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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러시아 혁명의 과정 : 근대 러시아의 종말
  • 알렉세이정 칼럼리스트
  • 등록 2026-07-03 17:02:24

1917년에 접어들면서 러시아의 상황은 나라 안팎 모두에서 빠르게 더욱 악화되었다. 우선 외부 정세를 보면, 무장이 제대로 되지 못한 러시아 군대는 전선에서 계속하여 독일군에게 패배했고, 그리하여 수백만 명에 이르는 병사들이 그대로 죽어 갔다. 외부의 이러한 형편은 나라 안에 즉각적이며 직접적인 영향을 주어 경제가 붕괴되었다. 그 뚜렷한 증거가 파업의 빈발과 대규모화였다. 1917년 1월과 2월의 두 달 사이에 연인원 676,300명이 참가한 1,330건의 파업이 발생했다. 정부의 고위층에서는 황후의 퇴위를, 의회의 일각에서는 차르의 퇴위와 이에 따른 섭정의 옹립을 거론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제국의 군인이자 항공 역사상 최초로 곡예비행인 ‘루프 기동(Inside Loop)’을 성공시킨 항공기 조종사, 표트르 네스테로프(Pyotr Nesterov), 출처 : 러시아 근현대사 박물관에서 필자의 직접 촬영 

또, 일부 각료들은 민중의 신임을 받는 사람들로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여 난국을 수습할 것을 차르에게 직접 건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차르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2월 중순부터, 1914년 개전 직후 그 이름이 종전의 독일식으로부터 러시아식으로 고쳐진 이름의 수도인 페트로그라드(Petrograd)에는 시민들에 대한 식량 공급이 더욱 어려워졌다. 그리하여 2월 15일 현재 열흘의 비축분밖에는 남지 않았다. 이에 따라 수도군관구 사령관 하발로프 장군(General Khabalov)은 배급제를 실시했다. 그러나 2월 23일에 와서 드디어 -20℃의 추위를 견디며 몇 시간째 장사진을 이루며 기다리고 섰던 시민들에게 빵이 떨어졌다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여기에서부터 전 세계를 변혁시킨 러시아 혁명이 시작되었다. 


시민들은 빵을 요구하며 시위에 들어갔는데, 제2일에는 페트로그라드에서만 200,000명이 '라 마르세유즈(La Marseillaise)'를 부르고, 붉은 기를 흔들며 시위에 참가했다. 이들의 구호는 벌써 '빵'에서 '차르 체제 타도'로 바뀌어 갔다. 군대와 경찰도 약간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시위대에 동정적이었다. 그러나 독일군과 대치하는 전장에 있었던 니콜라이 2세는 하발로프 장군에게 다음 날까지 진압할 것을 명령하는 전보를 보냈다. 그러나 하발로프의 이를 거부했고 이어 제3일부터 군부는 오히려 반란을 일으켜 시위대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혁명 제4일째인 2월 27일에, 정부는 니콜라이 2세의 칙령에 의해 두마의 해산을 명령했다. 두마는 일단 이 칙령을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두마의 주요 정치 단체의 지도자들은 12명의 의원으로 임시위원회를 수립하고 우선 페트로그라드 내부 질서 회복에 나섰다. 


그러나 바로 그 날 노동자들과 병사들은 멘셰비키의 츠헤이드제(N. S. Chkheidze)를 의장으로 하는 '노동자들과 병사들의 대표자들의 소비에트임시집행위원회(Provisional Executive Committee of the Soviet of Workers' and Soldiers' Deputies)'를 결성했다. 이 볼셰비키나 멘셰비키 조직들 가운데 어느 한 쪽도 처음에는 스스로가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생각이나 혁명에 대한 청사진이 전무했다. 두마의 임시위원회는 여전히 차르가 민중의 신임을 받는 내각의 구성에 동의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한편, 소비에트의 역할에 대해서는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이론이 엇갈려 있었다. 멘셰비키는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혁명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우선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이루어져야 하며, 따라서 전제 체제가 자유주의적 부르주아들에 의해 완전히 타도될 때까지 사회주의자들은 권력의 장악을 회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역할을 노동자들을 도와 전제 체제를 타도하는 것에 우선 한정하고, 소비에트에 적극 참여하였다. 여기에 물론 레닌은 러시아의 부르주아 계층들은 민주적인 성격을 갖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러시아에 있어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은 노농(勞農) 계급의 동맹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이론을 제시해 왔고, 혁명이 일어나자 두마의 임시위원회를 타도하고 소비에트가 임시 혁명 정부를 수립할 것을 주장했다. 유형지에서 이제 막 풀려나오기 시작한 국내의 볼셰비키들 또한 뚜렷한 방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우선 멘셰비키와 협력하는 자세를 취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니콜라이 2세는 페트로그라드 또는 그의 가족이 머물고 있는 차르스코예 셀로로 돌아가려고 전지를 출발했으나, 노동자들이 철로를 끊어 3월 1일에 프스코프에서 내렸다. 두마의 지도자들은 군주제를 살리는 유일한 길은 니콜라이 2세의 퇴위와 르보프 공(Prince George E. Lvov)을 수반으로 하는 새 내각의 구성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군부의 동의를 얻어 프스코프로 차르를 방문해 이를 통고했다. 


니콜라이 2세도 이것을 받아들여, 3월 2일에 실제 미하일 대공(Grand Duke Mikhail)에게 양위할 것과 새 내각의 구성에 동의했다. 그러나 미하일 대공은 앞으로 구성될 제헌 의회에 의해 추대되지 않는 한 제위를 계승할 뜻이 없다고 밝혀, 결국 르보프 공을 수반으로 하는 임시 정부가 3월 2일에 구성되었다. 이로써 로마노프 왕조의 시대는 끝났다. 이것이 2월 혁명이며, 흔히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라 불린다. 임정의 요인들이 부르주아지 계열이며, 그들의 자유주의 경향은 군주제의 폐지에 국한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니콜라이 Ⅱ세와 그의 가족들은 차르스코예 셀로의 궁전에 연금되었다. 차르를 타도하고 임시정부를 세운 케렌스키는 10월 24일에 각료 회의를 열고 비상사태령을 선포했다. 수도경비사령관에게 페트로그라드 전체 병력을 지휘할 권한을 주고, 모든 소요와 반란을 진압할 것을 명령했다. 


소비에트 군사혁명위원회는 불법 단체로 선언되고, 볼셰비키 신문에 대한 폐쇄령을 내렸다. 그와 동시에 트로츠키와 기타 볼셰비키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수도경비사령부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1개 대대를 겨울 궁전에 증파했을 뿐, 볼셰비키 세력의 거점인 스몰리니 신부학교에 대해서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러자 성공을 예견하면서 트로츠키는 소비에트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의 자격으로 군대를 동원하고, 행정부 가운데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들을 일시에 점거했다. 동시에 볼셰비키 당 기관지는 임시정부의 타도를 요구했다. 이 때 레닌 역시 볼셰비키 당사가 아니라 소비에트 청사에 들어가 쿠데타를 지휘했다. 이것은 볼셰비키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소비에트의 이름으로 집권해야 한다는 트로츠키의 의견을 따른 것이다. 10월 25일 아침까지 페트로그라드의 대부분은 볼셰비키의 장악 아래 들어갔다.


그러나 미국대사관으로 달아난 케렌스키를 제외한 임시정부의 요인들이 체포되었고, 군사 혁명위원회는 임시정부의 권력이 자신에게 이양되었음을 선언했다. 트로츠키가 후일 말하기를, 볼셰비키는 군부를 거의 완전히 장악하고 있어서 그들의 승리는 손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레닌이 볼셰비키 쿠데타에 대해 "그것은 새의 털을 들어올리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고 말한 것도 이를 뒷받침 해준다. 10월 25일 아침, 볼셰비키가 장악한 페트로그라드 노병 소비에트의 군사혁명위원회는 승리의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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