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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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월 19일,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의 의회를 나온 한 검은색 차량이 블타바 강변으로 향하고 있었다. 어느덧 차량은 플로렌스를 지나 브르노로 가는 D1 지방도로 인근으로 들어섰다. 순간 프라하 방향으로 트럭 한 대가 맞은 편에서 빠르게 질주했고 이 트럭은 중앙선을 넘어 검은색 차량을 덮쳤다. 다음 날, 체코슬로바키아의 언론은 난리가 났다. 국가의 거물급 인물이 검은색 차량 안에 타고 있었고 이 인물이 심각한 중태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경찰은 마주오면서 부딪쳤던 트럭 기사가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알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지만 그를 찾을 수는 없었다.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이를 정치인에 대한 테러사건으로 규정하고 트럭 기사를 수배했지만 결국 그를 찾지 못했다. 사고를 당해 중태에 빠져 있던 체코슬로바키아의 거물급 인물은 바로 바츨라프 하벨과 더불어 체코 민주화의 거물 알렉산데르 둡체크(Alexander Dubcek, 1921~1992)였다. 둡체크는 3번이나 수술을 받았으나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12월 15일에 사망했다. 이 둡체크의 교통사고는 소련의 빅토르 최 교통사고 사망사건, 영국 다이아나 왕세자비 교통사고 사망사건과 더불어 유럽의 20세기 3대 미스테리 교통사고로 꼽히고 있다.
알렉산데르 둡체크(Alexander Dubček, 1921~1992)를 기리는 추모비, 그가 비극적인 자동차 사고를 당했던 지점 근처인 체코 훔폴레츠(Humpolec) 인근 D1 고속도로 88.5km 지점 휴게소에 세워져 있다. 출처 : 필자의 직접 촬영
둡체크는 제4대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서기장으로 공산주의 정치가이긴 했으나 공산당의 개혁을 추구한 인물이었다. 그로 인해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화 항쟁인 프라하의 봄 당시 소련에 의해 축출되었으며 이후 1989년 동구권에서 민주화의 요구가 거세지자 만년에 다시 정치계에 모습을 드러내다가 의문의 사고를 당했던 것이다. 둡체크의 차량과 부딪쳤던 트럭 기사의 정체는 누구였을까? 당시 사고에 관한 현장 이야기들을 종합해보면 D1 지방 도로는 지금과 달리 차량이 빠른 속도를 내야 할 이유도 없었고 트럭 같은 대형 차량이 들어와 질주할만한 곳이 아니었다. 그리고 중앙선을 넘어 검은색 차량을 타겟으로 돌진하는 모양새였다고 목격자들은 말하고 있다. 여러 가지 정황을 비추어 볼 때 범인은 분명 둡체크를 노렸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어 트럭 기사의 정체는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분할을 촉구하는 누군가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1989년 벨벳 혁명에서부터 시작한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분리에 관한 이야기는 체코 내 총선을 앞두고 치열하게 폭력적으로 전개된 몇 가지 사건들로 전개되었다.
많은 체코인 및 슬로바키아인들은 체코슬로바키아 연방의 지속적인 존재를 원했다. 그러나, 일부 주요 슬로바키아인들과 슬로바키아 국가당은 공존이 실패했으며 완전한 독립과 주권을 주장했다. 1990년 정당은 다시 등장했지만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정당은 거의 없거나 필요 없는 존재가 되었다. 슬로바키아인들은 지방분권을 주장하는 동안 국가의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프라하는 지속적인 통제를 요구했다. 이러한 와중에 둡체크의 교통사고 사건이 발생하니 슬로바키아인들의 불만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었다. 왜냐하면 둡체크는 슬로바키아 진영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둡체크는 1921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출생하여 3살 때 가족과 함께 소련으로 이주했다. 그는 체코인인 바츨라프 하벨과는 달리 슬로바키아인이었다. 둡체크는 소련 모스크바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열렬한 사회주의자였던 부모로 인해 소련에서 사회주의 지상낙원 목표로 완전히 자리잡고 싶어했다. 실제로 둡체크 집안은 여타 체코인과 마찬가지로 체코에서 일자리가 없어서 소련에 이주한 캐이스였다. 이후 소련 스탈린에 의해 둡체크의 집안은 키르기스스탄 프룬제로 강제 이주되어 키르기스스탄에서 유년기를 보낸다.
둡체크는 청년기에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질 때 체코슬로바키아가 나치 독일에게 흡수되고 나치 독일에 의해 친(親) 나치 체코슬로바키아 정권이 수립되자, 이에 대항하는 공산당 계열 혁명군단에 가입하였다. 그는 반(反) 나치 활동에 적극적이었고 결과적으로 이는 부모가 원하던 공산당 입당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게 된다. 둡체크는 대조국 전쟁 승전 이후, 고향인 체코슬로바키아로 돌아온다. 이후 둡체크는 정치 전선에 뛰어들게 되면서 1948년 체코슬로바키아가 무혈 쿠데타에 의해 공산화된 이후 슬로바키아 공산당 내에서 두각을 드러내게 된다. 스탈린이 사망한 이후, 그는 제대로 된 사회주의와 무상계급 등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고 여겨 소련에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그는 모스크바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했으며 1955년 소련에서 당 중앙위원회 위원이 된 상태로 체코슬로바키아에 돌아오게 된다.
1963년 전 서기장이자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주의 보수파인 안토닌 노보트니(Antonín Novotný, 1904~1975)가 경제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면서 서기장이 되었으며 이 때 둡체크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Socialism with a human face)라는 구호 아래 다당제 도입, 언론 자유화, 연방제 국가로의 체제 전환 등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개혁을 위해 노력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민주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는 분명 공산국가였고 공산주의 체제 내에서 공산주의의 체질 개선이었을 뿐, 정식 민주화와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프라하의 봄 당시 소련을 중심으로 한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군사적인 개입으로 인해 둡체크가 내세운 공산당 및 이데올로기의 개혁과 수정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소련군이 프라하를 침공한 직후 둡체크는 체코슬로바키아 국민들에게 소련에 무력으로 저항을 하지 말 것을 호소했으며, 이후 소련군에게 체포되어 다른 정치 동지들과 함께 모스크바로 강제 송환되었다.
다행히도 헝가리 혁명 당시 갑자기 비밀 재판에 회부되어 교수형에 처해진 너지 임레(Nagy Imre, 1896~1958)로 인해 동유럽에서 바르샤바 조약기구들이 탈퇴의 위기를 맞게 되자 흐루시초프는 동유럽의 험악해진 민심을 달래기 위해 체포된 동유럽 각국의 정치 인사들에 대한 숙청을 중지하게 된다. 그로 인해 둡체크는 목숨을 건지게 되었으나 정계에서 강제로 은퇴할 것과 공산당에서 탈당을 종용받는다. 그리고 나서 둡체크는 공산당원에서 강제로 추방된 후, 체코슬로바키아로 돌아온 후 브라티슬라바 근처에서 소련의 감시하에 삼림 관리원으로 일하게 된다. 공산정권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1988년 이탈리아로 여행을 허가 받게 되면서 둡체크는 20년 만에 처음으로 서방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그리고 1989년 벨벳 혁명이 발생하자 둡체크는 다시 정계에 모습을 나타내게 되면서 21년 전에 시도했다가 실패했던 프라하의 봄을 마침내 실현시켰다. 둡체크는 1989년 12월부터 1992년까지 체코슬로바키아의 연방 의회 의장을 맡았으며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분리를 막으려 노력하던 중이었지만 1992년 1월 19일 앞서 상술한 내용처럼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했고 그가 사망한 후,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끝내 분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