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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천초목(山川草木)에도 불성(佛性)이 있다?
  • 황인오 기자회원
  • 등록 2026-07-01 07:53:40
  • 수정 2026-07-01 07:55:16
  • - 기후위기 시대의 동학사상의 삼경론(三敬論)

산천초목(山川草木)에도 불성(佛性)이 있다?

- 기후위기 시대의 동학사상의 삼경론(三敬論)

불교의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은 본래 유정(有情)의 모든 존재가 불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요컨대 생명있는 모든 사물에 불성, 즉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후 이 논의는 산천초목 등 무정물(無情物)도 불성이 있다고까지 확장되었다. 이 논의는 이 불성이 사물에 내재해 있는지, 아니면 이미 드러나 있는지에 따라 입장이 조금 다르긴 하다. 그 중에서 불성현재론(佛性顯在論)은 유정 무정 가릴 것 없이 모든 사물에 이미 불성이 드러나 있다는 대표적인 주장이다. 이를 극단적으로 표현한 산천초목 불성론은 불교 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조화론적 사유의 한 형태다. 불교적 신심이 없는 나로서는 도대체 사람도 단지 불성이 있다는 것뿐이고 실제로 그걸 드러내어 깨닫는 존재가 극히 희소한 현실을 보면, 마소와 어패류 곤충 등 생명있는 존재는 물론 산천초목조차 불성이 있고 이미 드러나 있다는 것은 수긍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불성현재론이 연기·불성·법계(法界) 등의 논리가 "모든 존재가 본래 하나로 조화롭다"는 방향으로 전개될 때, 이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존재론으로 귀결되기 쉽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사물에 이러한 불성이 현현(顯現)된 시공간에 살고 있으므로 따로 구원의 피안을 찾아 헤맬 필요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이미 그러하다"는 선언은 현실의 차별과 부조리를 자연의 질서로 흡수함으로써, 역사적으로 지배 질서 강화에 복무하는 현실 순응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해온 측면이 있다.


해월 최시형이 언급한 동학의 삼경론 — 경천·경인·경물 — 은 표면적으로 이 산천초목 불성론, 즉 조화론적 사유와 유사해 보이는 측면이 있다. 자연과 사물을 공경한다는 지향이 불교의 불성론과 공명하는 것은 사실이며, 동학의 성립 과정에서 불교적 사유가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기도 하다.

                                        사진 출처: 구글 이미지

그러나 삼경론의 사유에 이르는 데 영향을 미친 것은 불교적 사유만이 아니었다. 한반도 민중의 심층적 심리의 저변에 흐르는 성리학 또는 유교적 사유와 서학(천주학) 등이 혼효된 조선 민중 특유의 민본주의적 사유가 종말론적 위기의식을 사상적 동력으로 삼은 최제우의 ‘시천주(侍天主)론’으로 결실을 맺었고, 해월 최시형은 이를 삼경론으로 심화·확장하였다. 유교적 또는 조선 민중의 민본주의는 본질적으로 당위의 언어다 — "백성이 근본이어야 한다",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는 규범적 요청이 핵심이며,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 전제를 내포한다. 이 당위적·규범적 성격이 불성현재론의 존재론적 완성 선언을 실천 명령으로 전환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동학의 경물(敬物)은 "모든 것이 이미 그러하다"는 확인이 아니라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는 윤리적 실천 요청으로 성립한다. 이 당위는 현실이 아직 그렇지 않다는 긴장을 내포하며, 바로 그 긴장 속에서 변혁의 동력이 생성된다. 삼경론이 19세기 한반도라는 시공간의 극심한 사회적 분열과 민중 수탈이라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형성되었다는 사실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불교적 조화론과 동학 삼경론은 자연과 사물을 존중한다는 외양을 공유하지만, 그 사유의 구조와 실천적 함의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전자가 현실 긍정의 존재론으로 귀결되어 결과적으로나 실천적으로 기존 지배 질서에 순응케 하는 반동적 경향이 강하다면, 후자는 불교적 사유를 수용하면서도 한반도 민중의 역사적 현실 속에서 성리학·유교적 사유와 조선 민중 특유의 민본주의적 필터를 거쳐 이를 윤리적 실천론으로 재주조한 것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현실 타파의 사상적 동력으로 강력히 작동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동학 삼경론의 독자성은 어느 한 사상 전통의 단순한 계승이 아니다. 불교·성리학·서학 등이 한반도라는 장소에서 조선 민중의 누적된 삶의 현실과 역동적으로 교차되며 재구성된 실천적 산물이다.


1860년 수운 최제우가 시천주론을 주창하며 동학이 처음 출현할 때에 이러한 종교적 언어로 표출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사태 전개라고 할 수 있다. 정당이나 사회단체 등 피지배층인 민중의 입장을 나타내는 언어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장치가 없었던 전근대 사회의 일반적인 행태이다. 오늘날에도 동학의 언어를 종교적 사유의 표출로 이해하고 접근하는 것 자체는 하등의 문제라고 볼 수 없다. 다만 이를 개인의 수양이나 덕적의 경로로만 이해하는 것은 동학과 동학 사유가 가진 역사적 사회적 실천성을 놓치기 쉽다는 것이다. 여기서 동학의 삼경론을 불성현재설 등 종교적 사유와 어떻게 다른지를 굳이 설명하려는 것은 이점을 명확히 하려는 것이다.


기후위기를 넘어 기후 종말을 운위할 만큼 기후변화가 인류의 존립에 심각한 도전으로 다가오는 이 시대에 삼경론 등 동학사상을 이에 대응하는 중요한 사상적 나침반의 하나로 삼아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동학을 말하고 이를 이어가려는 모든 이들은 사회과학 이론과 현대 과학의 성과를 결합하여 삼경론과 동학의 사유를 심화·발전시켜야 한다. 그것은 기후위기의 최전선에 내맡겨진 가장 가난하고 미약한 이들의 삶을 먼저 살피고 말을 건네는 공동체를 형성하고 강화하는 데 유용한 언어가 되어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사상이나 철학의 만능키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때 젊은 때에는 모든 것을 설명해 줄 것같은 일원론 또는 환원론에 빠지거나 찾아 헤맸던 거고~ 맑스든 동학이든 상보적으로 보완하고 재해석 재구성해 나가면서 점차 어디엔가 있을지도 모르는 진리 · 진실 · 진여 등에 근접해 가는 것 뿐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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