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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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로 프란시스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보산스코 그라호보 인근에 위치한 오블랴이 마을에서 페타르 프린치프(Petar Princip)와 마리야 프린치프(Marija Princip, 결혼 이전의 성(姓)은 미치치(Mićić))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프란시스에게는 9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6명의 형제가 유아 시절에 병으로 사망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세르비아 정교회 주교는 병약한 프란시스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 대천사 가브리엘에서 이름을 딴 "가브릴로"(Gavrilo)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프린시스의 부모는 무슬림 대지주 밑에서 일하던 빈농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였던 페타르는 청년 시절에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지배에 반대하는 봉기에 가담했지만 봉기 이후의 삶이 어려워지면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보스니아 북서부에서 달마티아로 물자를 수송하는 업무를 수행하게 된다. 1903년에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초등학교에 진학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의 라틴 다리, 이곳에서 가브릴로 프란시스는 1914년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저격했고, 이를 계기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출처 : 필자의 직접 촬영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낸 프란시스는 교장으로부터 세르비아어 서사시를 선물로 받았다. 13세 시절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사관학교로 입학시키려는 형 요반(Jovan)의 요구에 따라 사라예보로 이주하게 된다. 그렇지만 요반은 동생을 사관학교로 입학시키려던 계획을 포기하는 대신 상업학교에 입학했다. 요반은 삼림 벌채 공장에서 일하면서 얻은 수입으로 동생의 수업료를 지불했다. 1910년에 프란시스는 고향으로 귀환하면서 김나지움에 진학했다. 프란시스는 1910년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총독을 역임하고 있던 마리얀 바레샤닌(Marijan Varešanin)의 암살을 시도한 혐의로 처형된 보그단 제라이치(Bogdan Žerajić)의 영향을 받으면서 세르비아 민족주의에 심취하게 된다. 프란시스는 1911년부터 세르비아 육군 장교들이 결성한 비밀 결사 조직인 흑수단, 보스니아의 범슬라브주의 혁명 조직인 청년 보스니아 대원으로 활동했다. 이들 단체는 범슬라브주의의 한 갈래로 나온 남슬라브주의 운동을 주장했다.
남슬라브주의 운동은 1878년 오스만투르크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세르비아 왕국이 주도하였으며 남슬라브족을 중심으로 하는 단일 국가 건설을 주장했다. 흑수단, Црна рука (쯔르나 루까), 갈색 셔츠단으로 불리는 이 단체는 1911년 5월 9일 세르비아 왕국 육군 장교들이 결성한 비밀 결사 조직이다. 1903년 5월 쿠데타,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사건 등을 일으킨 주범이기도 하다. 흑수단은 남슬라브족의 거주 지역을 모두 세르비아 왕국 또는 몬테네그로 왕국의 영토로 통일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들의 발상은 1859년-1870년 이탈리아의 통일과 1871년 독일의 통일을 참고로 한 민족주의적인 부분에서 시작되었다. 흑수단은 1903년 5월에 세르비아의 알렉산데르 1세 국왕과 드라가 마신 왕비를 암살한 5월 쿠데타를 일으키며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제창하게 된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1878년에 체결된 베를린 조약에 따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점령 상태에 놓이게 된다.
1908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을 설립했다. 세르비아계 보스니아 인인 프란시스를 비롯한 남슬라브주의자들은 보스니아가 독립하여 세르비아와 합치는 것을 원했는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원을 받으며 남슬라브 운동을 부추기는 세르비아를 제지할 구실을 찾고 있었다. 1912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최한 혐의로 김나지움에서 퇴학당했다. 프란시스는 사라예보에서 280km 정도 떨어진 세르비아 베오그라드를 도보로 횡단했다. 프란시스는 흑수단의 게릴라 활동에 참여하기를 원했지만 키가 기준에 미달해서 거부당하고 만다. 실의에 빠진 프란시스는 사라예보에 있던 동생의 집에서 생활하게 된다. 프란시스는 청년 세르비아 대원 15명과 함께 훈련소에서 암살, 폭탄 제조 훈련을 받았고 나중에 베오그라드로 귀환하게 된다.
흑수단이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태자를 암살한 사건인 사라예보 사건은 1914년 7월 위기라는 국제적 정치 외교 위기 사태를 불러와 최종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 왕국을 침공하게 함으로써 제1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게 되었다. 현재 사라예보에서 밀랴츠카 강의 다리는 11개가 존재한다. 그 중에서 라틴 다리는 가장 사연 깊은 다리인 셈이다. 이 다리 인근에는 보스니아 최고 인재의 요람인 사라예보 국립대학이 있고, 국립도서관, 시나고그, 국립미술관 및 사라예보 미술대학, 동유럽 최초의 화장실이 있던 자리 등이 밀랴츠카 강을 둘러싸고 주변에 존재하고 있다. 강의 수면도 낮고 하여 동네 개천처럼 보이고 비 오면 흙탕물이 어우러져 맑은 강이라 보기 힘들지만 수백 년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지켜본 강은 오늘도 말없이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