 러시아와 심정적으로 가까운 중부 그리고 역시 친러계열이 많은 남동부 지역 간에 대립적인 양상을 빚어 왔다. 이와 같은 지역에 따른 갈등은 선거 때 유권자수에서 거의 비슷한 규모로 도출되고 있기 때문에 어느 쪽이 더 적극적인 주장을 펼치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좌우되어 왔다. 이 동부와 서부 지역은 문화적으로도 서로 많이 다르기에 양쪽을 다녀와본 나도 상당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동부 지역은 러시아어 사용 인구가 압도적이며 서부 지역은 상대적으로 우크라이나어 사용 인구가 더 많다. 두 지역은 경제적으로도 심한 격차를 보이고 있다. 대부분의 중공업 산업시설들이 지하자원이 비교적 풍부한 동부 지역에 위치해 있으며, 서부 지역은 흑토라 불리는 농업 지대가 널리 펼쳐져 있어 기초적인 경제 규모도 다르다.

하나의 국가로서 우크라이나는 우크라이나인들이 스스로 자결권을 행사하여 생겨난 국가가 아닌, 1991년 막대한 경제적 침체에 최악의 경제현황을 갖고 있는 러시아 연방공화국이 우크라이나 사회주의 공화국을 감당하기 어려워 억지로 독립시켜 준거나 마찬가지였다. 독립 이후, 서로 같은 소련에 속해 있었지만 우크라이나의 지도부를 구성하고 있는 인물들은 각기 상이한 지역 출신들인 볼셰비키들이었다. 그러니 특별 이주령을 받고 우크라이나로 이주했던 러시아계, 투르크계, 심지어 고려인과 퉁구스계 민족들도 있었기에 하나의 민족전시장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소련이 붕괴된 이후 우크라이나 정치인들의 최대 과제는 어떻게든 국가를 단합시키고 구성원 전체를 위한 정치적 공통 분모를 찾는 것이었다. 1990년대 말에는 이와 같은 공존 정책은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당시 레오니드 쿠치마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각 지역의 내분을 해소하고 국가의 중앙집권화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후 정치적인 투쟁이 격화되면서 지역 간의 반목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2004년 오렌지 사태는 동부 지역에 대한 서부 지역 사람들이 일구어낸 일종의 정치적인 승리였으며, 이는 국가적 분열을 더욱 고착화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패배한 동부 지역 사람들은 서부 정권이 내세우는 모든 정책에 반대했고 이후에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은 서부 중심의 우크라이나인들에 대한 저항심을 더욱 심화시켰으며 반대로 서부 지역은 발달한 공업 지대인 동부 지대가 우크라이나에서 이탈하지 않게 하기 위해 처음에는 회유책을 썼지만 저항이 거세지자 강경책으로 바뀌었다. 서부 지역 중심의 친서방 정권은 친러 계열의 동부 지역 주민들을 강압적으로 탄압하기 위하여 프레비섹토르와 같은 네오나치 인종주의자들을 동원했다. 이미 이때부터 동부 지역 도네츠크와 루한스크, 마리우폴은 굉장힌 위험한 곳이었다. 사방에서 잔인한 폭력에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으며 이들의 잔인한 폭력에 동부 지역은 스스로 민병대를 구성해 네오나치에 대항하는 자경단을 만들었다. 돈바스의 비극은 2014년부터가 아니라 이미 그보다 10년 전인 2004년 오렌지 사태 이후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2014년의 유로마이단 시위대는 그 대부분이 서부 지역 출신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들의 이데올로기는 동부 지역 주민들과의 사회적 합의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유로마이단, 그리고 현재의 젤렌스키 정권 및 아조프 대대의 활동을 암묵적으로 방치하는 자들을 과거 반데라주의자들과 이어주는 연결고리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라는 공통된 이데올로기에 있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는 하나의 완전한 이데올로기로 점철되어 있다. 물론 종종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내부에서도 온건파와 과격파를 나누려는 시도가 있어 왔다. 이는 여타의 유럽 국가에서도 이와 같은 구분을 하곤 한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의 경우 다른 유럽 국가의 민족주의 내 온건파와 과격파를 나누는 것은 그 민족주의 운동의 성격상 맞지 않다. 모든 유럽 민족주의는 처음부터 비교적 온건한 사상에서부터 형성되었으며, 그 과격한 양상은 온건책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에서는 처음부터 극우 이데올로기로 출발하여, 전통적인 민족 정체성이나 종교적 자의식마저 거부하도록 하는 과격성을 드러내왔다. 유로마이단을 일으켰던 자유진영이라 불리는 온건파들은 자신만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적인 사상을 갖고 있지도 않았으며 그것이 그들이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극우민족주의 단체인 네오나치 프라비 섹토르(Правый сектор)와 스보보다(Свобода, 자유)에 대응할 만한 사상적 근거가 그들에게는 없었기에 이와 같은 비극을 초래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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