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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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가 시작된 지역답게 시라즈는 오랫동안 페르시아의 고도(古都)로 자리매김 해왔다. 아리아인들이 B.C 7세기 이란 서북부 하마단에 첫 국가인 메디나 왕국을 세웠지만, B.C 6세기 중엽 남부 파르스에서 일어난 아케메네스 왕조에 멸망당한다.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B.C 550~B.C 333)는 인더스 강에서 이집트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지역을 아우르는 첫 세계적 통일 제국을 건설했다. 이 제국은 왕도를 초기에는 시라즈 북동 130㎞ 지점의 ‘페르시아인의 본영’이라는 뜻을 가진 파샤르가데(Pashargade)에 두었다가, 30여 년 뒤, 동쪽으로 75㎞ 떨어진 페르세폴리스로 옮기게 된다. 뒤이어 출현한 파르티아(B.C 248~A.D 225)는 헬레니즘의 온상으로 페르시아적인 순수성을 얼마간 희석시켰다. 그러나 뒤이어 파르스에서 일어난 사산 왕조(226~651) 페르시아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계승자로 자부하면서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아 역사적 정통성을 되찾으려는 페르시아 주의를 표방했다.

이란 시라즈에 위치한 이슬람교 시아파의 주요 성지이자 영묘인 샤헤체라그 신전(Shah Cheragh Shrine) 내부, 출처 : Trip.com
이후 아라비아-이슬람 군의 정복으로 인해 나라는 멸망하고 페르시아는 이슬람화 되었다. 페르시아 인에게 7세기 중엽부터 15세기 말엽까지 약 800년 동안은 아라비아 족, 몽골족, 투르크족 등의 지배를 받은 역사적 수난기로 꼽힌다. 고유의 파할레비 문자 대신 아라비아 문자가 사용되었고 민족 종교 조로아스터교는 이슬람교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페르시아 고유의 전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티무르 제국의 쇠퇴기에 투르크 부족 연합 체제인 백양 왕조를 정복하고 이스파한을 도읍 삼아 건국한 사파비 왕조(1501~1732)는 시아파를 국교로 선포하고 민족 국가 건설을 지향했다. 이후 아프가니스탄의 내침을 계기로 다시 나라가 혼란에 빠지게 되자 카림 칸은 시라즈에 잔드 왕조(1750~1794)를 세워 국난을 타개한다. 잔드 왕조는 800년 만에 일어선 순수 페르시아 계통의 왕조로, 시라즈에는 이 시대 유적 유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시라즈는 이란 역사의 고비 때마다 수호신처럼 페르시아의 정체성을 지켜오면서 오늘날까지 수많은 전승과 영광스런 유산을 남겼다.
따라서 시라즈는 페르시아의 전통을 지키고자 하는 국가들의 중요한 수도로 자리 잡게 되었는데 그 중에 부와이흐 왕국은 시라즈를 중심으로 한 최초의 페르시아인들의 국가였다. 부와이흐 왕조(Buwaih Dynasty : 932~1055년)는 '부이 왕조'라고도 한다. 12이맘 파에 속했으며, 압바스 왕조의 쇠퇴와 셀주크투르크 제국의 도래 사이의 기간에 시라즈를 중심으로 이라크와 이란을 다스렸다. 시라즈의 중심 광장 동쪽에 시라즈의 상징이라는 카림 칸 고성이 존재한다. 본래 카림 칸 고성은 부와이흐 왕조의 흔적이 두드러지는 곳이다. 본래 4개의 모퉁이에 원탑이 세워진 이 사각형 성채는 원래 잔드 왕조 건국자 카림 칸의 고성으로 알려졌으나, 후대에 감옥으로 사용된 적도 있다고 한다. 성채 바로 옆에 파르스 박물관이 있고 이 박물관 자리가 부와이흐 왕조의 도성 자리이다. 잔드 시대에 영빈관으로 지었으나, 카림 한의 유언에 따라 그의 관을 안치한 묘당으로 변모한다. 그러나 잔드 왕조를 멸망시킨 북부 투르크멘 계통 출신의 카자르 왕조(1780~1924)의 창건자 아가 무함마드는 후환이 염려되어 관을 테헤란으로 옮겨 버렸다.
그래서 지금은 관 자리에 카림 칸이 착용하고 다니던 도검 한 자루만 놓여 있다. 광장 서쪽에는 비교적 현대적인 이맘 후세인 광장, 일명 세타드 광장이 있었고, 남쪽에 옛 시가지의 시장 거리가 늘어서 있다. 지리적으로 남쪽 페르시아 만과 북쪽 내륙 각지를 이어주는 요로에 있는 시라즈는 행정 및 군사, 교역의 거점 구실을 해왔다. 땅도 기름져 농사와 목축업이 흥했다. 오늘날 시라즈는 대체로 7세기 우마이야왕조 아라비아 제국 시대 본격적으로 건설되기 시작했다. 부와이흐 왕조 때인 10세기에 궁전과 병원, 도서관 등을 짓고 시가를 정비했으며, 11세기 처음 둘레 19㎞에 12개 성문이 달린 성벽을 쌓았다. 14세기 중엽 일 칸국 시대에는 성벽을 개축하고 도성을 17개 구역으로 나누었다. 시라즈는 ‘천은(天恩)을 입은 고도’라고 한다. 10세기 이래 10여 차례나 지진이 발생했고 19세기에는 두 차례 대지진이 일어났다. 몽골 칭기즈칸과 티무르 제국의 내침을 받았으나 큰 손상을 받지 않았다.
894년에 지은, 가장 오래된 자미아 마스지드는 사파비 왕조 때 개축되었지만 그 형태는 9세기 말 그대로 남아있고 잔드 왕조의 대표적 사원인 1773년에 지어진 와킬 마스지드를 비롯한 사원들과 이맘 알리 이븐 함자 묘당, 1615년에 지은 마드라사 칸 신학교 등의 유적들이 그런대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 이는 이란 사람들이 자랑하는 조화와 포용의 미덕이 묻어 있는 곳이기도 해서 옛날부터 유대인들이 차별 없이 거주해 왔으며, 아라비아-이슬람 정복 뒤에는 아라비아 인들이 몰려와 이른바 아라비아 인과 페르시아 인의 혼혈족인 함세족(Hamse)이라는 새 종족이 생겨났다. 16세기 이후에는 아르메니아 인들도 옮겨와 터전을 형성했다. 1937년 이란 양식으로 지어진 성 시몬 교회는 최초의 페르시아어 성경 번역본이 보관된 명소로 꼽힌다. 이와 같은 배경 때문에 인구 120만 명을 헤아리는 시라즈는 지금도 다민족 혼성 도시로 자리 잡아 있다. 절반을 약간 넘는 아리안계 페르시아인과 투르크족, 셈족, 기란-마잔다란 족, 쿠르드 족, 투르크멘 족, 집시 족 같은 다양한 인종들이 이웃하며 살고 있다.
시라즈는 장미의 도시로도 유명하다. 어디를 가든지 장미의 향이 곳곳에서 풍기고 있다. 가장 유명한 곳이 에람 정공원이라 불리는 바게 에람(Bage Eram)이라고 한다. 시가 서북쪽에 위치한 바게 에람은 부와이흐 왕조의 지배 시기에 만들어졌다. ‘에람(Eram)’은 페르시아어로 ‘낙원’이란 뜻을 갖고 있으며 정문에 들어서면 우측에 장미정원이 펼쳐지는 진풍경을 목격할 수 있다. 이곳 장미는 5~6월이 한창이라 그 이후에는 잘 자라지 않지만, 기간이 지났어도 색깔이 산뜻하고 녹진한 향기를 풍기는 곳이다. 19세기 에람 궁전을 지으면서 지금과 같은 크기로 확장한 것인데, 장미 말고도 갖가지 꽃과 희귀한 식물들이 어우러져 하나의 수목원을 이루고 있었다. 지금은 정문 우측 언덕 위의 시라즈 대학 임업학과 학생들의 실습장도 겸하고 있다. 특히 길 양쪽에 도열하듯 늘어선 20~30m 높이의 삼나무는 이란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작물이다. 3대 절화(折花: 가지째 꺾는 꽃) 중 하나인 장미는 동서양에서 인기가 매우 높은 꽃이다. 오늘날 원예 종으로 길러 감상하는 아름다운 장미꽃들은 동서 교류의 산물로 자리 잡았다.
원래 동양과 서양에서 야생하던 원종이 19세기 이후 서로 만나 교접함으로써 비로소 오늘날 600~700종에 이르는 개량 장미를 선보이게 된 것이다. 그 교류의 이어주는 역할을 한 장미가 시라즈 장미로 나타난다. 장미와 더불어 시라즈를 페르시아 도시로 낭만적으로 유명세를 탄 것에는 포도주가 큰 역할을 했다. 오늘날은 이슬람 율법으로 인해 술 이야기를 할 수 없겠지만, 지난날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포도주가 없었다면, 대시인 하피즈가 페르시아의 시성이 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 정론이다. 카스피해를 둘러싼 페르시아 지방은 포도의 원산지인데다, 시라즈는 예로부터 포도주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현재 시중에도 있는, 단 맛의 호주산 ‘시라즈’ 포도주는 아마도 높은 고지대에 위치한 시라즈에서 생산된 것이 가장 품질이 좋은 것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시라즈를 페르시아의 중심, 요람으로 만들게 한 정신적인 기반에는 문학 예술, 특히 시 문학이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시라즈를 시의 도시라고도 한다. 시라즈에는 이곳에서 탄생한 2대 시인이 있다. 그들의 시 세계는 다음 연구에서 설명하려 한다.
시라즈는 페르시아의 산실인 파르스의 심장으로서 역사의 부침 속에서 시종 변함없이 그 역정을 대변하는 모습으로 그 세력을 시작한 요람으로 자리 매김 되어 왔다. 무슬림 세계의 서부가 파티마 왕조를 중심으로 세력이 통일되어 가는 것에 비하여, 동부 지역은 지속적으로 분열상을 보이고 있었다. 사파르(Ṣaffār) 왕조(867~913)의 수도가 사만(Sāmān) 왕조에 의하여 불과 2년 사이에 두 번째로 점령을 당한 후, 약 150년 동안 페르시아 지역은 혼란을 거듭하였다. 이 틈을 이용하여 타바리스탄의 마르다비즈(Mardavij)는 이스마일 파의 이름 아래 928년경 이란 중부에서 상당한 세력을 형성했고 조로아스터 교적인 고대 페르시아 문명의 재건을 도모했다. 그러나 935년에 마르다비즈가 암살당하자 지여르 왕조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대신 등장한 세력이 카스피 해 남쪽의 다일람(Daylam) 지역 출신인 페르시아의 열두 이맘 시아파에 속하는 부와이흐(Buwayh : 일명 Buyeh) 가문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났다. 이 가문의 3형제는 본래 마르다비즈 휘하에서 종군하고 있었으나, 그가 암살당하자 이어 장남인 알리는 이스파한과 파르스 주를, 둘째인 하산은 지발(Jibāl) 지역을, 막내인 아흐마드는 케르만(Kerman)과 후지스탄 지역을 장악하였다.
부와이흐 왕조는 페르시아 지역의 패권을 장악한 최초의 시아파 왕조다.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라시드 칼리프 왕조에 멸망당한 이후, 페르시아는 아라비아 제국에 약 200여 년 간 편입되었으나 압바스 왕조가 분열하고 150년 동안 페르시아 동부 지역과 호라산 지역에서 타히르 왕조, 사파르 왕조, 사만 왕조가 흥망을 거듭하는 등 페르시아의 세력이 다시 중흥하기 시작했다. 이를 “페르시아인의 막간”이라고 한다. 945년에 메소포타미아에서 생긴 기근 때문에 혼란이 일어나자, 아흐마드는 군을 동원하여 바그다드를 점령하였고, 칼리프의 근위병인 투르크계 맘루크 용병들은 저항할 생각도 하지 않고 도주하였다. 이제 바그다드의 수니 칼리프는 투르크계 맘루크 군에게서 벗어났으나, 페르시아 출신의 열두 이맘 시아파인 아흐마드의 수중에 함락되었다. 당시 영내 거주민들의 절대 다수가 수니파였기 때문에 부와이흐 왕조의 아흐마드는 수니 칼리프의 제거는 이롭지 않다고 보았다. 결국, 칼리프는 아흐마드에게 무이츠 알 다울라(Mu'izz al-Dawlah : 왕국의 간성)라는 칭호를 수여하게 된다.
그의 공적 지위는 최고 사령관(Amῑr al-Umara : 사령관 중의 사령관)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는 통치의 상징으로 자신의 이름도 금요일 집단 예배(Kḥutbah) 때 할리파의 이름과 더불어 기원되기를 주장하여 실현시켰으며, 자신의 이름을 주화에도 새겼다. 부와이흐 왕조(945~1055)가 바그다드를 지배한 100여 년 동안 그들은 칼리프를 자신들의 수족으로 삼고 즉위 또는 폐위시켰다. 3형제가 죽은 뒤에는 2세들 사이에 권력 정쟁이 발생하여 내란으로 몰고 갔으나, 그들 가운데 아두드 알 다울라(‘Aḍud al-Dawlah, 949~983)가 경쟁자를 밀어내고 부와이흐 왕조의 군소 제국(群小諸國)을 통일하여 큰 제국을 형성했다. 그러나 알 다울라가 죽은 이후 다시 군소 국가로 전락하여 내분이 발생했다. 이 제국의 동부 영토는 1029년에 가즈나(Ghaznah) 왕국에 병합되었고, 1055년에는 셀주크투르크의 침략으로 인해 멸망하게 된다. 부와이흐 왕조 말기에는 내분이 매우 심각했기 때문에 외적에 대하여 국경을 방어할 힘도 관심도 없었다. 이 왕조가 무슬림 세계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기간에는 바그다드의 중앙 정부는 비무슬림 국가와의 직접적인 접촉은 거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