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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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의 명군 효문제의 한화 정책에 의해 수도가 평성에서 낙양으로 천도하자 이때부터 북쪽의 영민은 서서히 냉대을 받게 되었다. 게다가 본래 명족출신이었던 그들은 부호(府戶)라는 출세를 더 이상 바라볼 수 없게 차단되는 호에 편제하게 되었고, 중앙으로부터 서임된 장관인 도대장(都大將)에게 착취당하는 상태가 되자 일거에 불만이 증대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 축적된 불만이 폭발한 것은 523년 옥야진 백성들의 거병이었다. 파육한발릉(破六韓抜陵)이 수령(首領)인 반란병들은 수비대장을 살해하였고, 이들의 움직임에 홀려 기타 여러 진들에도 전염되었다. 흔히 이것을 6진의 난(六鎭之亂)이라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

중국 산서성 평요고성(平遙古城), 출처 : 필자의 직접 촬영
이 반란은 4년간 계속되었고 북위조정이 난을 진압하지 못하고 527년 흉노 출신 장수인 이주영(爾朱榮)이 진압했으나 6진의 난이 몰고 온 파장은 북위의 급속한 쇠락으로 이어졌다. 6진의 유력자 중에 고조의 일족들이 있었는데 6진의 난을 거쳐 북위의 멸망과정에서 고조의 일족 중에서 다시 권력중추에 올라선 자들도 있었다. 회삭진 출신으로 동위(東魏)의 실권을 장악하여 북제의 기초를 닦았던 고환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또한 무천진(武川鎭) 출신의 유력자는 무천진(武川鎭) 군벌, 일명 관롱집단(關籠集團)으로 불리며 서위부터 북주, 수, 당나라까지 이르는 변천과정에서 각 왕조의 핵심적인 권력집단으로 군림하였다. 북주의 우문태, 수나라의 양견, 당나라의 이연등은 각 왕조의 창시자이며 무천진(武川鎭)의 유력자 일족 출신이었다.
그 후 북위에 대한 남조의 양(梁)나라 군대가 침공하여 황하 이북 지역의 여러 성들을 점령하고 돌아갔다. 북위의 영내에 각종 도적떼들이 창궐하여 치안도 어렵게 되자 영태후는 이주영(爾朱榮)에게 이를 진압하도록 명을 내린다. 그러나 이주영은 난을 평정하러 출병했다. 528년 효명제는 영태후에게 독살당하고 영태후는 원쇠(元釗)를 황제로 세우고 소공황제(少恭皇帝)로 칭하였다. 그러나 이주영(爾朱榮)은 이에 반발하여 산서성 삭현 지방에서 군대를 이끌고 낙양에 들어와 효장제(孝莊帝)를 옹립했다. 이주영은 529년 영태후와 소공황제(少恭皇帝)를 사로잡아 황하에 던져버리고, 승상 이하 대신 1,000명을 처형했다. 사서에서는 이를 하음의 변(河陰之變)이라 한다.
이주영은 6진의 난을 평정하고 진양(晋陽)에서 조정을 움직였으나 이주씨 휘하의 장군이자 고조의 일가인 고환(高歡)이 이주영의 폭정을 비판하여 이주씨와 대립하였다. 고환은 532년 낙양에 들어와 이주씨에 의해 세워진 절민제(節閔帝)을 폐위하고 효무제(孝武帝)를 옹립했다. 고환은 이주씨 일당을 각지에서 격파하였고 북위의 정권은 다시 고환에게로 넘어갔다. 그러나 효무제는 이번엔 고환의 전횡을 싫어하여 낙양을 탈출해 장안(長安)으로 도망쳤다. 장안에서는 우문태(宇文泰)와 우문선비의 씨족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효무제가 장안으로 도망쳐오자 우문태는 효무제를 받아들였다. 우문태가 효무제를 받아들인 것은 북위의 정통성 문제에 기인하여 정당하게 북위의 옥쇄를 받으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효무제가 이를 거부하자 우문태는 효무제를 죽이고 문제(文帝)를 즉위시키니 이로써 북위는 동서로 분열하게 되었다. 역사상 이것을 동위(東魏), 서위(西魏)라 부르게 된다. 평요(平遙)는 평요고성(平遙古城)이라 하여 도시 자체가 큰 성 안에 들어가 있는것으로 유명하다. 세계유네스코문화유산에 등록되어 있다. 평요의 역사를 말하자면 전국시대로 올라가 진(晉)나라 이후 한(韓), 위(魏), 조(趙), 세 나라로 쪼개진다. 이 때부터 전국시대의 시작으로 불리며 수많은 나라들이 쟁패한 춘추시대에서 7개의 나라로 줄어들었다. 이 중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는 진(秦)나라다. 한(韓)나라는 진(秦)나라와 가장 가까운 국가로 가장 많은 공격을 받았다. 수도는 임분이고 영토는 분하 지역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동쪽은 위(魏)나라로 산서성 동남부 장치(長治), 진성(晉城)과 하남성 북부 안양(安陽)이 포함되는 영토다.
수도는 진성(晉城)이다. 그리고 조나라는 평요, 태원, 대동, 하북성 한단, 석가장 등 좀 광대한 지역을 다스리고 있었다. 수도는 하북성 한단이다. 조나라, 한나라, 진나라 3개국의 주요 분쟁 지역은 바로 이곳 평요였다. 세 나라가 먹고 먹히는 이 지역은 본래 조나라의 것이지만 한비자의 활약으로 이곳은 한나라의 영토가 되었다. 이후 조나라가 다시 차지했지만 진나라 소양왕의 공격으로 이 도시는 진나라의 것이 된다. 그로부터 숱한 역사를 영위해온 이곳 평요는 6진의 난 당시에 대표적인 격전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