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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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가 주도하던 구(舊) 유고슬라비아 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이루어낸 지 20여 년 만에 크로아티아는 여러가지 좋지 않은 상황을 이겨내며, 2012년 1월 22일 EU 가입을 묻는 국민투표에서 전체 투표자 43.58% 중에서 찬성 66.27%로, 마침내 2013년 7월 EU 가입을 확정지을 수 있었다. 이는 어쩌면 2000년 이후, EU 가입을 통해 진정한 유럽 국가로 도약하고자 했던 크로아티아의 계획이 마침내 달성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EU 가입 과정에서 크로아티아는 EU 가입에 있어 나타난 여러 장애물들 중 갸운데 가장 껄끄럽고 큰 요인이자 국제 사회에서 우려를 나타냈던 이웃 세르비아와의 갈등을 해소하려고 했다. 크로아티아는 EU의 기준에 따라 자국 내 세르비아 소수 민족의 권리 보장 및 이들과의 평화적인 관계 복원을 약속하게 되었다. EU는 마스트리히트(Maastricht) 조약 정신에 따라, 회원국 내에서 소수 민족의 언어와 문자를 보호하려는 노력을 지속해 왔으며, 따라서 현재 EU 내 공식 언어만도 크로아티아어를 포함하여 24개에 이르고 있는 상황이다.

유로에 가입한 크로아티아,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국경 보더, 출처 : 필자의 직접 촬영
2013년 7월 1일, EU에 가입한 크로아티아는 소수 민족 주민 수가 3분의 1을 초과하는 지역에서는 소수 민족의 언어와 문자를 병기해야 한다는 EU의 요구를 자국의 헌법을 개헌하면서까지 그 법령에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들, 옛 우스타샤의 후예들이 정치권에서 꽤 많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들은 소수 민족들에게 권리를 주는 것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당시 여당인 민주연합은 EU에 가입하는 것이 크로아티아의 내부 경제 문제에서 관광업에 치중되어 있는 것을 탈피해 경제 분야의 다변화는 필연적인 부분이라 역설하며 극우주의자들을 설득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면서 가장 먼저 이와 같은 소수민족에 대한 권리에 대해 부코바르(Vukovar)에 가장 먼저 적용시켰다. 부코바르는 내전 이전인 1990년엔 44,639명의 인구, 즉 크로아티아인 47.2%, 세르비아인 32.3%가 집단 거주하고 있었던 지역이다. 당시 2011년의 통계에 의하면 부코바르 지역의 인구가 27,683명으로 급격히 줄어들었으며, 이 중 크로아티아인이 57.37%, 세르비아인이 34.87%를 차지하고 실정이다. 2013년 9월, 크로아티아 정부는 부코바르의 공용 표지판 및 공공 기간 현판에 크로아티아의 라틴(Latin) 문자와 함께 세르비아인들이 사용하는 키릴(Ćiril) 문자를 병기했다.
그런데 문제는 부코바르에 거주하고 있는 크로아티아계 주민 및 크로아티아인들은 그 날 이후로 현재까지 키릴 문자와 서로 병기되어 있는 현판들을 훼손하거나 부수는 등 집단적으로 반발했다. 이와 함께, 과거 세르비아 민족에 의한 대량 학살이 이루어졌던 부코바르 지역 내 주민들을 고려해 EU 요구 조건이 예외적으로 적용될 수 있도록 ‘특별존중지역(Područje posebnog poštovanja)’으로 선포할 것을 강하게 요구했다. 또한 이러한 요구 조건을 관철시키기 위해, 이미 2014년 5월 초까지 크로아티아 전체 유권자의 10%가 훨씬 넘는 65만 여 명의 서명을 받아 국민투표를 요구했다. 크로아티아의 서명 법에 따르자면, 유권자 10%가 넘는 서명이 이루어질 경우, 해당 내용을 국민투표에 붙일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부코바르는 세르비아계 소수 민족들이 밀집되어 있는 지역이다. 이는 오늘날 세르비아 보이보디나(Vojvodina) 지방과의 접경을 이루고 있는 슬라보니아(Slavonia) 지방에 자리하고 있다. 유고슬라비아 내전 당시 부코바르는 당시 세르비아인이 주도하던 유고슬라비아 연방군(JNA)에 의한 공격으로 크로아티아 여러 도시들 가운데 가장 큰 피해와 함께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배출된 곳이기도 하다.
실제로 1991년 11월 유고슬라비아 내전 당시 약 2,000여 명으로 구성된 크로아티아 시민군이 지키고 있던 부코바르에서는 약 36,000여 명인 유고슬라비아 연방군이 약 87일 동안에 걸친 장기간의 포위와 더불어 대량 학살이 이어졌다. 당시 크로아티아 시민군과 민간인 등 약 2,000여 명이 살해되었으며, 약 800여 명은 실종되었고 약 22,000여 명은 유고슬라비아 군에 의해 다른 곳으로 강제 이주를 당해야만 했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참상의 흔적과 아픈 기억은 내전이 발생하기 이전에 만들어진 레스토랑을 비롯, 시 전망대가 있었던 ‘워터타워(Vukovarski vodotoranj)’ 기념비 등에 아직까지 그대로 남아 있는 상황이다. 이처럼 부코바르 대학살의 참담한 기억과 상처는 크로아티아가 EU에 가입한 이후, 또 다시 이 지역의 평화를 위협하는 심각한 도전으로 부활하고 있다. 그 동안 크로아티아 정부는 EU 가입 전제 조건인 발칸 유럽의 평화 정착을 위해 세르비아와의 화해 및 관계 개선 노력을 기울여 왔던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크로아티아의 세르비아 소수 민족 문제를 해결하는 부분과 주변 국가들과 관계를 개선하려는 노력과 의지는 독립 크로아티아의 세 번째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보 요시포비치(Ivo Josipovic) 대통령의 2010년 2월에 열린 당선 연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요시포비치 대통령은 언론회견에서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간 정치적 해결의 공감대에 기초해 우호관계 발전을 제안하였고, 비록 크로아티아는 코소보에 대한 독립을 인정하면서 양국 간 관계를 경색시켰던 이유 중 하나가 되었지만 그로 인해 양국 간 관계 악화가 더 이상 지속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화해 모드를 표방하기도 했다. 더불어 크로아티아인이 상당수 거주하고 있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게도 내부적 안정을 도모하기를 바라면서 국제 사회와의 유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크로아티아의 국익에 부합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상기시키기도 했다. 당시 이와 같은 발표는 발칸 유럽 지역의 안정과 평화를 바라는 국제 사회와 EU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반면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들 및 우타샤의 후예들이 이에 절대적으로 반발함은 물론이고 부코바르 지역을 비롯해 세르비아와의 내전에서 가족과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전쟁 피해자들이 거칠게 항의했기에 이러한 국내 내정에 상당한 진통이 이어졌다. 특히 이는 세르비아 측이 크로아티아인 학살에 대해 여태까지 사과와 배상을 한적이 없었기에 더더욱 내부에서 반발이 극심해졌다.
이처럼 내부에서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요시포비치 대통령은 2010년 4월 보스니아 내전 당시 크로아티아 민병대들이 무슬림 민간인 116명을 학살한 아흐미치(Ahmici) 학살 사건과 모스타르(Mostar) 도시 파괴 등을 사과하면 배상을 약속했다. 보스니아 무슬림들이 크로아티아인을 학살했던 보스니아 마을(Krizencevo Selo) 또한 방문하여, 희생자들의 추모와 함께 보스니아와의 화해 를 타진히고 미래에 대한 협력을 요청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러한 요시포비치 대통령의 노력은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간 국경위원회 회의가 자그레브에서 개최되어 그동안 소규모적인 영토분쟁에 휘말렸던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 국경을 확정하는 협의가 논의되었다. 이어 양국 간 총리 회담 등 여러 고위급 회담 자리로 이어졌고 이 회담들에서 크로아티아가 세르비아의 EU 가입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등 양국 간 화해 분위기가 빠르게 진전되었다. 그리고 2010년 6월, 자그레브에서 양국 간의 과거 청산을 위한 마지막 절차라 할 수 있는 양국 국무장관 간의 군사 협력 협정을 체결했다. 그리고 베오그라드에서는 양국의 법무장관이 만나 부패 및 조직범죄에 관한 양국 간 범죄인 인도조약을 체결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2010년 7월엔 요시포비치 대통령이 세르비아를 방문하여 보리스 타디치(Boris Tadić) 대통령과 회동하였고, 회담에서 양국 피난민의 자유로운 입국을 허용할 것과 각 영토 내 소수민족들의 언어 및 문화 정체성을 인정하고 문화재 반환 등 과거 유고슬라비아 내전에 관한 청산 문제 등이 중점적으로 논의되기도 했다. 양국 간의 이와 같은 화해 무드는 경제적인 교류 확대와 발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2010년 이후로 크로아티아는 세르비아 내 투자 규모 6위로 상승하였으며, 단절 이후 교역량이 8배 이상 증가하는 효과거 이어졌다. 또한 이는 크로아티아 기업들의 세르비아에 대한 투자 확대로 이어졌고, 2011년 약 10억 유로 이상이 세르비아에 투자되는 등 양국 간 경제 교류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더불어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간의 화해는 과거 연방의 구성국이었던 슬로베니아 기업들과의 상호 투자와 교역 관계로 이어지게 하고 있으며, 국영 철도 합작 회사를 설립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서로 건의 협력을 증진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간의 화해 무드는 2010년 11월 타디치 세르비아 대통령이, 요시포비치 크로아티아 대통령과 함께 유고슬라비아 내전 당시 가장 큰 전쟁의 피해를 입었던 부코바르를 방문하여 민간인 희생자를 추모했다.
이어 내전 당시 세르비아군에 의해 저질러진 과거사에 대해 사과하는 것까지 발전되었다. 무엇보다도 과거의 내전 당시 저지른 인종 학살에 대해 당시 세르비아의 공식적인 사과가 이루어졌다. 이에 양국 간 과거사 극복을 위한 우호 관계 증진의 노력이 중요한 결실을 맺었다는 것에서 이는 역사적인 의미와 함께, 발칸 유럽 지역의 안정과 진정한 평화적 토대를 구축되었다는 것을 의미했었다. 하지만, 부코바르의 키릴 문자 공용 표기를 둘러싼 갈등의 경우와 같이, 힘들게 발전시켜 온 양국 간, 양민족 간 화해와 평화 무드는 크로아티아가 EU 가입이 확정되면서 모두 깨졌다. 이와 함께 2014년 3월 4일에는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양국가가 내전을 벌이면서 이루어진 여러 학살 행위를 인종 학살로 규정하고 크로아티아 측이 세르비아를 국제유고전범재판소(ICTY)에 고소했으며 이에 세르비아도 그동안의 화해를 깨고 크로아티아에 맞고소를 하면서 재판이 시작되면서 모처럼 불어온 발칸의 훈풍은 차가운 냉방으로 바꼈다. 크로아티아는 지난 2014년 ICTY 제소 내용을 토대로 세르비아가 지난 1991~1995년 독립전쟁의 기간 동안 약 2만여 명의 크로아티아계 민간인 학살과 인종 청소를 주도했다는 점을 비난했다.
이에 대응해 같은 해 하반기 때 세르비아도 크로아티아를 ICTY에 제소하면서, 내전 기간 동안 크로아티아 민병대가 저지른 인종 학살과 더불어, 당시 세르비아인들의 포로 구금 상황이 세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크로아티아 극우 정권이었던 우스타샤(Ustaša) 정권에서 자행된 나치 강제 수용소와 같다고 비난하고 있다. 향후 부코바르 문제를 비롯해 양국 간 관계, 그리고 더 나아가 발칸 유럽 지역의 평화는 요원하다. 특히 크로아티아가 EU에 가입 충분 조건을 지키기 위해 세르비아와의 화해를 이용한 셈이나 마찬가지니 세르비아 입장에서 그 분노와 배신감은 컸다. 크로아티아 EU 가입 문제, 그로 인해 크게 알려지 않았던 잠시 동안의 세르비아와의 화해와 EU 가입 직후, 태도를 바꿔 세르비아를 배신한 크로아티아 이야기, 두 나라는 서로가 멸망해 없어질 때까지 견원지간(犬猿之間)의 관계는 앞으로 영원히 지속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