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3238185&PAGE_CD=N0006&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utm_campaign=naver_news&CMPT_CD=E0033M빨치산의 태평소 소리 좋아했던 미군, 국악의 전도사가 되다[이희용의 월드코리안 12] 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민족·국제 이희용(hoprave)▲가야금 타는 해의만만년의 해...
안사의 난(安史之亂)으로 변방을 평정하기 위하여 군대를 주둔시키던 곳인 변방에 설치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그 지방을 다스리던 관아인 번진(藩鎭)이 당나라의 통제에서 벗어나자 당나라는 중앙 정부군을 증강하는 데 많은 돈이 필요했다.

황소의 난 진행도,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가혹한 세금 징수를 단행하여 민생이 파탄 나자 전국에서 크고 작은 반란이 이어졌다. 그 중에서 소금 밀매업자인 황소(黃巢)는 왕선지(王仙芝, ? ~878)와 가담하여 농민들을 모아 당나라에 가장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는 농민 반란을 일으켰다. 황소는 60만 대군을 이끌고 낙양을 점령한 뒤 동관을 공격하고 장안에 입성해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황소의 난은 10여 년간 계속되어 당나라를 유명무실한 존재로 전락시켰다. 안사의 난 이후 번진(藩鎭) 세력의 발호(跋扈)와 환관의 발호 및 환관파와 조신파와의 정쟁은 그치지 않고 계속 이어져 마침내는 당나라를 멸망시키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당의 희종(唐僖宗 李儇, 862~888, 재위 : 873~888) 중화(中和) 원년인 881년 1월 8일 이 날은 당나라 수도 장안의 역사에 큰 사건이 일어난 날이었다. 이 날 아침 당나라 제18대 황제 희종이 장안의 서문인 금광문(金光門)을 나와 빠르게 도주하는 것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장안의 동문인 춘명문(春明門)으로부터 반란군의 수령인 황소가 대군을 거느리고 금으로 장식한 수레를 탄 상태에 입성하였다. 안사의 난이 완전히 진압된 것은 763년 2월이었다. 이후 당나라는 존속되긴 했으나 국정 운영에 어려움이 더욱 심해졌다. 당나라는 안사의 난을 평정하기 위해 번진을 각 지역으로 확대해 절도사로 하여금 병권을 지휘하도록 했다. 이리하여 번진은 내지까지 설치되어 40개 정도로 확대했으며, 중요도에 따라 절도사, 방어사, 단련사가 파견되었다.
안사의 난 이후 절도사는 군사 지휘권의 장악과 더불어 국가에서 위임받은 행정권까지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점차 번진이 당나라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경향을 보이자 그들의 세력 확장을 억제하고 순응시킬 필요를 느꼈다. 그리하여 최우선으로 황제와 유대가 돈독하고 강한 중앙 정부군을 증강하고자 했다. 이에 많은 재정이 필요해진 당나라는 가장 손쉽게 재정 수입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인 세금 징수를 감행했다. 가혹한 세금 징수는 곧 민생의 파탄으로 이어졌다. 이와 더불어 당나라는 전횡을 일삼는 환관뿐만 아니라 국가 주도권을 가지고 정치 투쟁을 벌이는 전통 문벌 귀족과 신흥 관료의 대립으로 인해 더욱 혼란이 극심해졌다.
통치 세력의 부패와 국정 혼란은 결국 크고 작은 반란을 초래했다. 855년 절동(浙東) 지역에서 일어난 병사들의 반란을 시작으로, 858년에는 영남, 호남, 강서, 선주(宣州) 등지에서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859년에는 구보(裘甫)라는 농민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초기에는 100여 명 정도였던 반란군에 유랑 농민과 도둑들이 합세해 그 규모가 상당했다. 이후에도 반란은 끊이지 않았으며, 그 중에서도 황소의 난은 당나라에 가장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평민 출신의 소금 상인이었던 황소는 소금 전매로 막대한 부를 형성한 후 북방 출신의 병사들을 회유해 난을 일으켰다. 안사의 난 이후 당나라의 조세 제도는 조용조에서 양세법(兩稅法)으로 바뀌었다. 그리하여 농민은 소유하는 농지의 양과 질에 따라 하세와 추세로 나누어 세금을 냈다.
당나라는 거두어들인 양세를 주로 번진의 군사비로 지출했으며, 관료의 봉급으로도 사용했다. 그러나 번진의 확대에 따른 막대한 재정 지출을 양세의 수입만으로도 감당하기에는 이미 어려운 지경이었다. 이에 부족한 세입을 충당하기 위해 소금의 전매를 실시했다. 758년 제오기(第五琦)의 건의에 따라 강회(江淮) 지역에서 소금 전매를 우선적으로 실시한 이후, 760년에 전국적으로 실시했다. 전매 초기에는 소금 가격이 소금 1두당 10문이었으나, 여기에 소비세 100문을 물어 110문을 받았으며, 이는 점차 인상되어 나중에는 소금 1두당 300문에 이르렀다. 이는 당나라가 재정이 악화될 때마다 소금 가격을 올렸기 때문이다. 소금의 가격이 원가의 약 30배까지 오르자 소금을 사지 못해 음식을 싱겁게 먹는 백성이 생겨나는가 하면, 소금 밀매업자까지 출현했다.
그러자 당나라는 소금 밀매업자의 성행으로 세입이 줄어들까 걱정하여 이들을 염적(鹽賊)이라 칭하고 엄벌했다. 이에 소금 밀매업자들은 비밀 결사대를 조직하고 무장하여 당나라에 대항했으며, 당나라의 엄한 염적 토벌은 반란으로 이어졌다. 874년, 소금 밀매업자 왕선지(王仙芝)가 하남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그는 천보평균대장군(天補平均大將軍)이라고 자칭하고, 당시 극심한 빈부의 격차를 빚어낸 당나라의 죄를 폭로 및 규탄하는 격문을 띄운 후 봉기에 참여할 것을 호소했다. 그러자 수천 명의 농민들이 봉기군에 가담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황소도 산동에서 호응했다. 왕선지와 황소의 지휘 아래 봉기군이 점점 강해지자 당나라는 군사를 소집하고 번진 절도사에게 봉기군 진압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절도사들은 당나라의 명령에도 적극적인 진압에 나서지 않았다.
더구나 봉기군이 따로 거점을 마련하지 않은 채 약한 상대를 골라 공격하는 작전을 펼쳐 산동, 하남, 호북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하자 당나라는 마침내 회유책을 사용하게 된다. 먼저 당나라는 왕선지에게 투항을 조건으로 좌신책군압아(左神策軍押牙) 겸 감찰어사(監察御使)의 관직을 제안했다. 왕선지는 당나라의 제안에 동요했다. 하지만 황소는 당나라가 왕선지에게 낮은 관직을 주어 봉기군에 내분을 일으키려는 것임을 파악했다. 황소가 왕선지를 설득하자 왕선지는 당나라가 파견한 칙사를 버렸다. 이후 왕선지와 황소는 군사를 나누어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왕선지는 서쪽으로, 황소는 동쪽으로 진군했다. 하지만 878년, 왕선지가 호북으로 출격했다가 황매(黃梅)에서 대패하고 전사하고 말았다.
그러자 왕선지의 군사들은 모두 황소에게 의탁했으며, 황소는 충천대장군(衝天大將軍)으로 추대되었다. 왕선지(王仙芝)의 10만 군대까지 흡수한 황소의 목표는 당나라 제2의 도시 낙양이었다. 그러나 낙양은 약한 도시가 아니었다. 당나라는 낙양 부근에 수십만 대군을 집결시켜 봉기군을 토벌하려 했다. 이에 황소는 낙양을 포기하고 상대적으로 약한 광주(廣州)로 진군하여 879년에는 마침내 광주 함락에 성공했다. 광주가 함락되자 봉기군의 세력은 더욱 확장되었으며, 880년에는 60만 대군을 이끌고 북상하여 낙양을 점령한 다음 동관을 공격했다. 황소의 동관 공격 소식에 당나라 희종(僖宗)과 조정 대신들은 놀라 사천으로 피난을 떠났다.
미처 떠나지 못한 대신들이 황소에게 투항함으로써 황소는 마침내 장안에 입성했다. 그리고 희종을 몰아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대제(大齊)라 하고 연호를 금통(金統)으로 정했다. 황소(黃巢)는 상양(尙讓)을 재상으로, 주온(朱溫)을 대장군으로 임명하는 등 통치 체제를 정비했다. 또한 당나라의 고위 관료와 부호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백성에게 나누어 주는 등 민심을 안정시켰다. 하지만 사천으로 피난 갔던 희종을 추격하지 않는 결정적인 과오를 저질렀다. 황소는 장안을 점령한 뒤 여세를 몰아 희종을 추적해야 했지만, 그러하지 않았다. 또한 당나라의 금군과 번진 세력을 무장 해제시키고 자신의 군사력을 강화해야 했지만, 여기에도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봉기군이 점령한 지역에 군대를 주둔시키지 않는 실수를 저질러 후에 당나라가 반격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881년, 당나라는 황소의 과오를 기회로 삼아 각지의 절도사들을 규합하고 군대를 재정비했다. 당나라는 이민족 사타족 출신 이극용(李克用)과 연합해 장안을 공격했으며, 883년에 장안을 포위했다. 포위 기간이 길어지자 황소 진영의 식량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전세는 황소에게 불리해졌다. 그런데 이 때 황소에게 결정적으로 타격을 안겨 준 사건이 발생했다. 동주(洞州)를 수성하고 있던 부장 주온(朱溫)이 봉기군을 배신하고 당나라에 투항한 것이다. 게다가 이극용이 양전파(楊電派)를 지키던 상양(常陽)을 격파하고 장안을 향해 진격하자, 황소는 할 수 없이 장안을 포기하고 남전(南泉)으로 후퇴해야 했다. 이후 황소의 봉기군은 당나라와의 전투에서 모두 패했고, 황소는 태산(泰山) 낭호곡(狼虎谷)으로 도주하여 884년 그 곳에서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이로써 10여 년간 이어진 황소의 난이 평정 되었으며, 885년에 사천으로 피난을 떠났던 희종은 장안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