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의 근대 철학이 우리에게 보여 준 확실한 덕목이 하나 있다. 근대 철학은 객관적인 그 무엇(X)에 대한 권위를 액면 그대로 인정하는 대신에 그것을 판단하는 확실한 기준으로서 '주체'( Cogito)을 정립했다. 자기에게 좋으면 그게 좋은 것이고 선한 것이고, 자기에게 나쁘면 그것이 나쁜 것이다. 스피노자가 말한 것처럼, 나의 존재 역량을 확장시키면 그게 도덕적으로도 선한 것이고, 나의 존재 역량을 감소시키면 그것은 도덕적으로도 약한 것이다. 선(the good)과 악(the bad)은 그전 시대처럼 바깥에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판단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외부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객관적이거나 초월적인 절대 x에 대한 모든 것을 판단하는 확실한 기준은 나 자신이다.
데카르트는 신과 수학적 진리까지도 포함해 있는 것 모두를 회의 선상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게 회의를 해도 회의할 수 없는 것, 즉 회의하는 자아의 존재를 회의할 수는 없다. 다른 것을 회의하기 위해서는 이런 회의하는 자아의 전재가 선 존재로서 인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자아는 더 이상 회의할 수 없는 확실성(Gewissheit)이고, 이 확실성이 곧 진리(Wahrheit)가 된다. 데카르트가 이렇게 획득한 확실성은 종교 혁명을 일으킨 루터의 양심(Gewisse)와 어원적으로 동일하다. 내 안에 있는 양심은 신과 바로 소통할 수 있는 절대적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데카르트나 루터 모두 초월적 X를 판단할 수 있는 주체적 관점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중에 칸트는 "저 위 하늘에는 빛나는 별이 있고, 내 마음속에는 도덕 법칙이 있다"라고 하면서 도덕 법칙의 확실성을 주체 안에 정초를 했다. 근대인은 이러한 주체적 관점을 통해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조선에서는 19세기 후반에 등장한 동학에서 이런 관점이 나타난다. 동학에서 말하는 內有神靈 外有氣化는 신령이 내 안에 있고, 기화는 밖에 있는 것이다. 인간이 곧 하늘이고(人乃天), 이처럼 인간에 내재하는 신성(神性)을 깨닫고, 그 가치를 존중할 것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동학의 기본 정신은 인식론적 의미에서 볼 때 서구 근대 철학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것이다. 최제우는 조선 500년간 이어져 온 철학을 혁신한 사상가이다.
아무튼 이런 관점과 정신에 충실하면 우리가 칸트나 헤겔, 니체나 마르크스, 프로이트나 20세기에 별처럼 화려하게 등장하는 수많은 철학자들을 절대화하고 맹신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결국은 나의 관점에서 이 모든 사상이나 철학을 수용하고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의 나에는 우리가 들어갈 수 있고, 우리 시대와 우리 사회도 들어갈 수 있다. 이런 주체적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좋은 것, 우리 시대에 살아남은 것, 산 것과 죽은 것 등의 관점에서 그런 철학들과 사상들을 얼마든지 상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 철학계의 현실은 어떤가? 여전히 한국의 철학자들에게는 수용과 맹신 그리고 절대화만 있을 뿐이다. 우리 바깥에 있는 초월적 X로서의 사상들과 철학들은 칸트의 '물자체'(Ding an sich)처럼 그저 수동적으로 수용하고 맹목적으로 믿어야 하는 절대적 대상들일 뿐이다. 사실 칸트조차도 물자체는 그저 '촉발'(affiziren) 할 뿐 직관의 선험성과 능동성을 강조했다. 그런데 한국의 철학자들은 이미 수백 년 전에 서양의 근대 철학자들이 깨달은 주체적 정신, 19세기 말 수운 최제우 선생이 깨우친 내유신령의 정신을 여전히 깨치지 못하고 있다. 서양 철학이 이 땅에 들어온 지 100년이 넘도록 여전히 자기 철학을 하지 못하는 까닭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도대체 한국 철학계는 뭐 하는 곳인가?
에세이철학회는 철학의 학문적 수준도 충족하면서 철학의 대중화와 일상화를 가장 중시 여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