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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 내전의 참혹한 흔적, 학살당한 시민들의 무덤
  • 알렉세이정 칼럼리스트
  • 등록 2026-05-12 19:30:27

보스니아 내전 당시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주민들이 총을 들고 싸우면서 엄청난 학살들이 발생했다. 1991년 52만 명에 달했던 인구가 사라예보 포위전 이후 30만 명으로 급감한 뒤 수십 년 넘게 겨우 10만 명 정도 회복한 상태이다. 죽은 사람들도 워낙 많아서 시내를 둘러보면 곳곳에 묘지들이 위치해 있다. 이 당시 1,425일간 포위를 당해 현대사에서 가장 오래 포위당한 도시로 기록되었다. 그 참혹했던 레닌그라드 포위전보다도 훨씬 오래 갔다. 이 때 사라예보의 여성들은 제노사이드에 더하여 심지어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강간 피해까지 입는 비극을 겪었으며, 이 사건은 〈그르바비차(Grbavica)〉라는 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내전 당시 희생된 시민들의 묘지, 출처 : 필자의 직접 촬영


1992년 보스니아 전쟁 개전 이전부터 세르비아계 정당과 단체들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연방에서 독립을 시도할 시 세르비아계 또한 독립하여 세르비아계의 나라인 스르브스카 공화국을 세울 것"을 선언하였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회주의 공화국은 국민투표를 거쳐 독립을 강행했고 마침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의 이름으로 독립을 선포한다. 국민투표를 보이콧하고 '스르브스카'의 깃발 아래 조직되어 있던 세르비아계 민병대는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대통령이 지도하는 무슬림 공화국이 유럽 한복판에 서는 것에 반대한다'는 명분을 걸고 보스니아를 전격하여 공격하기 시작했다. 


1992년 4월 4일 세르비아 민병대는 사라예보 서남부의 사라예보 국제공항을 봉쇄했으며 사라예보 시내를 관통하는 밀랴츠카 강 남부의 시가지를 점거하고 시내로 진입하면서 엄청난 사상자들이 생겼다. 이 사건이 물리적 충돌로 이어질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한 사라예보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독립국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의 건국을 축하하며 세르비아 민병대를 막아서고 있었고, 홀리데이 호텔을 점거한 세르비아 민병대의 저격으로 첫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한다.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주도하던 연방 정부군인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은 직접적으로 개입하진 않았지만 보스니아 전쟁에 대비해 전쟁 발발 직전부터 은밀하게 라도반 카라지치가 주도하던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 민병대로 편입되고 있었다. 


그와 같이 세르비아계 민병대는 민병대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13,000명에 달하는 병력과 이에 상응하는 기갑, 중화기로 무장하고 사라예보를 포위해 1425일간 사라예보를 드나드는 모든 물자와 사람을 통제하였다. 사라예보에는 7만 명 규모의 보스니아 정부군이 있었지만 이들은 기본적으로 도시군대로서 화력과 작전계획이 충분하지 않았고, 사라예보를 둘러싼 산지의 요새를 빼곡히 점거한 세르비아 민병대를 밀어내지 못했다. 사라예보 포위전 중 발생한 숱한 포격전으로 도시 내 무수한 숫자의 가옥이 파괴되었는데, 이 포위전으로 소실된 건물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 국립도서관(Национална и универзитетска библиотека Босне и Херцеговине)을 꼽을 수 있다. 


오스트리아 양식으로 지어진 이 국립도서관은 1896년에 개관하여 보스니아에 남은 오스만 제국 문서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다양한 문서 원전이 보존된 보스니아 문화의 중심지로 기능했다. 사라예보 포위가 시작된 4월로부터 4개월간 세르비아 민병대는 도시 포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막상 도시 내에 주둔한 정부군과의 직접 교전을 통한 소모전은 피하고 있었다. 사라예보에 대통령궁과 내각이 자리잡고 있는데, 전 국토를 점거하기 전에 이들부터 격파하면 전국에 점조직으로 흩어질 무자헤딘을 감당할 자신도 없었고, 국제사회의 주목을 끌지 않고 조용히 전체 영토를 장악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내전의 근간에 인종 간의 증오가 깊이 뿌리 박혀 있기 때문에 세르비아 민병대는 보스니아 정부 지지도가 높은 민간인들의 사기를 꺾기 위해 직접적으로 시내로 진공하는 대신 비군사적 목표물들에 포격을 감행한다. 이로 인해 수십 만 권의 역사적 원본 문서들이 보관되어 있던 BiH 국립도서관이 완전히 불타고 만다. 개전 초반에 빠르게 형성된 포위망을 보스니아 정부군 스스로 끝까지 뚫어내지 못한 이유 중 하나로 서방세계의 지원 미비를 꼽아볼 수 있다. 당시 서방세계는 유럽에서 또 다시 전쟁이 벌어졌다는 점에 대해 빨리 끝날 수 있도록 뭔가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했다. 


하지만 독립하려는 보스니아가 이슬람교 우세 국가라는 점과 보슈냐크 인들의 이슬람 신앙을 오스만 제국의 잔재로 부정적으로 여기는 시각들이 혼재하여 수도 사라예보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공세적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는 데 실패하였다. 보스니아 정부군과 이제트베고비치 대통령은 서방세계가 보스니아의 독립을 승인해 놓고 세르비아의 개입을 모른척하게 되면서 형식적인 평화 협상만을 언급한다고 비판했지만 달라지는 것은 많지 않았다. 보스니아 군이 도시 포위를 뚫기 위해 세르비아 민병대의 거점을 포격하며 대규모 교전이 벌어졌다. 이러한 교전은 포위 기간 내내 이어졌으나, 보스니아 군은 종전에 이르기까지 자력으로 포위를 뚫는 데 실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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