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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명나라와 몽골-타타르의 전쟁
  • 알렉세이정
  • 등록 2026-04-23 02:21:31
  • 수정 2026-05-06 17:28:21

당시 명나라는 상인들에게 자신의 재력이 허락되는 한 어느 정도의 사병을 거느릴 수 있게 허락하고 있었다. 그 대신에 세금이 좀 쎘으며 이 사병들도 각 지방 태수와 총병, 그리고 중앙 조정에게 그 면면을 보고해야 했으며 그렇게 올라간 보고들은 조정에서 철저한 검토가 이루어진 후 사병을 거느릴 수 있게 허락되었다. 따라서 왠만한 부호가 아닌 이상은 명나라 땅 내에서 사병을 거느린다는 것은 그 부유함이 중원의 0.5%의 로얄페밀리 급들만 가능하다는 얘기이다. 


중국 산서성 평요고성 거리, 출처 : 필자의 직접 촬영

그러나 그러한 제도도 16세기에 들어서면서 점차 무력화된다. 왜냐하면 북로남왜의 대혼란에 빠진 명나라는 중앙에서 군사들이 끊임없이 차출되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력이 있는 자들은 친왕들에 보고를 하고 승락을 받은 후 개인 사병들을 거느릴 수 있었으며 이들은 몽골, 혹은 왜구와 싸워야 하는 의무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 이 지역은 몽골 다얀 칸의 침략 때까지 다시 안정 상태를 유지한다. 한편 몽골은 오이라트가 무너지고 다시 타타르 세력이 정권을 잡았지만 내우외환이 매우 극심했다.

그러한 와중에 만두하이라는 여걸이 나타나 타타르의 실권을 장악하고 그녀가 키운 왕자인 다얀 칸과 결혼하게 된다. 다얀 칸이 나이가 어렸을 때는 만두하이가 섭정을 하면서 나라를 안정시키고 투르크계 민족의 침략을 격퇴하면서 다시 몽골의 중흥을 이끌었다. 그리고 다얀 칸이 성장하자 만두하이는 그에게 실권을 물리고 은퇴했다. 만두하이가 만들어놓은 토대를 다얀 칸은 적재적소에 활용했고 마침내 16세기 초 몽골은 다시 세력을 회복하여 명나라를 침공하게 된다. 다얀 칸은 산서성 깊숙이 들어와 평요를 공략했고 명나라 군은 평요를 어렵게 방어에 성공했지만 산서성, 하북성 북부, 감숙성, 요동 일대까지 다얀 칸의 영향 아래 놓이며 명나라는 다시 위기를 맞게 된다.

다얀 칸의 사후, 손자인 알탄 칸이 즉위하면서 알탄 칸은 명나라에 대한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했다. 특히 산서성과 섬서성은 알탄 칸의 직접적인 공격에 놓이면서 많은 도시들이 약탈당했다. 그러나 평요와 대동, 태원같은 도시들은 워낙 요새화된 성들이 있던지라 그곳은 포기하고 그 외곽 지역들만 쓸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폐해는 바로 수도인 북경이 위협당하는 상황으로 번져갔다. 당시 명나라의 명재상 장거정은 이러한 알탄 칸을 대비하여 척계광을 추천하여 적극 등용했다. 장거장과 척계광은 중국 광저우를 개항하여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로부터 화포를 구입했다. 화포를 대량으로 구입하여 북경성과 만리장성 팔달령에 장착하고 알탄 칸의 침입에 대비했다. 

알탄 칸이 침략하자 팔달령에서는 험준한 지형과 화포로 방어에 성공했지만 이번에는 알탄 칸이 팔달령을 우회해서 수도인 북경을 침략했다. 명재상 장거정은 손수 북경 방어에 나섰다. 포르투갈, 네덜란드에서 사온 홍이포는 그 위력을 발휘했다. 특히 장거정은 문관 관복을 입은 상태에서 직접 성루의 북을 치며 병사들을 지휘, 독려했다고 전한다. 알탄 칸은 화포의 위력과 견고한 방비에 밀려 북경성에서 패배하고 돌아갔다. 이후 장거정은 병으로 사망하자 그가 해놓은 개혁은 간신들에 의해 모두 철폐되고 장거정 또한 부관참시되었다. 그렇게 장거정의 개혁을 철폐하고 그의 유산을 압류함으로써 명나라는 급격히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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