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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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베네수엘라 마두로 대통령 체포 이후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친중 노선의 말로’라 하며 皮相的인 견해를 보이고 있다. 이렇게 이 사태를 간단히 圖式的으로 보는데 그치고들 있는 것은 모두들 보이는 現象은 분별하지만 현상의 底邊에 있는 보이지 않는 槪念의 파악이 훈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제의 본질은 친미냐 친중이냐가 아니라 가까운 강대국과의 원만한 관계의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한편 물론 이른바 좌파 측에서는 미국을 규탄하고 베네수엘라의 좌파정치체제를 두둔한다. 베네수엘라의 정치체제와 그들이 얼마나 민중우선의 정치를 하는가는 여기서 언급을 생략한다. 그런데 베네수엘라는 가까운 강대국과 사실상 척(斥)을 지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오히려 멀리 있는 중국과 러시아와의 교류가 원활하다. 강대국이란 것은 단지 군사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는 물론 국가단위로만은 包括하기 어려운 학술 문화의 總體的인 支柱가 되어주어야 한다. 그런데 베네수엘라가 가까운 미국과 교류가 어려워지면 베네수엘라의 서민의 자식들은 밀항하여 입국하는 것 이외에는 취직 학업 등에서 자기나라에서 이루기 어려운 성취를 가까운 미국에서 하기 어려울 것이다. 서민의 자식들은 복지혜택은 받되 신분개척은 어려울 것이고 설사 신분상승이 되더라도 ‘노동자계급대표’에 그칠 것이다. 당연히 더 멀리 유럽에 까지 유학을 갔다 올 여력이 되는 계층만이 엘리트코스를 밟게 될 것이다. 실제로 지금 권력을 승계 받은 부통령도 유럽유학 출신이라고 한다.
인근 국가와의 긴장관계가 국가지도층으로 하여금 통치를 쉽게 하고 국민의 이탈을 방지한다는 것을 理解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춘추전국시대의 遠交近攻은 국가의 주인이 王侯였던 시절의 외교전략이었다. 지금은 국민이 나라의 主人인 시대이다. 비록 국민 다루기가 어려워진다 하더라도 인근 국가 특히 강대국과의 원만한 관계는 국민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고 국민으로 하여금 국내에서의 생활환경에 탄생지의 어드밴티지를 추가한 점수가 인접국가나 근방 강대국보다 높도록 해야 그 나라를 다스릴 자격이 있는 것이다. 탄생지 어드밴티지를 더하고서도 이웃 타국가보다 국민생활점수가 낮다면 이는 국가지도자의 심각한 타락이다. 민생 외에도 국민일반의 자기계발을 위한 기회에서 인접한 ‘大處’를 외면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국가지침은 원거리 유학이 가능한 소수 지배층의 특권을 더해주면서 결코 민중을 위한 정부라고는 보기 어려운 것이다.
한국 역시 기존의 동맹과는 다른 차원에서 국민의 정서문화적 균형을 보장하도록 인근 강대국들과의 원만한 관계를 확보하는 것이 일각에서 베네수엘라와 같은 사태를 염려(?)하는 飛躍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하는 길이다.

ai(chatgpt)에 의한 철학적 분석
개념을 상실한 정치의 귀결
― 베네수엘라 사태와 표상적 사유의 한계
미국이 베네수엘라 대통령 **니콜라스 마두로**의 체포 문제를 거론하자, 한국 사회에서는 이 사태를 “친중 노선의 결과”로 해석하는 담론이 빠르게 확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현상을 분류하는 데에는 성공할지 모르나, 사태를 가능하게 한 조건을 설명하는 데에는 실패한다. 이는 정보의 부족이 아니라, 개념 사유의 결여에서 비롯된 판단이다.
칸트의 용어를 빌리자면, 이 해석은 경험적 직관의 나열에 머무른다. 친중·친미라는 구분은 감각적으로 주어지는 정치적 표상일 뿐이며, 그것이 성립하게 된 인식의 조건을 드러내지 못한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무엇이 일어났는가”는 말할 수 있지만, “왜 이런 일이 가능해졌는가”를 묻지 않는다.
헤겔적으로 말하면, 이는 표상(Vorstellung)에 머무른 의식이다. 표상은 대상을 외적 관계 속에서 분류하지만, 개념(Begriff)은 대상을 그 내적 필연성 속에서 파악한다. 친중이냐 친미냐는 외적 관계의 진술일 뿐, 국가가 처한 객관적 구조를 규정하지 않는다. 그 구조를 드러내는 개념은 오히려 가까운 질서와 먼 권력이라는 구도에 있다.
여기서 ‘가깝다’와 ‘멀다’는 지리적 거리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언어, 사고 방식, 문화적 번역 가능성, 그리고 국민이 자기 언어 안에서 최고 수준의 사유에 도달할 수 있는 조건을 의미하는 질서 개념이다. 가까운 질서란 단순한 외교 상대가 아니라, 한 사회의 지적·정신적 성장 가능성이 내재된 생활 세계다.
베네수엘라의 문제는 특정 진영을 선택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 가까운 질서를 정치 권력이 스스로 훼손했기 때문에 발생했다. 라틴아메리카라는 문화권 안에서 자국민이 자기 언어와 사고 체계를 통해 최고 수준의 지성에 도달할 수 있는 경로 대신, 먼 초강대국과의 대결 구도를 정권 유지의 핵심 장치로 삼았다. 이때 국가는 자립적 주체가 아니라 타자의 질서에 종속된 매개물로 전락한다.
이러한 정치 구조는 통치자에게는 합리적이다. 국민이 자기 문화권 안에서 고급 사유에 도달하기 어려워질수록, 지식과 판단력은 해외 이동이 가능한 소수 계층의 독점물이 된다. 민주주의는 보편적 이성의 실현이 아니라, 절차적 장치로만 존속한다. 헤겔이 말한 의미에서의 자유, 즉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이성으로서의 자유는 이 조건에서 실현될 수 없다.
한국 사회의 문제는 이 구조를 보지 못한 채, 결과만을 도덕적으로 평가하려는 데 있다. 친중이니 친미니 하는 프레임은 사유를 단순화하지만, 그만큼 현실을 은폐한다. 이는 정치 판단의 실패 이전에 인식론적 실패다. 개념을 통해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는 사회는, 반복해서 같은 현상을 다른 이름으로 경험할 뿐이다.
한국은 미·중이라는 두 거대 문화권의 경계에 위치해 있다. 이 조건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이 경계 상황을 개념적으로 사유할 능력이 있는가다. 어느 쪽에 더 잘 보여야 하는가를 묻는 순간, 국가는 이미 표상적 사유에 사로잡힌 것이다. 반대로, 자기 언어와 역사, 사고 체계 안에서 국민의 지적 성장을 지속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사유할 때 비로소 정치의 개념이 성립한다.
강대국은 언제든 필요에 따라 관계를 재편한다. 그러나 개념을 상실한 국가는, 그 변화 앞에서 자신을 규정할 언어조차 잃는다. 베네수엘라 사태는 친중의 실패가 아니라, 개념 없는 정치가 맞이하는 필연적 귀결이다. 한국이 이 사태를 진영 논쟁으로만 소비한다면, 그것은 외교적 오판이 아니라 철학적 자기 포기의 징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